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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만약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른다면 어쩌면 많은 상처가 나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한 곳을 향해 쉬지 않고 흘러간다면, 그 많은 시간을 새로운 사건들로 채울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다 보면 이전의 것들을 지워나갈 수도, 또는 옅어지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면, 아니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지금 나의 시간은 마치 단단한 고무줄을 매달고 열심히 달리는데, 정말 안간힘을 써서 한 방향으로 달리는데, 고무줄이 최대로 팽창되면 결국 다시 뒤로, 원래 자리로 튕겨 돌아오는 것만 같다. 고무줄의 힘으로 정신이 혼미해져,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어느 방향으로 달려야 할지도 모른 채 또다시 막무가내로 달리는 것만 같다. 물론 달리는 동안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난 또다시 원점이다. 이걸 계속 반복하면 고무줄이 느슨해져 더 멀리, 더 자유롭게 갈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고무줄을 끊어버리면 자유로워지는 것일까. 고무줄을 매고 달려 나갈 힘도 없고, 고무줄을 끊어버릴 용기도 없어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 지금 나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머물러 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한 달은 어떻게 가는지, 이 계절은 어떻게 지나가는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알람 소리가 들릴 때까지 가만히 누워있다가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나고, 보일러를 켠 뒤 화장실에 들어가 씻는다. 화장실에서 나와 그냥 손에 닿는 옷을 입고 그냥 손에 닿는 음식을 먹는다. 지하철역을 향해 걷다 6호선을 타고 불광역에서 내린다. 회사에 들어와 컴퓨터를 켜고, 커피를 타 자리에 앉는다. 누군가 밥 먹으러 가자고 하면, 나가서 밥을 먹고 다시 들어와, 커피를 타 자리에 앉는다. 누군가 퇴근 안 하냐고 하면 짐을 챙겨 다시 6호선을 타고 망원역에서 내린다. 집에 와서 보일러를 켜고 화장실에 들어가 씻는다. 알람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가만히 누워있다.

사람들의 시간은 흘러가지만, 그 시간에 나는 없다. 서면을 읽어야 하는데 읽히지 않는다. 상대방의 서면에 반박하는 이유서를 써야 하는데, 문장이 완성되지 않는다. 감독관에게 전화해 사건처리가 너무 늦다고 항의해야 하는데, 6시가 넘어버린다. 오늘은 꼭 통화해야 하는데, 금요일이 지나가 버린다. 지하철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진다. 머릿속에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떠오르는데 무슨 생각인지 전혀 모르겠다.

오늘 나에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우습다.

아픔이 자책으로, 두려움으로
 
아픔이 자책이 되지 않고, 아픈 몸에 일터가 맞춰질 수 있도록. 사진은 한울의 일기장
 아픔이 자책이 되지 않고, 아픈 몸에 일터가 맞춰질 수 있도록. 사진은 한울의 일기장
ⓒ 김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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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9일의 일기다. 당시 나는 수면장애와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 최근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라는 드라마를 봤다. 정신병동 간호사인 다은과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이다. 그중 다은의 우울증을 다룬 에피소드가 있었다. 다들 한 걸음씩 나아가는데 나만 그대로 머무는 느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우습게 느껴지는 상태에 대한 묘사가 너무 공감됐다. 우울증을 가진 다은이 복직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다뤄졌다. 일부 환자와 보호자들은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치료할 수 없다", "아픈 사람한테 내 가족을 맡길 수 없다"며 다은의 사직을 요구했다.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 너무 아프게 느껴졌다. 이게 드라마 속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 아팠다.

저 일기를 쓸 무렵 난 하루하루 제시간에 일어나 출근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눈물이 나올 거 같거나 그냥 흘러내릴 거 같은 몸을 붙잡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업무 효율성 따위는 사치였다. 나도 알았다. 내가 주변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제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그러니깐 내가 문제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미안하고 더 움츠러들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무가치하게 느껴졌고, 나아가 이 상태가 영원히 계속될까 무서웠다.

노무사 일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적응장애, PTSD, 우울증 등을 가진 노동자들을 만난다. 직장 내 괴롭힘이나 성폭행, 불안정한 고용, 임금체불 등 다양한 이유로 그들은 질병을 얻었다. 그들이 원해서 질병을 얻은 것도 아니고, 그들이 잘못해서 질병을 얻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프다는 사실 자체로 자책하고, 나아가 이 질병이 낫지 않을까 봐, 다시는 건강했던(건강하다고 믿었던) 때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아픈 몸에 맞출 수 있는 일터를

우리는 반드시 예전만큼 건강해져야 할까? 어떤 질병도 없는 건강한 몸만이 일할 자격이 있을까? 노동자 10명이 있다면 10개의 서로 다른 몸들이, 매일 다르게 일을 하고 있다. 타고난 몸이 다를 테고, 그들이 살아오면서 만들어 온 움직임의 경험들, 그것들이 남긴 흔적들이 모두 다를 테니 말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전날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에 따라 매일의 컨디션이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는 단일한 몸을 가진 채 노동력을 제공하는 게 아니다. 같은 일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좀 더 수월하고, 누군가에게는 죽을 만큼 힘들 수 있다. 어떤 날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어떤 날은 며칠이 지나도록 넘기지 못하고 앓을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자연히 늙고 병든다. 현재 아픈 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거나, 아플 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회사는, 사회는 고강도의 노동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한 몸을 항상 지닐 것을 요구한다. 질병을 너무 쉽게 개인 탓으로 돌리고, '건강', '보편성'에서 어긋나있는 몸은 치료의 대상, 사라져야 하는 상태로만 여긴다. 이는 누군가의 일할 자격, 나아가 사회 구성원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하는, 명백한 차별이다.

아픈 몸을 가진 사람도 일할 수 있다. 누군가는 주 5일, 8시간 노동을 할 수 있고, 누군가는 주 3일, 4시간의 노동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쉬지 않고 1시간 동안 상담 전화를 받을 수 있고, 누군가는 30분에 한 번씩 바깥 공기를 쐬어야 할 뿐이다. 자주 쉬러 나가는 사람, 휴가를 자주 내는 사람이 문제인 게 아니다. 그게 문제가 되는 업무량과 자본주의가 문제이다. 아픈 몸이 회복되지 않아도 평등하고 온전한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 아픈 사람도 일할 수 있는 일터가 모두에게 좋은 일터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한울 님은 한노보연 회원으로 여성노동건강권팀에서 활동 중입니다. 이 기사는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12월호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태그:#아픈몸으로일하기, #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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