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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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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으리라는 다소 극단적 결심을 한 건 어느 다이어트 유튜버의 강의를 들은 뒤였다. 잠이 다이어트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이전까지는 전혀 몰랐다.

살을 빼려면 잠을 잘 자야 하고 커피를 끊어보라기에 그러기로 결심했다. 사실 살을 빼기 위해 끊어야 할 것은 차고 넘쳤지만 굳이 커피 끊기를 전면에 내세운 건 그나마 쉬워 보였기 때문이다. 과자나 떡볶이나 라면을 끊는 일과 비교하자면 훨씬 실현 가능성이 있었다.

커피를 끊는다는 표현은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끊어야 할 만큼 중독되었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실상 커피란 내게 있어 기호식품이라기보다는 카페에 지불하는 공간 사용료 명목이었고 졸릴 때 잠을 쫓는 상비약에 불과했다.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이었고 일부러 찾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일단 눈에 띄거나 누군가 마시길 권하면 거부하지 않았다. 커피는 도처에 널려 있었다. 아침이면 식구 중 누군가는 어김없이 커피를 내렸고 직장 탕비실에도 커피는 항상 구비되어 있었다.

사람을 만나는 약속 장소도 항상 카페였다.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찾아 마시지 않는 건 사실이었으나 실상 커피를 자주 마실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 하지만 커피의 카페인이 수면에 영향을 주어 종래에는 살을 찌게 만든다는 소리를 들으니,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것을 그만 먹는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일은 없어 보였다.

무심결에 먹던 커피를 단칼에 안 먹기 시작했다. 카페에 가더라도 카페인 없는 허브티를 주문해 마셨고 집이나 직장에서도 커피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커피 없는 일상이 문제되지 않으리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나는 정말 온종일 졸렸다. 도대체 이게 뭔 일인가 싶을 정도로 수시로 졸음이 쏟아졌다. 끊임없이 하품을 하느라 턱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전날 조금이라도 늦게 잤다면 다음날은 종일 졸렸다.

운동을 격렬하게 한 뒤에도 졸렸다. 직장에서의 업무가 평소보다 바빠도 졸렸고 글쓰기로 집중력을 고도로 사용한 이후에도 졸렸다. 생리를 앞두거나 호르몬에 조금이라도 변동이 있으면 졸렸다. 과식을 하거나 특정 음식물을 섭취해도 졸렸다.

이쯤 되면 나란 인간이 얼마나 허약하고 부실한지 실체를 제대로 알게 된다. 그렇다. 나는 정말로 약해빠진 인간이었다. 나는 수많은 이유로, 하다못해 아주 사소한 일(이라고 여겼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에도 쉽게 피곤을 느꼈다.

그동안은 어떻게 졸리지 않은 채로 하루를 버텼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카페인의 위력은 그토록 강력했다. 시도때도 없이 졸린 상태에 놓이다 보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커피 한 잔이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굳이 이렇게까지 참아야 하나 의문이 자꾸만 고개를 쳐들었다.

본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커피를 마시지 않는 상황이 아니라 피곤을 느끼는 신체반응이었다. 그 상태에 놓이는 게 몹시도 낯설었고 정상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부정한다고 해서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피곤함은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로써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피곤하지 않으려면 원인을 찾아 없애야 했다.

커피는 치료약도, 근본적인 해결책도 아니었다. 잠깐 동안 감각을 마비시키고 정신을 각성시켜 몸을 속일 뿐이다. 커피를 계속해서 마신다면 몸 상태를 정확히 인지하기란 불가능했다. 피곤의 정도나 휴식의 필요성도 가늠할 수 없었다. 과로한 상황에 끊임없이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태가 하루이틀도 아닌 몇 년에 걸쳐 지속된다면 심각한 질병에 걸리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할 노릇이었다.

몸은 피곤을 느낄 권리가 있었다. 그것은 몸이 보내는 일종의 경고성 신호였다. 제거하려고 급급하기보다 고마워해야 할 신체 반응이었다. 이 신호를 제대로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해야 할 일은 카페인을 때려 부어 이미 고갈된 에너지를 억지로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 몸이 필요로 하는 휴식을 취하거나 정신적, 신체적으로 탈진하게 만드는 외부 요소로부터 떨어지는 것이었다.

물론 다소 이상적인 이야기다. 쉬고 싶을 때 쉬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는 자유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신기루같은 소리다. 그럴지라도 적어도 스스로는 알고 있어야 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인지는 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한 최소의 방법이나마 강구할 수 있게 된다.

졸리는 상황에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몸의 반응에 집중하면서 피로감을 줄이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일단 스스로에 대해 잘 알아야 했다. 감당할 수 있는 스트레스 범위는 어느 정도인가? 잠은 최소 몇 시간을 자야 다음날 활동에 지장이 없는가? 내게 맞는 적당한 운동의 강도와 횟수는? 생리를 알리는 전조 증상은 무엇인가? 탄수화물과 가공식품 섭취는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가? 어떻게 휴식할 것인가? 낮잠인가, 멍때리기인가, 수다떨기인가?

수없이 자잘한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아나갔다. 그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 것은 나의 취약점과 결함이었다. 수준이 너무 형편없어 실망스럽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감 없이 아는 건 중요했다. 그래야 커피에 기대지 않은 온전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지치지 않는 선에서 전략을 짜고 해야 할 일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 과정 속 새삼스레 깨달은 건 스스로를 보살피는 행위가 기분을 좋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내면에 고착되어 있던 자신을 향한 다소 부정적인 시각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대단히 하찮고 약해빠졌지만 동시에 강하고 단단했으며 주체적이었다. 자신을 돌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온전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었다.

커피를 끊어보길 바란다. 카페인 없이 세상의 풍파를 오롯이 버텨보길.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면 얼마나 많은 품이 드는지를 직접 체험해 보기 바란다. 자신의 약점과 결핍을 실감해 보기 바란다. 그런 나를 잘 보살펴 보기를 바란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래보기를. 그래서 무엇을 알게 되냐고? 나를 알게 된다. 그것이 곧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임을 알게 된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제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에세이, #카페인중독,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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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살고 있습니다. 브런치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마주하는 것들의 소중함에 대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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