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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사극을 보며 품었던 활쏘기에 대한 로망을 30대가 되어 이뤘습니다. 대학원생으로 살면서 활쏘기를 통해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활쏘기의 매력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활을 배우며 얻은 소중한 경험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기자말]
"젊은 사람이 왜 이리 힘을 못써?"

처음 활을 배울 당시의 일화다. 상체 근력이 부족해 활을 제대로 당기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본 사범님이 핀잔을 주었다. 건장한 20대 남자 대학생이 약한 장력의 활 하나 이기지 못하는 모습이 적잖이 한심했던 모양이다.

돌이켜보면 활쏘기를 배우면서 가장 힘들었고 또 가장 자괴감을 많이 느낀 시간이었다고 생각된다. 주몽이나 이성계처럼 백발백중의 신궁이 되보겠다는 당찬 포부를 안고 국궁교실에 등록했는데, 현실은 그야말로 시궁창이었다. 잘 쏘고 못 쏘고를 떠나서, 아예 활을 당길 힘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초심자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순간
 
황학정 국궁교실 5기 수강생으로 활을 배우던 당시의 모습 (2013.6.4)
 황학정 국궁교실 5기 수강생으로 활을 배우던 당시의 모습 (2013.6.4)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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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큼은 아닐지라도, 아마 활쏘기에 입문한 이들이 가장 힘들고 지루해하는 때가 바로 이때가 아닐까 싶다. 활을 당기기 위한 근력(궁력)을 기르는 기간 말이다.

초보자들은 활터에 등록하게 되면 짧게는 1개월에서 길게는 3개월 이상 교육을 받게 된다. 이 기간에는 활터 예절부터 시작해 보법(발 제대로 딛는 법), 활을 들어 당기는 법, 호흡법 등의 자세를 익힌다.

핵심은 안정적인 자세로 활을 당길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기르는 것이다. 초보자들은 화살을 메기지 않은 빈 활을 반복적으로 당기는 연습을 통해 차츰차츰 힘을 길러가는데, 가장 낮은 파운드의 활로 시작하여 점차 과녁으로 보낼 수 있는 세기의 활로 강도를 높여간다. 그러다 바르고 안정적인 자세로 높은 파운드의 활을 당길 수 있게 되면 비로소 사대(활을 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학교 연구실에서 틈틈이 고무줄을 당기며 궁력을 기르는 기자의 모습
 학교 연구실에서 틈틈이 고무줄을 당기며 궁력을 기르는 기자의 모습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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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은 활 하나 당기는 게 뭐 그리 힘드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대에서 과녁까지의 거리를 생각해보면, 금세 수긍이 갈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활터의 규정 사거리는 145m이다. 이는 조선시대 무과시험 당시 120보 거리에서 각궁(角弓: 나무, 힘줄, 쇠뿔 등 전혀 다른 성질의 재료들을 결합해 만든 우리나라의 전통 활)으로 유엽전(촉의 모양이 버들잎처럼 뾰족하고 날카로운 화살)을 쏜 데서 비롯한 것으로, 이를 미터로 환산하면 150m에 가까운 거리가 되는데, 1960년대 무렵 지금의 거리로 정착됐다 한다.

양궁 사거리가 70m인 데 비하면 무려 두 배가 넘는 거리다. 145m 너머의 과녁으로 화살을 보내려면 그만큼 장력이 센 활을 당길 수 있어야 하는데, 초보자에게 그런 힘이 있을 리가 없다. 따라서 활을 충분히 당길 수 있는 힘을 기르려면 통상 1~3개월은 걸린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활쏘기에 갓 입문한 초보자들 중 중도 포기하는 이들은 대개 이 과정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수학여행 가서 아주 약한 활로 국궁체험 하던 기억만 생각하고 도전했다가,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힘드니 싫증이 나는 것이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되는데

그렇기에 활터에서는 처음 사대에 선 이들을 격려해 주는 문화가 있다. 교육을 마치고 비로소 사대에 설 자격이 주어진 신사(초보 궁사)들은 '집궁례'라고 하여 모든 사원들이 보는 앞에서 첫 순 5발을 내게 되는데, 그 결과 화살을 과녁에 맞혔든 못 맞혔든 박수가 쏟아진다. 지루하고 힘든 시간을 극복하고 마침내 사대에 선 초심자들에게 보내는 축하의 박수인 셈이다.

부끄럽지만 활을 처음 배우던 10년 전의 나는 이 과정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타고난 근력이 부족했던 탓에, 같이 시작한 동기들과 비교했을 때도 좀처럼 궁력이 늘지 않아 더 위축되고 자괴감을 느낀 나머지 활 배울 의지를 잃고 만 것이다. 결국 기초 교육 이수 후 이어지는 심화 교육을 포기한 채, 오랜 세월 활을 내려놓게 됐다. 

그러다 약 2년 전인 2021년 12월, 서울의 한 실내국궁장에서 열리는 활쏘기 수업에 등록했다. 활을 내려놓은 지 근 10년 만의 재도전이었다. 오랜 시간 활을 잡지 않아 떨어진 궁력을 기르기 위해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여전히 지루하고 힘든 과정이었지만 뒤늦게 다시 시작한 만큼 '이제는 포기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며 수련에 매진했다. 

그리고 2022년 3월 20일. 처음으로 과녁에 화살을 맞혔다. 다시 활쏘기를 배우기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이룬 결실이었다. 이때의 희열을 잊을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5발의 화살을 내리 과녁에 관중시키는 몰기를 처음 했을 때보다도, 이때의 감격이 더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쏜 화살이 저 멀리 과녁에 맞았을 때의 전율이란(관련 기사 : 활쏘기가 가르쳐 준 역설... 취업도 이렇게 해보려 합니다 https://omn.kr/26z2y).
 
2022년 3월 20일. 처음 과녁에 관중한 날 (남양주 천마정)
 2022년 3월 20일. 처음 과녁에 관중한 날 (남양주 천마정)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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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 끝에 찾아온 열매는 그토록 달콤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의지가 약했던 10년 전의 나 자신에게 아쉬움이 크다. 느리더라도 꾸준히만 했더라면, 조금 버티기만 했더라도 활쏘기의 재미를 10년은 일찍 맛보았을 텐데. 

아무튼 나는 느리더라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결실을 맺는 날이 온다는 것을, 그 결실은 인내가 쓴 만큼 더욱 달콤할 것이라는 확신을, 활쏘기를 통해 얻었다. 

어디 활쏘기만 그러할까. 다른 운동도 그렇거니와 공부건, 직장일이건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는 법이다. 백발백중 신궁이었다던 태조 이성계도 설마 처음부터 신궁이었으랴. 그에게도 열심히 빈 활을 당겨가며 힘을 기르는 인고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긴 수련 끝에 마침내 불세출의 명궁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포기하지만 않고 견디면 언젠가 반드시 결실을 맺게 돼 있다는, 활쏘기를 통해 얻은 믿음. 그 믿음을, 나는 이제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도 한 번 적용해보려 한다.

태그:#활, #활쏘기, #국궁, #공항정, #황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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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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