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23 11:56최종 업데이트 23.10.23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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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일 더불어민주당 국방위원 김병주, 기동만, 윤후덕 의원과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우원식 의원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관련 육군사관학교장을 면담한 뒤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정문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권우성


육군사관학교 흉상 논란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공적 평가가 얼마나 자의적일 수 있는지를 여실히 증명했다. 윤석열 정부는 별 근거도 없이 홍범도를 친소련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면서 그를 비롯해 이회영·김좌진·지청천·이범석의 흉상을 육사에서 치우려 했다.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지 않았다면, 윤 정부가 '홍범도 흉상만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겠다'는 타협안을 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지정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불신이 존재했다. 항일투쟁의 주류를 이룬 좌파 진영은 1987년 6월항쟁 이후에야 어느 정도 빛을 보았다. 그렇지만 그들 상당수는 여전히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38선이 없을 때 해외로 망명했다가 8·15 해방 뒤 38선 이남이 아닌 이북으로 귀국한 독립운동가들의 대다수도 마찬가지다.


좌파나 월북자가 아닌 여타 독립운동가 중에도 그런 사례가 적지 않다. 비밀 활동을 했거나 체포된 적이 없거나 간부급이 아니었던 독립운동가들이 그에 해당한다. 이런 경우는 후손이나 지지자들이 열심히 뛰어다니지 않는 한, 유공자 서훈은 하늘의 별 따기다.

2018년 8월 23일, 경찰청이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고 문형순 경감을 선정했다. 문형순은 4·3항쟁(4·3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점이자 한국전쟁이 막 발발한 시점인 1950년 8월에 '불순분자들을 처형하라'는 계엄군의 명령을 거부하고 221명을 풀어줬다. 당시 제주 성산포경찰서장이었던 그를 경찰청이 68년 만에 경찰 영웅으로 표창했던 것이다.

문형순은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뒤 경찰을 그만뒀다. 한국전쟁이 끝난 해인 1953년에 경찰복을 벗고 쌀 배급소 등에서 일하며 홀로 살다가 1966년에 세상을 떠났다.

2018년 10월 4일 자 경찰청 보도자료에 첨부된 경찰 인사기록 카드(경남경찰청 소장)에 따르면, 문형순은 단기 4231년(1898년) 2월 7일 출생했고 본적지는 평안남도 안주군 대니면이다. 안주군에서 대성학교를 졸업한 그는 3·1운동이 일어난 4252년(1919년) 3월에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회영·이시영 형제가 세운 독립군 사관학교를 1919년 3월에 졸업했다. 그전부터 이미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 문시영이란 가명으로 무장투쟁에 뛰어든 그의 이력을 경찰청 홈페이지는 이렇게 정리한다.
 
"1920년 한국의용군에 편입되어 만주에서 노령(시베리아)으로 이동하였으며, 1921년 4월 고려혁명군에 재편되어 군사교관으로 복무하였다. 1929년 국민부 중앙호위대장, 같은 해 12월에는 조선혁명당 초기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35년 3월부터는 북지 하북성을 중심으로 지하공작대에 복무하였으며, 1945년 8월에는 중경 한국 임시정부 주(駐)화북광복군에 복무하였다."
 

2018년 경찰청이 당시 보훈처에 보내 독립유공 재심사를 요청한 문형순 경감 경찰인사기록으로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국민부 호위대장 등 독립군으로 활동한 이력이 기재되어 있다. ⓒ 경찰청

 
항일투사에서 제주 경찰로

러시아령 시베리아나 고려혁명군이란 표현에서 느껴지듯이, 그는 소련이나 공산주의와도 벽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29년 4월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신민부·참의부가 국민부로 통합될 때 중앙호위대장으로 함께했다. 국민부가 조선혁명당에 흡수된 뒤에도 계속 잔류했다. 그 뒤 북중국 허베이성에서 지하 활동도 했고, 북중국에서 임시정부 광복군으로도 복무했다.

그의 프로필은 그가 좌파니 우파니 하는 구분에 초연했다는 느낌을 준다. 군사학교 출신의 교관 적격자라는 특성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그에 대한 수요가 많았을 수도 있다. 또 독립운동을 상위 개념 및 목적으로 두고, 이념을 하위 개념 및 수단으로 두는 전형적인 독립운동가였다는 느낌도 풍긴다. 21세 때인 1919년 3월 이전부터 신흥무관학교에 몸담았다가 항일투사 신분으로 47세 때인 1945년에 해방을 맞이했으니, 인생의 가장 왕성한 시기를 민족에 바친 셈이다.

그가 틀림없는 독립운동가였다는 확신은 제주 지역 언론 보도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3·1절 102주년 기사로 보도된 2021년 2월 25일 자 <제주일보> '의인 문형순 서장 독립유공 서훈 언제면'은 "<무장독립운동비사>(채근식 저)에는 고인이 독립군 중앙호위대장인 문시영(문형순의 가명)이라고 저술했다"면서 "각종 사료에도 고인은 ··· 독립운동단체인 국민부에 가입, 중앙호위대장과 조선혁명군 집행위원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고 기록했다"는 말로 그에 대한 신뢰를 표시했다.

문형순이 경찰이 된 것은 해방 2년 뒤다. 위 경찰청 홈페이지에는 "경찰에는 1947년 5월 제주청 기동경비대장(경위)으로 입직하였으며, 이후 모슬포경찰서장 임시서리(49.1~49.10), 성산포경찰서장(49.10~50.12), 경남 함안서장(51.6~51.10), 지리산전투경찰사령부 교육대장(52.3~52.4) 등을 역임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해방공간의 경찰' 하면 친일 경찰을 얼른 연상하게 되지만, 모든 경찰이 친일파였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문형순이 경찰 간부로 특채된 1947년 5월은 1948년 4·3항쟁의 발단이 된 경찰의 3·1절 발포로 인해 제주도민들의 저항이 고조되던 때였다. 제주 지역의 경찰력 수요 급증이 문형순 특채에 유리하게 작용했으리라 볼 수 있다.

4·3항쟁이 고조되던 시점에 제주 경찰이 된 그는 경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민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경찰을 악용했지만, 문형순은 그런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고 민중의 보호자를 자임하고 나섰다.

이 점은 재미동포 이도영 박사의 논문인 '백조일손지묘가 말하는 전쟁기 제주도 양민학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00년 5월 <역사비평>에 실린 이 논문은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의 의미와 관련해 "백조일손 희생자란 이 모슬포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처형된 약 210~250명 중 1957년에 발굴되어 현 공동묘역에 안장된 132명을 일컫는다"고 말한다.

이 논문은 범법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실시된 한국전쟁 초기의 예비검속 때 제주경찰서·서귀포경찰서·모슬포경찰서·성산포경찰서에서 학살된 민간인 규모를 두고 "내가 수집한 자료에 의하면 제주 400~500명 이상, 서귀포 250명, 모슬포 250명, 성산포 6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기술한다.

논문은 제주 지역 경찰서 4곳 중에서 성산포경찰서의 민간인 학살 규모가 훨씬 적었던 이유와 관련해 "당시 모슬포경찰서장으로 있던 문형순은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으로 제주도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4·3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하모리장의 간청을 받아들여 수백 명의 모슬포 청년들의 목숨을 구해냈다"고 설명한다. 문형순은 도민들에게 자수 의사를 표시하도록 한 뒤 이를 명분으로 목숨을 구해줬다.

295명의 생명 구한 '한국의 쉰들러'
 

2018년 11월 1일 제주4·3 당시 총살 명령을 거부하고 수백 명의 제주민의 목숨을 구한 고 문형순(1897∼1966년) 전 모슬포경찰서장(경감)을 기리는 흉상 제막식이 제주지방경찰청사에서 진행되고 있다. ⓒ 연합뉴스

 
1949년에 모슬포경찰서장 신분으로 도민들을 보호해 준 그는 한국전쟁 때는 계엄군에 정면으로 맞서 도민들의 목숨을 지켜냈다. 위 경찰청 홈페이지는 "성산포서 예비검속자에 대한 계엄군의 처형 명령에 '부당함으로 불이행'한다며 거부하여 총 295명의 생명을 구해내 '한국의 쉰들러'로 불린다"라고 기술했다.

부당한 명령은 이행할 수 없다며 도민들을 지켜준 그의 행적은 선행이라는 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런 그를 제주도민들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있다. 주민들이 세워준 공덕비에서도 그에 대한 고마움을 읽을 수 있다.

2021년 9월 7일 자 경찰청 유튜브 채널 '경찰영웅 문형순 서장의 흔적을 찾아서 in 제주'에 출연한 강순조씨(당시 86세)는 "제가 이 세상에 나오도록 해준 것은 저의 아버지, 어머니지만 사회의 저의 아버지는 문 서장님입니다"라고 감사를 표했다. 1948년 당시 13세였던 강순조씨보다 여섯 살 많은 고춘언씨는 "그때에 죽을 사람이 그 서장님 덕분에 살아서 내 지금 90년을 살았습니다"라고 회고했다.
 
 
문형순은 일제강점기 때는 청춘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해방 뒤에는 제주 학살 현장에서 수백 명의 목숨을 살려냈다. 경찰청이 2018년에야 경찰영웅으로 선정한 것이 너무 늦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는 위대한 일들을 해냈다.

그렇지만 국가보훈부는 그를 유공자로 지정하지 않고 있다. 위의 경찰청 보도자료는 "한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입증 자료가 부족해 그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이 보도자료는 "하여 경찰청에서 최근 찾아낸 문형순 서장의 인사 기록과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명부 등을 보훈처에 보내 독립유공 재심사를 요청하였다"고 말한다.

보충 자료를 갖춰 재심사를 이미 요청했노라는 언급이 2018년 10월 14일 자 보도자료에 있었다. 그로부터 5년이 넘게 흘렀다. 지금도 문형순은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정보력이 가장 막강한 경찰청이 구술 증거가 아닌 경찰 문건을 근거로 유공자 서훈을 신청했는데도 아직까지 성사되지 않고 있다. 문형순 건에 대해서만 심사가 까다로워야 할 이유가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독립유공자 지정에 대한 오랜 국민적 불신을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국가보훈부는 순리적인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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