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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사극을 보며 품었던 활쏘기에 대한 로망을 30대가 되어 이뤘습니다. 대학원생으로 살면서 활쏘기를 통해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활쏘기의 매력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활을 배우며 얻은 소중한 경험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기자말]
홍콩무협영화 마니아였던 나는 10대 시절부터 중국 쿵후에 심취해 서른이 될 때까지 다양한 중국무술을 연마했다. 그중에서도 형의권(形意拳)이라는 권법을 꽤 오랜 시간 수련했다.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형의권을 가르쳐주는 사부님께서는 늘 이렇게 강조하셨다. 여기서 깨어있으라는 것은 홀로 투로(동작)를 연습할 때나, 상대방과의 대련에 임했을 때나 '제대로 된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상대방의 빈틈을 어떻게 파고들어갈 것인지', '상대방의 공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등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를 다른 말로 '관조'라고도 표현하셨다.

관조가 요구되는 활쏘기

관조(觀照).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 단어에 대해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관조라는 것은 나 자신을 차분하게 돌아볼 수 있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정신이 분명하게 깨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문득 형의권 사부님의 가르침이 떠오른 것은 활쏘기야말로 특히 관조가 요구되는 운동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자세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화살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간다. 표(조준점)가 단 1cm만 옮겨져도 화살의 방향과 거리가 크게 달라진다.

더군다나 상대방과의 대련으로 승부를 겨루는 다른 무술들과는 달리 활쏘기는 철저하게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과녁은 항상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을 뿐이다. 결국 맞추고 못 맞추고는 내게 달린 문제인 것이다.
 
과녁은 늘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서울 공항정 / 2022년 6월 14일 촬영)
 과녁은 늘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서울 공항정 / 2022년 6월 14일 촬영)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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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나는 속사(빠르게 쏘기)를 하는 버릇이 있었다. 활을 오래 들고 있어 봐야 팔만 아픈데 왜 굳이 질질 끄는지 의문이었다. 처음부터 제대로 겨냥해서 한 번에 맞추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속사를 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내가 생각 없이 쏘고 있음을 깨달았다(어쩌면 그것이 오랜 시간 몰기를 하지 못한 원인이리라).

이러한 속사병을 고쳐나가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활터의 어른들께 들쭉날쭉한 시수(관중 횟수)에 대해 고민을 토로하자 "생각 없이 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아뿔싸. 사부님께서 늘 강조하시던 가르침을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후로 활을 들어 당긴 뒤 바람은 어디로 불고 있는지, 나는 지금 어디를 겨냥하고 있는지, 줌손(활을 잡은 손)과 깍짓손(활시위를 당기는 손)은 정확하게 틀어쥐고 있는지, 화살은 얼마나 당겼는지 등등을 관조하다 보니 자연스레 활을 잡고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어김없이 화살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물론 활을 당기고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하여 그것이 곧 과녁에 명중하는 '관중'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나의 판단이 늘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이는 나아가 내 자세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옳으면 옳은 대로, 그르면 그른 대로 내가 내린 판단은 그 다음 화살을 위한 이정표가 되는 것이다.

온전히 나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는 시간 

무엇보다 활을 당기고 있는 3초 내지는 5초 정도의 시간은 짧은 '명상'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때만큼은 온갖 잡생각이 사라지고 오로지 내 자세와 호흡 그리고 과녁만이 보인다. 하루에 주어지는 24시간 중 나 자신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던가. 그래서 활을 쏘는 순간만큼은 잠시나마 일상의 근심을 잊고 스스로를 온전히 돌아보곤 한다.

쏘고 난 직후의 행동도 중요하다. 자세와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으며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를 '잔신'이라고 하는데, 자세를 정리하며 맞추면 맞춘 대로 못 맞추면 못 맞춘 대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이다. 그래야만 다음 화살을 어디로 겨냥해 어떻게 쏠지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이것이 활을 쏘는 활터마다 '반구저기'(反求諸己: 잘못을 스스로에게서 찾는다) 넉 자가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는 까닭이다.
 
한산도 제승당 활터에서 (2023년 8월 15일 촬영)
 한산도 제승당 활터에서 (2023년 8월 15일 촬영)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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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 검사를 하면 늘 내향적이고 생각이 많다는 INFP가 나오는 나이지만, 동시에 '욱'하는 기질의 소유자인 탓에 순간의 감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칠 때가 많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시간이 흐른 뒤 돌아오는 건 후회와 자책뿐이다. 

그러나 활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특히 관조를 요하는 활쏘기를 통해 어떤 상황에서든 나와 내가 처한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차분하게 돌아봐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물론 타고난 기질과 서른 해 넘도록 살면서 가꿔온 성격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겠는가.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늘 다짐하지만, 여전히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 때가 많다. 

그러나 오늘도 나는 활쏘기가 가르쳐준 관조의 자세를,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도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한 발 한 발 점점 시수가 올라가는 활쏘기처럼, 나 역시도 하루하루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중요치 않다. 이미 날아가버린 화살에는 미련을 두지 않고 마음을 고쳐먹은 뒤 다음 화살을 준비하는 것처럼, 지난 과거는 잊고 앞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면 되는 것 아닐까. 

태그:#활, #국궁, #활쏘기, #공항정, #호무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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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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