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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세 번 영어수업을 듣는 중이다(내 영어 이름은 글로리아Gloria이다). 스스로 어떤 성격을 지녔다고 생각하는지 말해줄 수 있냐고 필리핀 원어민 선생님이 묻는다. 수 년 전 클린튼이라는 원어민 선생님이 'Gloria never stops(글로리아는 멈추지 않는다)' 라고 했던 말을 들려줬다.

이번에도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나에 대한 그녀의 의견을 덧붙인다. 'Gloria has a goal. She's passionate and achieves it(글로리아는 목표가 있다, 열정적이고 그 목표를 성취한다)'라고. 아, 내가 그동안 하루를 어떻게 보냈냐고 물었을 때 답했던 여러 가지가 그녀에게는 목적을 지니고 열정적으로 이뤄나가는 사람처럼 보였나 보다.

최근 책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황보름 작가)>을 읽는 중, 주인공 영주가 작가 승우와 동태찜을 먹으면서 하는 말이 그녀가 덧붙인 나의 성격을 떠올리게 했다. 여기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과 행복감'을 구별하라고 했단다. 행복은 '전 생애에 걸친 성취'가 있을 때 찾아오는 것으로 평생에 걸쳐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와 달리 행복감은 기분과 같아서 오늘은 행복했다가 내일은 그렇지 않다가를 반복하는 거라고. 영주는 과거 전 일생에 걸친 성취를 위해 노력했지만, 그가 말하는 행복이 결국 마지막 순간을 위해서 긴 인생을 저당 잡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느꼈으며 그 뒤로 이제는 행복보다 행복감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일주일에 30분씩 세 번 만나는 머나먼 나라의 선생님이 나의 성격이 이렇다고 얘기하니, 아마도 난 그런 척을 했거나 아니면 정말 그렇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다.
 
커피 한 잔을 두고 읽는 원서가 내게 행복감을 준다.
 커피 한 잔을 두고 읽는 원서가 내게 행복감을 준다.
ⓒ 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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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성격인가? 목표를 정한 뒤 멈추지 않고 노력하는 성품을 지니게 된 출발은 어디서 온 걸까? 그렇게 사는 일이 왜 행복할까? 전 생애에 걸쳐 노력할 위대한 성취란 것은 모르겠지만 새벽에 눈을 뜨면 오늘 하루를 차곡차곡 잘 보내고 싶다는 생각에 배드민턴 가방을 매고 운동을 나간다.

서둘러서 아침 식사를 한 뒤, 남편이 내려 준 커피 한 잔을 들고 책을 읽거나, 빨간 머리 앤 원서를 강독하거나 글을 쓴다. 마음에 가시처럼 따끔거리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연말정산을 위해서는 인증서가 필요한데 기한이 지나갔을까도 걱정이고, 엄마와의 병원 동행, 실손보험 서류 준비, 이런저런 자잘한 일들로 골치가 띵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의 일을 하나씩 해나가며 사이사이 행복을 느낀다.

오늘은 <빨간 머리 앤> 원서에서, 앤이 자수정 브로치를 갖고 갔다고 확신하는 마릴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앤이 자신의 잘못을 거짓 고백하고는 비참해하는 장면을 읽었다. 마릴라가 저녁을 먹으라고 하자 삶은 돼지고기와 푸성귀는 이런 비참한 때에 낭만적이지 않은 음식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읽으며 웃음이 터졌다. 그렇지 않은가? 소풍을 못가게 되어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앤에게 푸짐한 수육을 먹으라니! 이걸 읽는 순간만큼은 자잘한 생활의 걱정거리가 모두 사라지고 행복감이 밀려든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행복과 행복감의 차이를 잘 모르지만, 그리고 내가 전 생애를 걸쳐 성취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도 알지는 못하지만, 오늘 하루 이 순간은 행복하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 그것이 중요하다.

태그:#빨간머리앤, #황보름, #어서오세요휴남동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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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손을 잡고 배낭여행을 다니는 뚜벅이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책과 여행을 사랑하는 아이들로 자라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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