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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기자말]
흑산도에서 종선(從船)으로 20분 정도 걸리는 곳에 대둔도 영산도 장도 다물도가 모여 있다. 대둔도는 외지에서 오는 방문객이 드문 섬이다. 최근에야 이 섬의 역사 인물 두 사람이 새롭게 조명을 받으면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신안군은 김이수(金理守·1743~1805)와 장덕순(張德順)의 생가를 복원하고 주변을 공원화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대둔도는 오정리 도목리 수리 등 마을이 세 개나 있고 인근 섬들보다 인구가 많다. 김이수의 생가는 수리에, 장덕순의 생가와 묘소는 오정리에 있다.

민권운동가 김이수의 고향 대둔도

대둔도 주민 김이수는 한양 도성에 올라가 흑산도에 부과되는 과도한 세금을 시정하고 금의환향(錦衣還鄕)한 민권운동의 선구자다. 백성들이 벼슬아치와 아전이라면 지은 죄도 없이 벌벌 떨던 조선시대에 흑산도의 수군진과 나주 관아에 진정을 했으나 통하지 않자 그는 섬 주민 두 명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갔다. 정조대왕이 대궐 밖으로 행차했을 때 행렬에 뛰어들어 징을 울리고 왕에게 부당한 세금을 철폐해달라고 호소했다. 백성이 최고 통치권자에게 북이나 징을 쳐서 직접 청원을 하는 격쟁(擊錚)은, 선정을 베풀던 정조 연간에 활발했다.

흑산도 주민의 격쟁이 조정의 관심사로 대두하자 남인의 영수인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狀啓)를 받고 정조에게 보고했다. 이 기록이 조선왕조실록(1791년 5월 22일)과 승정원일기에 상세하게 남아 있다.
  
김이수 묘소 앞에 선 6대손 김윤인 씨.
 김이수 묘소 앞에 선 6대손 김윤인 씨.
ⓒ 이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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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는 섬에서 나는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어 세금으로 훈련도감에 바쳤는데 땅이 척박해지면서 닥나무가 잘 자라지 않았다. 그마저도 숲이 없어져 바람을 막아주지 못해 닥나무 껍질이 얇고 병들어 대부분 온전하지 못해 종이를 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데도 닥나무 세금은 때가 돌아오면 장정과 노약자를 가리지 않고 남자에게 모두 인두세(人頭稅)로 부과됐다. 8~10세는 4전, 11~14세는 6전, 15~17세는 8전, 20~40세는 1량 6전으로 계산해 닥나무 껍질 12,955근, 돈으로 580냥을 징수했다. 흑산도 사람들은 이 돈으로 다른 지방에서 종이를 사다 세금으로 바쳤으니 억울하고 부당한 일이었다.

과중한 세금을 견디다 못해 흑산도를 떠나는 사람이 늘어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의 세금이 점점 무거워졌다. 당시 나주목에서 '흑산도의 닥나무 세금은 마치 거북이 등에서 털을 깎아 오라는 것과 같다'는 보고서를 올렸지만 폐단은 시정되지 않았다.

정조대왕 행렬 뛰어 들어 징 울린 이유 
 
조선시대 민권운동가 김이수의 생가가 있는 대둔도 수리마을 전경.
 조선시대 민권운동가 김이수의 생가가 있는 대둔도 수리마을 전경.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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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외딴 섬에서 배를 타고 뭍으로 나와 나주목(牧) 관아, 전라관찰사가 있는 전주 감영을 거쳐 한양 훈련도감에 이르는 길은 멀고 멀었다. 김이수는 천 리 길을 걸어 한양으로 올라와 정조 행차에 대고 징을 울렸다. 지이이잉 징이이잉∼.

김이수의 이 격쟁을 처리하기 위해 정조의 실세 측근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나서자 한양에서 전라도를 오가는 파발마들이 흙먼지를 날리며 뛰었다. 흑산도를 관할하는 나주목사(牧使) 이우규(李羽逵)가 현지 조사를 한 보고서룰 전주감영으로 올렸다. 이 보고서를 토대로 전라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장계를 작성해 채제공에게 보냈다. 파말마들은 뛰고 또 뛰었다.

채제공은 어전회의에서 "절해고도(絶海孤島) 주민들이 호소할 곳이 없어 폐단이 한양에 올라와 징을 울렸는데, 탁지부가 대신해서 종이값 300냥을 훈련도감에 매년 지급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라고 건의했다. 정조는 "그대로 시행하라"고 말해 김이수는 흑산도에 큰 선물을 갖고 돌아올 수 있었다.
 
김이수 생가는 오래도록 빈집으로 남아 을씨년스런 폐가가 됐다. 집 뒤로는
동백나무 숲이 울창하다.
 김이수 생가는 오래도록 빈집으로 남아 을씨년스런 폐가가 됐다. 집 뒤로는 동백나무 숲이 울창하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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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에서는 닥나무 세와 함께 콩에 부과하던 콩 세도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이것도 김이수가 나서 해결했다. 흑산도에는 본래 논이 없고 산비탈에 자갈밭만 있었다. 그것도 지맥(地脈)이 점점 쇠하여 해마다 소출이 줄었다.

주민들은 피와 보리를 추수한 뒤에 그 땅에 이모작으로 콩과 팥 등 잡곡을 심어 생활에 보탰다. 처음 몇 해는 피와 보리만 세금을 내고 콩은 제외됐다. 어느 해 흑산진(鎭)에 사나운 별장(別將)이 부임하면서 섬사람들을 위협해 콩에도 세금을 부과했다. 피와 보리는 원래 세금을 내던 것이지만 보리밭 둔덕이나 고랑에 심는 콩에도 세금을 거두면서 1년에 세금을 두 번 내는 이중과세(二重課稅)가 자행됐다.

별장은 조선시대 산성, 포구, 작은 섬 등의 수비를 맡은 종9품의 무관. 관리 위계로 보면 미관말직(微官末職)이었지만 섬에서는 가장 높은 벼슬이었다. 그가 세금 징수와 노역까지 부과하니 섬사람들에게는 두려운 권력이었다. 김이수가 나주 관아에 콩세에 관련한 진정을 했지만 흑산도 수군진 별장이 나주와 전주를 다니며 거짓으로 꾸며대는 바람에 콩세 폐지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김이수가 바다와 육지를 건너다니며 3년이나 공을 들이니, 나주 관아도 불쌍한 섬 백성들의 사정을 전주감영에 그대로 보고했다. 전주감영은 "천여 냥이나 받던 것을 하루 아침에 없앨 수 없으니 목화(木化)세라는 이름으로 150냥을 매년 10월까지 납부하라"고 세금을 대폭 감경하는 조치를 취했다. 목화세는 그 뒤 수년간 시행되다가 최도형 별장 때에 이르러 김이수의 설득으로 폐지됐다.
  
대둔도 오정리 앞 바다의 새벽. 부지런한 어부들이 가두리 양식장에 나와
작업을 하고 있다.
 대둔도 오정리 앞 바다의 새벽. 부지런한 어부들이 가두리 양식장에 나와 작업을 하고 있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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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부임한 별장들은 똑똑한 김이수를 미워했으나 어쩌지 못하고 흰자위로 흘겨보기만 했다. 어느 해 한상항이라는 별장이 가을에 시찰을 다니다가 김이수가 사는 동네를 지나게 되었다. 그는 콩이 잘 자란 밭을 보고 "누구의 밭이냐"고 물었다. 한 주민이 "김이수"라고 대답하자 별장은 가마에서 내려 밭을 한번 둘러보고 나서 콩을 발로 차고 밟고 하는 액션을 취했다. 보는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후손들은 김이수 행장기(行狀記)에서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언변이 뛰어나고 이치에 밝았다고 적었다. 무엇보다도 일 처리에 대쪽 같은 자세로 임하는 정의감이 돋보였다.

수리에 있는 김이수의 생가 뒤에 동백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집 앞으로는 조릿대로 울타리를 둘러놓았다. 김이수가 생전에 조경에 신경을 쓴 흔적이다. 신안군은 조선시대 민권운동의 선구자인 김이수 생가를 공원으로 만들 계획이다.

닥나무 세금을 없앤 김이수가 세상을 뜨자 흑산도민장으로 장례를 성대하게 치렀다. 김이수의 묘소는 대둔도가 아니라 흑산도 풍수 좋은 곳에 꼭두장을 했다. 꼭두장은 남의 선산 위쪽에 묘를 쓰는 것으로 금기(禁忌)에 해당한다. 그러나 다른 성씨의 선산 사람들이 김이수를 존경해 묫자리를 양보했다.

정약전과 물고기 함께 연구한 자산어보 제2저자
 
 
대둔도 오정리에 있는 장덕순 기념비와 정약전의 시비.
 대둔도 오정리에 있는 장덕순 기념비와 정약전의 시비.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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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바다에는 어족(魚族)이 매우 번성하였으나, 사람마다 말이 달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름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약전은 섬사람들을 수소문하며 어류에 박식한 이를 찾았다. 이즈음 홀연히 나타나 약전을 도운 사람이 장덕순(張德順)이다. 자(字)는 창대.
 
창대(덕순)는 문을 닫아걸고 손님을 사양한 채 독실히 옛 서적을 좋아했다. 다만 집이 가난하고 책이 적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음에도 공부한 것이 폭넓지 못했다. 하지만 성품이 조용하고 정밀해 무릇 직접 듣거나 풀과 나무, 새와 물고기는 모두 자세히 살피고 깊이 그 생리를 알았으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했다. 나는 마침내 그를 불러들여 머무르게 하면서 그와 함께 연구하고 차례를 매겨 책을 완성하고는 자산어보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 <자산어보> 서문-

자산어보를 학술논문이라고 한다면 약전이 제1저자, 덕순은 제2저자다. 집안 족보에 따르면 덕순은 1792년생으로 20대 청년이었을 때 약전을 만나 어보(魚譜) 작성을 도왔다.

선착장에서 내려 오정리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자산어보> 탄생의 숨은 공로자 덕순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의 좌우로 정약전이 덕순을 찬양하는 시비가 옹위한다.
  
조촐한 상석을 설치한 장덕순 묘소.
 조촐한 상석을 설치한 장덕순 묘소.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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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소장본 여유당집(與猶堂集)에는 덕순과 관련해 정약전이 남긴 두 편의 시문이 남아 있다. '장창대에게 부치다(寄張昌大)'라는 시는 덕순이 초저녁부터 밤이 새도록 정약전의 대화 상대였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장창대를
남들보다 뛰어난 선비라 하지
옛 책을 언제나 손에 들고
오묘한 도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네
초저녁부터 이야기 나누다 보면
어느새 바닷소리가 들려오누나
어찌하면 한낮부터 밤이 다하도록
이치의 근원을 더듬어볼까

학식에서 당대 최고 수준인 정약전이 밤새 세상 이치를 함께 논하는 상대가 될 정도이니 장덕순의 지혜와 지식의 깊이가 만만찮았음을 말해준다. 옛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뛰어난 선비'였기에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대둔도의 500년 우물 표지석. 오정리(梧井里)라는
이름 속에도 우물이 담겨 있다.
 대둔도의 500년 우물 표지석. 오정리(梧井里)라는 이름 속에도 우물이 담겨 있다.
ⓒ 황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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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은 오정리 장덕순 생가를 복원하고 집 뒤 마늘밭과 조릿대 숲을 공원화할 계획이다. 오정리(梧井里)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옛날 이 마을에는 오래 묵은 오동나무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마을 이름에만 남아 있다. 500년 된 우물에서 혹심한 가뭄에도 물이 펑펑 솟아나 오정리 주민들은 식수난을 겪지 않는다.였다. 오정리는 일제강점기에 오리로 바뀌었다가 근년에 주민들의 청원으로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덕순의 묘소는 오정리 도목리 수리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에 있다. 가파른 철제계단을 올라가야 나온다. 자산어보 신드롬이 일면서 방문객이 늘어나자 묘소 앞에 상석을 설치했다. '仁同張氏 昌大 德順之墓'(인동장씨 창대 덕순지묘)라는 상석(床石)의 글씨가 선명하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김이수 전기 편찬 추진위원회, 《김이수 전기》, 홍디자인하우스, 2001
정약전 지음/권경순 김광년 옮김, 《자산어보》, 더스토리, 2022
최성환, 《유배인의 섬생활》, 세창미디어, 2020
최성환, 《천사섬 신안 섬사람 이야기》, CREFUN, 2014


태그:#대둔도, #김이수, #장창대, #오정리, #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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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탐사보도로 한국기자상을 두해 연속 수상했다. 저서 '박종철 고문치사와 6월항쟁'은 언론 지망생들의 필독서 반열에 들었다. 시사월간지 신동아에 황호택이 만난 사람을 5년 5개월동안 연재하고 인터뷰 집을 7권 펴냈다. 동아일보 논설주간, 서울시립대 초빙교수를 지냈고 현재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 대학원 겸직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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