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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인의 12.12 군사반란 관련 신군부 인사들의 육사 기수, 당시 계급, 생존 여부 및 안장정보. 그리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보안사령부 소속의 정도영, 우국일, 남웅종, 이차군
 34인의 12.12 군사반란 관련 신군부 인사들의 육사 기수, 당시 계급, 생존 여부 및 안장정보. 그리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보안사령부 소속의 정도영, 우국일, 남웅종, 이차군
ⓒ 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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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반란은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령부를 중심으로 하나회 등의 신군부가 결합돼 이뤄진 군사반란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안사령부는 30경비단에 모인 반란 지도부와 함께 반란의 핵심이었습니다.

당시 보안사령부 소속 군인 가운데 정도영 보안처장, 우국일 참모장, 남웅종 대공처장, 이차군 군수처장 이상 4명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으며, 최예섭 기획조정처장, 이상연 감찰실장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돼 있습니다. 그리고 권정달 정보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허화평 비서실장은 여전히 생존해 있습니다.

진압군을 도청했던 반란군이 진압군 바로 옆에 잠들다

대전현충원과 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당시 보안사령부 소속 반란군들은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5공화국에서도 악명 높았던 허삼수(하창수, 배우 홍서준) 인사처장, 허화평(문일평, 배우 박훈) 비서실장, 이학봉(임학주, 배우 이재윤) 대공수사과장 정도만 영화에 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도영 대령은 12.12 반란 당시 빼놓을 수 없는 주요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육사 14기로 보안사 내에서 전두환 다음으로 육사 최고 선배이자, 보안사 6개 처 가운데 1처로 불리던 보안처장으로 보안사령부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었습니다. 정도영의 주도로 쓰인 <제5공화국 전사>에도 그는 장군들 다음으로 이름과 사진을 올리며 반란의 주역임을 보입니다.

정도영은 비하나회인 우국일 참모장을 대신하여 보안사령부 내에서 육본 이하 전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감청을 통해 부대 출동 저지 임무를 수행한 책임자였습니다. 그는 지휘관 간의 통화를 515보안부대로부터 획득해 전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군부대 내의 보안부대를 활용하여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부대들의 출동을 저지시켰습니다.

이와 같은 중요 조치사항을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하며 12.12 군사반란이 원활히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9공수여단 회군 공작 또한 그의 지시에서 시작됐습니다. 정도영의 지시를 받은 특전사령부 보안부대는 정병주 사령관 몰래 '출동지시는 무효'라는 전통문을 9공수여단에 보냈습니다.

반란 이후 그는 5.18 학살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시 유혈진압의 근거가 된 '자위권 보유 천명 담화문'은 정도영이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전달해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안사령부 참모장을 거쳐 소장으로 예편한 그는 사회정화위원장(1986-1989), 성업공사 사장(현 한국자산관리공사, 1989-1992), 한국자유총연맹 사무총장(1992-1993)을 지내며, 막강한 권세를 누렸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131호에 안장된 정도영, 바로 옆 132호에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의 묘가 보인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131호에 안장된 정도영, 바로 옆 132호에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의 묘가 보인다.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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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2.12 군사반란 혐의로 정승화, 이건영, 장태완, 김진기, 윤흥기 등으로부터 고발당한 그는 맞고소하는 뻔뻔함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12.12 군사반란 재판에 기소되지 않았고, 이에 2010년 7월 24일 사망 후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131호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바로 옆 132호에는 보안사령부의 도청과 공작으로 반란을 끝내 막아낼 수 없었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이 잠들어 있습니다.

신군부에서 비켜나간 보안사령부 2인자

우국일 참모장은 당시 준장으로 보안사령부 이인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육군사관학교가 아닌 통역장교 4기 출신으로 하나회가 아닌 전두환의 부하이면서 선배였습니다. 그랬던 탓에 전두환의 신군부는 우국일 참모장 모르게 반란을 진행해왔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생일 집 잔치'가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 장군을 묶어두려는 작전인지도 모르고 조홍 수경사헌병단장과 함께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대신해 세 장군을 모셨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렇게 우국일 참모장은 반란에 동참하게 됐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78호에 안장된 우국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78호에 안장된 우국일
ⓒ 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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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반란 직후 32인의 반란 주역들과 그리고 보안사 요원 15인과 사진을 찍고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보직이 옮겨졌습니다. 이후 국방부 특명검열단장을 거치며 예편됐습니다. 이후 지하철공사 사장, 보험공사 부사장, 보험연수원 원장을 역임했습니다.

12.12 검찰 조사 기록에 따르면, 우국일 참모장은 반란 이후 신군부 세력이 아니라 군내 주요 보직을 맡지 못하고 예편됐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5공화국 시기에 주요 공사의 보직을 맡았고, 12.12 군사반란 당시에는 정승화 총장이 납치됐다는 사실을 알고도,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나선 진압군과 달리 보안사령부에서 밤을 지내며 상황을 방관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게 12.12 군사반란 관련 재판에 기소되지 않은 우국일 참모장은 2009년 7월 4일 사망하여 장군2묘역 78호에 안장됐습니다.

노태우의 친구 남웅종 대공처장

남웅종 또한 육사가 아닌 통역장교 출신입니다. 그리고 보안사 대공처장이면서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장이었지만, 직속 부하인 이학봉 대공수사과장을 비롯한 육사 출신의 허화평, 허삼수 등이 반란을 주도하였습니다. 반란군의 정승화 총장 연행이 대통령 재가에 의한 합법적인 연행이었다면 당연히 수사단장인 남웅종이 임무를 수행했겠지만, 불법 연행을 위해 인사처장인 허삼수가 참모총장 연행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12.12 군사반란 이후 우국일 참모장과 다르게 보안사령부 내에서 참모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전두환에 이어 보안사령관이 된 노태우와 참모장인 남웅종은 경북고등학교 32회 동기입니다. 그런 탓인지 그는 1981년 예편 후 바로 한국방송광고공사 감사(1981-1988)를 맡게됩니다. 동창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에는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1988-1993)으로 까지 승진하여 부와 명예를 누렸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534호에 안장된 남웅종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534호에 안장된 남웅종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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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화국과 노태우 정부 시절 부귀영화를 누렸던 그는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직에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12.12 군사반란 기소 대상이 아니었기에 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019년 12월 29일 사망한 그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534호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이차군 군수처장

육사 17기 출신으로 12.12 군사반란 당시 보안사령부 군수처장을 맡고 있던 이차군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진 바가 많지 않습니다. 반란 이후 여러 보직을 거치며, 3군사령부 군수처장을 끝으로 예편합니다. 이후 ㈜한성 이사를 역임하는 등 기업 활동을 해왔고, 14대, 15대 총선에 출마하고자 하였으나 공천받지 못하거나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했습니다. 2003년 9월 23일 사망, 장군1묘역 191호에 안장됐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191호에 안장된 이차군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191호에 안장된 이차군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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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생존해있는 허화평과 허삼수는 어디로?

12.12 군사반란 당시 보안사령부 소속 반란군으로 <서울의 봄>에 등장한 인물은 허삼수(극중 하창수, 배우 홍서준) 인사처장, 허화평(극중 문일평, 배우 박훈) 비서실장, 이학봉(극중 임학주, 배우 이재윤) 대공수사과장이 있습니다. 이들은 반란 이후 5공화국 동안 막강한 실세였습니다. 이후에도 재단 이사장,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며 권력을 계속 누리고 살아왔습니다.

이들 셋은 결국 1996년 12.12 군사반란 관련 재판에서 모두 징역형을 받고, 현충원에 안장 자격이 박탈되됐니다. 2014년 5월 24일에 사망한 이학봉은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하고 서울추모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생존해 있는 허화평과 허삼수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5공화국 당시 장세동에 이어 대통령경호실장을 맡았던 안현태는 5공 비자금 조성 문제로 구속됐 안장 자격이 박탈됐으나, 사면 복권되면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전두환, 노태우 사망 당시 현충원 안장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국민 여론상 전두환, 노태우는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하였지만, 노태우는 2021년 10월 파주 동화경모공원에 안장된 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인 2022년 5월 4일 국가보존묘지로 지정됐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의 대통령 묘역 넓이인 80평의 7배 정도 되는 약 550평의 묘지 부지가 노태우만을 위해 사용되고 관리되고 있습니다. 기존의 반란군들을 현충원에서 이장시킬 국립묘지법 개정은 진행되지 않고, 오히려 반란수괴의 묘를 국가가 보존해준다는 현실이 씁쓸하기만 합니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 軍 어제와 오늘 19화, 1993년 06월 15일
-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국 국가폭력 고문피해 실태조사(2차)>, 2021
- 서울고등법원 1996년 12월 16일 선고 96노1892 판결
- 대법원 1997년 4월 17일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 보안사령부, <제5공화국 전사> 3권, 1982

태그:#1212, #서울의봄, #군사반란, #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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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기획홍보팀장, 유튜브 대전통 제작자, 前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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