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24 10:05최종 업데이트 23.10.2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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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정문. ⓒ 권우성


육군이 국민적 반발에도 아랑곳없이 육군사관학교 독립전쟁영웅실을 철거하고 있다. 지난 16일부터 철거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22일 보도됐다.

독립운동가 흉상 철거 시도에 이은 이번 철거는 독립군과 국군의 연결점을 훼손하는 것이기도 하고 한일 군사협력 강화와도 무관치 않은 일이지만, 그곳에 모셔진 독립운동가들이 해마다 같은 날 떠올렸을 악몽을 상기시켜 주는 일이기도 하다.


헌법은 대한민국의 법통이 3·1운동과 임시정부에 있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군대인 한국광복군은 국군의 뿌리가 된다. 바로 이 광복군이 자신들의 출발점으로 인식한 특별한 날이 있었다.

1940년 9월 17일, 백범 김구의 주도하에 광복군이 창설됐다. 광복군이 자신들의 출발점으로 인식한 날은 이날이 아니다. 1942년 12월 1일, 약산 김원봉이 광복군에 합류했다. 이로써 광복군의 대표성이 크게 제고됐지만, 이날 역시 그날이 아니다.

광복군은 대한제국 멸망 3년 전인 1907년 8월 1일을 자신들이 잉태된 날로 인식했다. 육사에 흉상이 있고 독립전쟁영웅실에 모셔졌던 박승환 참령이 순국한 날도 바로 그날이다.

1967년 국가보훈부의 전신인 원호처 산하에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가 설치됐다. 이 위원회 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독립운동사> 제7권은 8월 1일 상황을 자세히 기술했다.

이에 따르면, 그날 아침 한국군 대대장급 이상이 한국주차군사령관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관저에 소집됐다. 이 자리에서 군부대신인 친일파 이병무가 신임 황제인 순종이 전날 공포한 군대해산 조칙을 낭독했다.

그런 다음 "오전 10시까지 각 사병을 도수(徒手)로 훈련원에 집합시킬 것"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냥 '훈련원에 집합'시키라고 하지 않고 '빈손으로 훈련원에 집합'시킬 것을 지시했다. 사병들의 무장해제까지 그날 관철시킬 참이었던 것이다.

박승환 대장이 순국하고 의병이 궐기한 그날

그날 아침 하세가와의 관저에 가지 않은 장교가 있었다. 박승환이 바로 그였다. <독립운동사>는 "이때 각 부대장의 긴급 소집을 들은 박승환은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병을 칭병하고 중대장을 대신 보내어 동정을 알아 오게 하였는데, 결국 군대해산의 소식을 듣게 되니 분격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라고 서술한다.

그러면서 "의자를 걷어차고 탁자를 두드리며 대성통곡하고 일찌감치 손을 대지 못한 것을 통탄하면서 그만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하고 마니 온 영중에 크게 소란하였다"라고 묘사한다. 38세 나이로 스스로 순국한 그의 품에서는 "군인이 나라를 지킬 수 없고 신하가 충성을 다할 수 없으니 만번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라고 적힌 유서가 발견됐다.

이 순국은 한 개인의 인생을 마감하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대한제국 군대의 죽음을 표상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승화됐다. 더불어, 그것은 죽음이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회생으로 이어짐을 상징하는 사건이 됐다. 새로운 군대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던 것이다.

<독립운동사>는 "이러한 박승환 대대장의 죽음은 그대로 대원들의 전투 명령이 되었다"라며 "대대장님이 죽었다는 고함 소리와 함께 격분한 사병들은 무기고를 깨치고 총기 탄환을 꺼내어 들어간다"라고 서술했다. 박승환 순국이 의병 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것이다.

육사 독립전쟁영웅실에 모셔졌던 박승환은 이처럼 자기 몸을 던져 새로운 항일전쟁의 물꼬를 텄다. 이런 인물이 모셔진 육사 독립전쟁영웅실을 그냥 두면 안 된다는 것이 윤석열 정권의 판단이다.

임시정부 군대인 한국광복군은 그런 일이 있었던 8월 1일을 자신들의 출발점으로 인식했다.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박승환 대장이 순국하고 의병이 궐기한 그날에 자신들이 새롭게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에서 발언하는 지청천.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그런 인식은 박승환과 함께 육사에 모셔졌던 지청천 장군에게서도 나타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제40권에 수록된 이청천 명의의 1942년 6월 14일 자 <신화일보> 기고문은 이청천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한 이 광복군사령관이 광복군의 뿌리를 어디에 뒀는지를 보여준다.

"한국광복군으로 말하자면, 이 이름은 절대 최근에야 선보인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국광복군이 중국 정부로부터 정식 승인을 얻은 것은 지난해 가을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국광복군은 지금으로부터 35년 전부터 이미 존재하여 왔다.

1907년 8월 1일 한국 국방군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한국 국방군의 장교와 병사들은 해산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민간의 지사들과 힘을 합쳐 왜적에 대항하였다. 일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 대단한 기세를 떨쳤던 이 저항운동을 한인들은 통상 한국광복군운동 혹은 의병운동이라 불렀다."


독립군들의 정신적 초석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출범식에서 보고하는 조소앙.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광복군사령관 지청천은 박승환 대장의 순국이 전투 개시 명령으로 받아들여지고 항일투쟁이 불길처럼 번져나간 그날부터 한국광복군이 존재했다고 인식됐다. 이런 역사인식은 1940년 9월 17일 거행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 때 낭독된 조소앙의 한문 보고서에도 나타난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제2권에 수록된 '대한민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보고서'에서 조소앙은 지청천과 똑같은 말을 했다. 이 자리에서 조소앙은 "한국광복군은 일찌기 1907년 8월 1일 국방군 해산 시에 성립했다"고 선언했다.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독립군들이 1907년 8월 1일에 대해 그런 애착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회자됐다. 1990년대 초반에는, 한국전쟁 때 육군이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 대신 1907년 그날을 국군의 날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유력하게 제기됐다.

1993년 9월 29일 자 <동아일보> '국군의날 10월 1일 정통성 없다'는 "육군 군사연구실도 지난해 말 <국군의 맥>이란 책자를 펴내 통일을 지향하는 시대에 냉전적 의미를 띤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잡기보다 군맥을 더듬어 군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이에 따라 국군의 날을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국군의 날이 재선정될 경우 그 후보로는 일제의 대한제국군 해산 명령에 박승환 참령이 자결한 1907년 10월 1일" 등등이 있다고 전했다.

일제 강점 3년 전의 군대 해산과 박승환 순국은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독립군들의 정신적 초석이 됐고, 위 기사에서 나타나듯이 그날 사건과 광복군의 상관관계는 해방 뒤에도 계속 회자됐다. 이는 육사 흉상으로 모셔지고 육사 독립전쟁영웅실 주인공으로 모셔졌던 박승환·지청천·홍범도·이회영·김좌진·이범석이 해마다 8월 1일이 되면 어떤 생각을 하며 얼마나 아팠을지를 잘 보여준다.

박승환은 군대해산의 아픔을 온몸으로 보여줬고, 지청천은 군대해산과 박승환 순국이 한국광복군의 뿌리임을 절감하며 살았다. 홍범도·이회영·김좌진·이범석 역시 군대해산과 독립군의 연관성을 잘 아는 인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윤 정권은 '해산'의 고통을 또다시 안겨줬다. 이들의 흉상을 철거하고 다른 데로 보내는 일을 추진하고, 독립전쟁영웅실도 해체하고 있다. 1907년 군대해산의 아픔을 간직한 그들에게 2023년 아픔을 또다시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육사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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