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27 15:31최종 업데이트 23.12.27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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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허정숙 ⓒ 위키미디어 공용

 
20세기 전반의 신여성들을 비하하는 '못된걸'이란 표현이 있었다. 모던걸(morden girl)이라는 원래의 표현이 그렇게 변형돼 사용됐다. 댕기머리를 끊고 단발을 하고 다닌다고 해서 그들을 모단(毛斷)걸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신여성 중 한 부류는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운동가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1872~1952)를 연상시켰다. 이들은 '맑스걸'이나 '엥겔스레이디'로 불렸다. 일제강점기의 대중 잡지인 1931년 7월호 <삼천리>에 실린 '붉은 연애의 주인공들'은 박헌영·김약수 등의 독립운동가와 일월회·화요회·북풍회 등의 사회주의단체를 열거하면서 이렇게 묘사했다.


"이 다수한 투사의 신변에는 묘령 - 꼿과 가튼 아름다운 맑스껄, 엥겔스레듸들이 마치 구름자 모양으로 그 뒤를 따르면서 살풍경한 이 사상운동 선상(線上)에 한 떨기의 꼿수를 노아주엇다."

살벌한 정치투쟁 와중에도 "붉은 연애"가 이루어져 "한 떨기의 꼿수"를 놓게 됐다면서,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곁에 있는 여성들을 맑스걸과 엥겔스레이디로 불렀다. 이 기사에서 맑스걸·엥겔스레이디의 대표적 인물로 거명한 여성들이 있다. 허정숙·황신덕·주세죽·남수라·현계옥·정학수·고명자·정칠성·심은숙·조원숙·정종명·우봉운이다.

주세죽은 여성해방 및 민족해방 운동가이자 박헌영의 아내로 유명하고, 정칠성은 항일운동가이자 전직 기생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맨 먼저 언급된 허정숙(허정자)은 오늘날 덜 알려져 있다. 기사 제목 옆에는 허정숙의 사진이 박혀 있다. 당시 사람들이 볼 때는 허정숙이 맑스걸들을 대표할 만한 인물로 비쳐졌음을 알 수 있다.

맑스걸들이 신사상을 받아들인 것은 이념에 매료돼서만은 아니다. 일본이 싫어서 그렇게 된 측면도 컸다. 극단적 자본주의인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선 일본에 맞서려면, 제국주의 반대편에 있는 사상을 활용할 이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허정숙 역시 그랬다. 사회주의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인 그는 항일투쟁에 승부를 걸었다. 이 점은 그가 한국 독립운동사의 대형 사건과 연결된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일제 식민지배에 대항한 맑스걸 허정숙

1929년 11월 3일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의 열기를 이어받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중학교) 학생을 비롯한 서울 지역 여학생들이 주도한 항일시위가 1930년 1월 15일의 '시내 여학생 사건' 혹은 '서울 여학생 만세운동'이다. 이화민주동우회가 펴낸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운동사>는 "1월 15일 약 5천 명의 학생이 함께 거리로 나와 만세를" 불렀다면서 "서울의 거의 모든 여학교 학생들이 총궐기했다"고 설명한다.

좌우합작 여성단체인 근우회 간부들이 학생들의 뒤에 있었다. 1931년 약산 김원봉(1898년생)과 결혼한 박차정(1910년생)과 더불어 '맑스걸' 대표주자 허정숙이 배후에 있었다.

1930년 1월 17일 자 <동아일보> 호외 기사 '사회단체 간부 총검거에 착수'는 "경긔도 경찰부 고등과와 종로서에서는 십륙일 오후부터 아연 긴장한 빗츨 띄고 사회단체의 중요한 인물을 속속 검거하는 중"이라며 "근우회 허정숙"을 거론했다.

일본 경찰은 이 만세운동을 근우회 사건 혹은 허정숙 사건으로도 불렀다. 광주학생운동을 '서울 여학생 만세운동'으로 연결하는 일에서 허정숙의 역할이 그만큼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맑스걸 허정숙이 자본주의나 여성 억압체제에만 맞선 게 아니라 일제 식민지배에도 대항했다는 점이 여기서 나타난다.

허정숙이 태어난 것은 서울 여학생 만세운동으로부터 29년 전인 1902년 경이고 출생지는 함경북도 명천이다. 해방 직후에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부위원장을 했고, 1948년에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맡은 허헌이 그의 아버지다.

16세 때인 1918년에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허정숙은 아버지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하고, 그 뒤 본인의 뜻으로 중국 유학을 갔다. 사상적 변화는 거기서 일어났다. 19세 때인 1921년의 일이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한 역사학자 신영숙이 2006년 3월 <내일을 여는 역사>에 기고한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조선의 클론타이 허정숙'은 "훗날 첫 남편이 될 임원근과 박헌영, 주세죽 등과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사회주의 이념을" 접하는 일이 1921년 상하이에서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 뒤 신흥청년동맹·조선청년동맹·조선여성동우회에 참여하고, 23세 때인 1925년경에 <동아일보> 기자가 되고 <개벽> 편집자가 됐다. 그 뒤 컬럼비아대학에서 여성해방론과 사회주의를 공부했다. 1927년에 귀국한 뒤에는 근우회 집행위원이 되고 1930년에 서울 여학생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에게는 오빠나 남동생이 없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이 어머니 정경자의 한이었다. 위 논문은 "외딸을 낳은 모친은 봉건적 가부장제의 폐단을 청산하지 못한 채 마음의 짐을 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성장한 허정숙은 어머니와 다른 길을 걸었고 봉건적 굴레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았다. 여기에는 자신의 의지와 더불어 아버지의 도움이 컸다. 그에게 일본 유학을 권유한 아버지 허헌은 1926년에 스물네 살 된 딸과 함께 세계여행을 했다.

분단체제가 가로막은 독립운동에 대한 객관적 평가
 

1925년 11월 서대문형무소 투옥된 허정숙 ⓒ 위키미디어 공용

 
허정숙은 봉건적 굴레에 저항했다기보다는 무시하고 살아간 여성이다. 그는 임원근과의 사이에서 첫아들을 낳은 1924년으로부터 2년 정도 지난 뒤에 동아일보사에 취직했다. 또 1926년에 독립운동가 송봉우와의 동거설로 주목을 받은 뒤에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전근대적인 여성 같았으면 자녀를 낳거나 스캔들에 휩싸이면 항일운동은 물론이고 사회생활 자체를 접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뒤 서울 여학생 만세운동을 주도한 데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그런 굴레에 스스로를 매어둘 의향이 없었다.

허정숙의 여성해방운동은 민족해방운동과 결합됐다. 여성단체 간부인 그가 여자 중학생들의 항일투쟁을 배후에서 주도한 사실은 두 개의 해방운동이 그의 내면에서 조화를 이뤘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생각하는 '해방된 나라'가 민족의 해방뿐 아니라 여성의 해방도 성취하는 나라였음을 의미한다.

서울 여학생 만세운동 이후로 그의 투쟁은 더욱 대담해졌다. 징역형을 살고 출옥한 뒤인 1936년, 그는 중국으로 망명했다. 김원봉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고, 군대 조직인 조선의용대의 창설에 참여했다. 군대를 앞세워 부조리한 체제에 대항하는 일에 나섰던 것이다.

1940년에는 중국인들의 항일투쟁에도 동참했다. 중국공산당 군대인 팔로군 제120사단의 정치지도원이 됐다. 불혹의 나이에 접근하는 이 시기에 그는 독립운동가들로부터 큰 누님으로 불렸다. 그런 상태로 43세 때인 1945년에 해방을 맞이했다.

허정숙은 독립운동진영에서 지도자 위치에 있었다. 광주학생운동을 서울 지역으로 파급시키는 데도 결정적 기여를 했다. 한국인 신분으로 팔로군 지도원이 되어 한·중 연합 항일투쟁에도 참여했다. 이를 통해 한국 독립운동이 중국인들의 지지를 받는 데도 이바지했다.

해방 뒤 월북한 그는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이 됐다. 1948년 북한 정부 수립 뒤에는 문화선전상, 사법상, 최고재판소장,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조선노동당 비서 등을 역임했다. 그런 뒤 1991년에 8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분단체제가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가로막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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