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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서 딴 늙은 호박이 거실 탁자 위에 놓여 있다.
 텃밭에서 딴 늙은 호박이 거실 탁자 위에 놓여 있다.
ⓒ 곽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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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오늘 날씨도 추운데 호박죽이나 끓여 먹을까요."

며칠 전 아내가 호박죽을 만들어 먹자는 이야기를 해 내 눈이 번쩍 뜨였다. 머릿속에서 잠자고 있던 걸쭉한 단맛의 기억이 일시에 되살아났다. 거실 한쪽 탁자 위에는 텃밭에서 작년에 수확한 늙은 호박 세 덩이가 장식용 소품처럼 놓여 있었다.

시골 정취를 풍기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누런 호박이 드디어 자신만의 풍미를 뽐낼 시간이 온 것이다. 잘 익은 한 덩이를 부엌으로 가져가서 2등분으로 해체하니, 특유의 은은하고 상큼한 냄새가 코로 스며들고 연붉은 속살과 씨앗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박죽을 함께 만들어 먹다 
 
껍질을 벗긴 호박 조각과 삶아 놓은 팥을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꺼낸 것이다.
 껍질을 벗긴 호박 조각과 삶아 놓은 팥을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꺼낸 것이다.
ⓒ 곽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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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살과 씨앗을 긁어내고 반으로 자른 호박을 다시 여러 조각으로 잘라서 단단한 껍질을 부엌칼로 벗겨냈다. 내가 기본적인 작업을 끝내니 손이 빠르고 야무진 아내가 능숙한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먼저 팥을 삶아내고, 찜통에 호박 조각들을 넣어 물을 붓고 삶아서 흐물흐물해지면 약한 불로 달이면서 긴 주걱으로 저어서 으깬다. 그런 다음 찹쌀가루를 넣어서 주걱으로 저어주다가 삶은 팥과 설탕을 넣고 소금을 첨가하여 간을 맞춘다. 이후에는 중간 불에서 긴 주걱으로 계속 저어 기포가 생기면서 뽀글뽀글 끓게 되면 감미로운 호박죽이 완성된다. 호박죽을 함께 만들면서 과정을 지켜보니 호박죽 한 그릇에도 아내의 많은 정성과 수고로움이 담겨 있음을 새삼 느낀다. 

이렇게 아내와 같이 호박죽을 만들고, 손수 만든 호박죽을 먹는 즐거움까지 함께하니 이런 게 일상의 소박한 행복이 아닌가 싶다. 우리만 먹기에는 양이 많아 인사하고 지내는 이웃 어르신 부부와 혼자 사시는 할머니께 가져다 드리니 고맙다는 말씀을 몇 번이나 하신다.

호박죽 한 그릇으로 이웃 어르신들과도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어서 마음이 훈훈해진다. 매년 우리 텃밭의 늙은 호박 몇 덩이는 가을철에 수확하면 거실에서 장식용 소품으로 자리하다가, 겨울에 호박죽으로 변신하여 우리에게 달콤한 행복을 안기고는 최후를 맞는다.

그런데 예로부터 호박을 못난이의 대명사쯤으로 여기는 말들이 있다. '호박같이 못 생겼다.' '호박꽃도 꽃이냐?'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나.'와 같은 말들이 대표적이다.

호박의 겉모양이 제각각으로 울퉁불퉁하고 매끄럽지 못하다고 이런 말들이 생긴 듯하나, 이는 호박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가볍게 하는 소리다. 호박이라는 작물을 한 번이라도 키워 본 사람이라면 호박이 버릴 것 없이 얼마나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 주고, 높은 영양가를 가졌는지 잘 알 것이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호박 

나는 해마다 텃밭의 한쪽 모퉁이에 호박 3~5주를 심어서 가꾼다. 호박은 구덩이를 깊게 파고 밑거름을 충분히 넣어서 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심어 놓으면 이후에는 밭 가장자리에 유도하는 방향으로 쭉쭉 뻗어나가면서 잘 자란다.

노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매달기 시작하면 일단 부드러운 호박잎은 따서 요리하여 쌈을 싸 먹거나 국을 끓여 먹는다. 어린 호박들은 열리는 대로 호박전이나 호박볶음, 호박국, 호박 된장찌개로 변해 사람들 입맛을 돋운다. 봄부터 가을까지 우리 집 밥상에는 호박이 떠나질 않는다. 잘 익은 늙은 호박 몇 덩이는 겨울철에 호박죽 별미로 즐거움까지 주니, 사계절 내내 우리 집 밥상에 친숙한 작물이다. 

어릴 적에 아버지도 밭 한쪽 귀퉁이에 호박씨를 몇 개씩 묻어놓고는 했다. 그러면 호박 덩굴이 밭 주변 돌담이나 돌무더기를 뒤덮으며 부지런히 열매를 맺어 어려운 시절에 요긴한 식량이 되었다. 어머니는 설 명절마다 호박 시루떡을 맛있게 만들어 주셨다. 호박떡은 가마솥에 떡시루를 앉혀놓고 김이 새지 않도록 가마솥 테두리에 밀가루를 반죽하여 둘러 붙이고, 불을 지펴서 찌는 과정을 거친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데도 어머니는 호박 시루떡을 도회지 나간 자식들이 고향 찾아오면 설날에 먹을 거라며 정성 들여 만드셨다. 먹을 것 없던 겨울철에 헛간에 쌓아둔 늙은 호박들은 사람은 물론 농촌의 일꾼 소에게도 여물과 함께 삶아 먹이는 보양식이었다.
 
아내와 끓인 호박죽을 다 먹고 마지막 한 그릇이 조금 남았다.
 아내와 끓인 호박죽을 다 먹고 마지막 한 그릇이 조금 남았다.
ⓒ 곽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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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양이 못났다고 '호박처럼 생겼네' 하면, 이건 듣는 호박이나 사람이나 섭섭할 말이다. 식물이든 사람이든 겉모습과 달리 얼마든지 소중한 가치를 지닌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호박은 이미 그만의 존재 가치를 세상에 널리 알려왔다.

사람도 외모가 남보다 좀 떨어지더라도 속마음은 따뜻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 많다.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고 비하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호박이 열매부터 잎까지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뜻으로, 호박의 진가를 잘 드러내 주는 속담도 있다.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 들어온다."


이 속담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행운이 찾아올 때 쓰는 말이다. 호박에다 넝쿨까지 들어오니, 복을 몰고 온다는 말도 된다. 올해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서 들어오는 행운이 가득한 한 해가 되길 소망해 본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실릴 수도 있습니다.


태그:#호박, #늙은호박, #호박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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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삶과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가끔 글로 표현합니다. 작은 관심과 배려가 살맛나는 따뜻한 세상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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