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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늦은 해후다. 애써 잊은 것도 아닌데 오랫동안 세월의 골방에 숨어있던 기억 한 자락이 눈앞에 서 있듯 선명하다.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던 대여섯 살쯤 먹은  어린아이 시절. 보랏빛 반짝이 수놓은 비로드치마로 한껏 멋을 낸 엄마를 따라 오르던 언덕배기. 마을 제일 높은 곳에 서있던 극장. 영화배우들이 그려진 간판과 양 옆으로 활짝 열 수 있는 문, 그 옆 붉은 글씨로 쓰인 매표소. 면사무소 가기 전 언덕에 있던 극장은 마을의 유일한 병원과 나란히 있었다.
 
원주아카데미극장은 원주시민들의 60여 년 추억을 간직한 곳이다. 원주시민들의 반대에도 원주시는 철거를 강행하고 있다.
▲ 원주아카데미 상영당시 포스터와 홍보 원주아카데미극장은 원주시민들의 60여 년 추억을 간직한 곳이다. 원주시민들의 반대에도 원주시는 철거를 강행하고 있다.
ⓒ 원주아카데미극장 친구들과 범시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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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영화 간판이 극장 머리맡에 오르는 날이면 엄마는 여느 때보다 서둘러 일을 끝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재미있게 보고 와" 하고는 빙그레 미소로 배웅했다. 극장가는 날 만큼은 내가 엄마의 보호자였다. 영화가 끝나면 어두컴컴해지고 혼자 밤길을 걷기에는 다소 부담이 될 터, 일테면 난 호신용 딸로 변신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때만 해도 나이가 어려서인지 엄마랑 가면 어떤 영화든 무사통과였다. 엄마가 사준 과자와 사이다, 마른 오징어 등 주전부리를 먹으며 몇 번이고 되돌이 되는 광고를 지루하게 봤다. 그러다 대한뉴스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되면 나는 엄마 소매를 흔들며 나간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럼 엄마는 손사래로 나가서 놀아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물론 앞부분이 재미있는 영화일 때는 조금 더 앉아 있었지만 결국 암막 커튼을 제치고 극장 로비로 나왔다.

어른들이 나오는 영화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도 못하고 이해도 되지 않았지만 사실 영화보다 훨씬 재미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극장 옆 병원집에 사는, 나보다 서너 살 많은 오빠랑 어울려 노는 일이다. 병원집 오빠는 내가 극장에 갈 때마다 만날 수 있었다. 엄마는 병원집 오빠의 엄마를 언니라 불렀다. 그만큼 친자매 같은 사이였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를 데리고 병원집으로 자주 놀러 갔고 오빠와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극장에 들어갈 때 보이지 않던 오빠는 대한뉴스 끝나고 나오면 기다렸다는 듯 항상 로비에 서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술래잡기도 하고 극장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까르르 웃다가 도망가고 붙잡기를 반복하며 정신없이 놀았었다. 매점 아주머니가 공짜로 준 알사탕 하나씩 입에 물고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 안을 빼고는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때를 떠올리다보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흐른다. 마주보며 웃다가 이유도 없이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고 갑작스레 가슴이 뛰기도 했던, 어찌 보면 참 잔망스러운 시절이었다.

극장에서의 추억을 떠올린 까닭

지금은 이름조차 가물거리는 그 시절, 병원집 오빠와의 추억을 생경스럽게 떠올린 건 원주아카데미극장 소식을 듣고 나서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극장 중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인데, 철거 위기에 몰린 극장을 지키려는 시민들과 철거하려는 원주시가 맞서고 있다.

1963년에 문을 열었다니 나보다 세 살이나 많다. 텔레비전이 극히 귀했던 시절이니 영화 관람이 거의 유일한 문화생활이었을 것이다. 극장 전성기에 문을 연 아카데미극장은 원주시민들에게는 문화해방구나 다름없었으리라. 고향을 떠나온 초등학교 6학년 때 이후 고향 극장의 존재는 물론 병원집 오빠와의 추억조차 잊었던 내게 원주아카데미극장 철거 소식은 영사기에서 쏟아지던 빛처럼 기억의 빗장을 불시에 열어젖혔다.

이윽고 일시에 쏟아지는 먼 옛날의 기억들이 활동사진처럼 눈앞으로 흘러갔다. 극장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소환된 추억들은 서로 먼저 나오려는 듯 아우성쳤다. 결국은 머릿속에서 뒤엉켜 가닥가닥 풀어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걸 즐거운 비명으로 이해해야 할까 싶을 찰나에 문득 '그런데 왜 철거를 하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원형도 잘 보존되고 영사기와 필름, 옛날 영화포스터 등 귀한 자료가 그대로 보관된 극장을 철거하는 이유가 뭘까? 더구나 원형이 제대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이라는데.
  
많은 영화인들이 한국 영화역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원주아카데미극장의 철거 반대와 보존에 힘을 싣고 있지만 원주시는 철거 강행을 굽히지 않고 있다.
▲ 원주아카데미극장 보존 위한 영화인 선언 웹자보  많은 영화인들이 한국 영화역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원주아카데미극장의 철거 반대와 보존에 힘을 싣고 있지만 원주시는 철거 강행을 굽히지 않고 있다.
ⓒ 원주아카데미극장친구들과 원주범시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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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을 또 만든다?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원주아카데미극장 철거 소식을 전해준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인에게 들은 철거 이유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멀티플랙스 영화관이 생겨나면서 2006년 문을 닫았던 원주아카데미극장은 2020년 '안녕 아카데미 재생사업'으로 14년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고 한다. 물론 거기에는 원주아카데미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다양한 추억을 가지고 있던 원주시민들이 극장을 보존하자는 목소리를 높였고 그런 의견이 커지면서 원주시도 여러 절차를 거쳐 보존 결정을 내렸단다.

그때부터 약간의 내부수리를 거쳐 영화 대신 씨네콘서트, 음악공연 등이 열렸고 원주시민들의 문화 향유 공간이 됐다고 한다. 그 덕분에 문화관광체육부에서 30억 원, 강원도에서 9억 원 등 국비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고 건물 안전을 위한 리모델링과 함께 역사적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단다.

하지만 지자체장 선거에서 극장 보존을 추진했던 시장이 낙선하고 새로운 시장이 취임하자 아카데미극장의 운명은 완전 뒤집어졌다. 건물 안전에 문제가 있다는 빌미를 들어 완전 철거를 하고 주차장으로 만든다는 것이 현 원주시의 계획이다.

'극장 바로 옆에 이미 주차장이 있는데 건물을 밀어버리고 주차장을 또 만든다는 사고방식이 어디에서 나온 건지 도통 모르겠다'며 지인은 철거를 명령한 시장을 강하게 성토했다. 다른 지역에 사는 나로서도 이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년 전부터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보존적 가치가 중요시되면서 각 지자체마다 너도 나도 도시재생사업 일환으로 근대건축물 발굴과 보존사업에 열을 올리는 중인데 왜 국비까지 나온 극장을 철거하려할까? 의문투성이다. 
 
근대건축물 보존 가치가 인정됐음에도 국비보조금까지반납하고 철거를 강행하려는 원주시에 맞서 철거를 반대하는 원주범시민연대와 원주아카데미극장친구들
▲ 원주아카데미극장앞에서 철거반대를 외치는 원주아카데미극장 친구들 근대건축물 보존 가치가 인정됐음에도 국비보조금까지반납하고 철거를 강행하려는 원주시에 맞서 철거를 반대하는 원주범시민연대와 원주아카데미극장친구들
ⓒ 원주아카데미친구들과 원주범시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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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고치 같았던 경기실크 이야기

그러고 보니 내가 사는 여주에서도 그 비슷한 일이 진행 중이다. 전국 최초의 민간 잠업연구소가 있었던 경기실크 부지를 철거할 것이란 소식이 지난해부터 들려왔다.

여주 경기실크도 1963년 설립됐다. 잠업이란 누에를 길러서 비단을 생산하는 고치를 생산하는 농사인데 당시 한국경제의 큰 축이었던 잠업과 비단을 생산하는 실크산업은 국책사업으로 추진될 만큼 대단했다. 뽕나무밭이 많았던 여주에는 양잠농가만 4천 가구가 넘고 종사하는 사람도 2만 여명이었다고 하니 그 시절, 지역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경기제사공업주식회사 부설 경기잠업연구소로 설립된 이곳은 각종 실험기구와 채종기구 등 잠업 관련 모든 시설을 완비하고 일본산 기계에 의존하던 잠업 기계를 국산화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역사도 갖고 있다. 잠업이 활황이던 시절에는 약 500여 톤의 누에고치를 생산해 경기도 내 최고 생산량을 자랑했던 여주 잠업 농가들은 광폭자동견직기 등 실크 생산설비를 모두 갖춘 이곳 덕에 농가소득이 상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화학섬유에 의해 자리를 빼앗기고 중국의 저가 비단이 들어오는 데다가 규모가 축소되면서 결국 폐업에 이르렀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흐름을 엿볼 수 있는 경기실크는 이제 덩그러니 남은 몇몇 건물들과 노동자들의 손때가 묻은 국산 직조기계가 번성했던 과거를 품에 안은 채 연명하고 있다.
  
여주에 있는 경기실크부지는 최초의 민간 잠업연구소로 당시 실크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 여주 경기실크부지 내부  여주에 있는 경기실크부지는 최초의 민간 잠업연구소로 당시 실크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 권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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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아카데미극장이든, 여주 경기실크 부지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최악의 상황을 견뎌내며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보다 나은 쪽으로 이끌었던 공간적 의미가 크다. 경기실크가 경제활동 공간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생산역할을 했다면, 아카데미극장은 허해진 감성을 충만하게 채워준 문화공간이었다. 그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을 오롯하게 견뎌낸 보람이 배인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장소인 것이다.

내 추억의 한 자락처럼 엄마의 손을 잡고 설레게 가던 곳이었고, 누군가는 영화를 보며 남몰래 배우의 꿈을 꾸기도 했을 것이다. 그중에는 그 꿈을 이룬 이도 있을 것이고 직접 영화를 만들겠다며 영화감독의 길로 나선 사람도 충분히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며 사랑을 싹틔우고 부부가 된 사람들도, 헤어진 첫 사랑처럼 달달했던 추억을 안고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61년간 아카데미극장을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과 울고 웃던 숨결과 감동의 박수들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원주의 정서와 문화로 켜켜이 쌓였을 것이다.

여주 경기실크 또한 마찬가지다. 질 좋은 비단을 생산하기 위해 밤낮으로 연구했던 연구원들과 그들의 연구 결과로 부농의 꿈을 이룬 잠업 농가들, 노동의 무게를 견디며 최고 품질의 비단을 생산했던 노동자들의 노고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숨은 공로자들이다. 경기실크는 비단 원단을 뽑아내는 누에고치처럼 잠업을 통해 농가소득을 올리고 지역 경제도 활성화 시킨 지역산업의 누에고치 같은 존재였다.
  
원주시가 시민들의 반대에도 건물 강행에 돌입했다. 60여 년 쌓아온 우너주의 영화역사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 원주아카데미극장 철거 강행  원주시가 시민들의 반대에도 건물 강행에 돌입했다. 60여 년 쌓아온 우너주의 영화역사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 원주아카데미극장 친구들과 범시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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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만든다는 것

낡았다고, 이제는 필요 없어졌다고 그냥 무너트리면 그만인 공간이 아니란 말이다. 두 곳 모두 헐어버리면 다시는 지나온 세월의 흔적을 묻혀 만들 수도 없고,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을 수도 없다. 그것을 외면하거나 정말 모른다면 지역을 이끌어가는 대표로서 자격이 없다. 그나마 원주아카데미극장은 '아카데미의 친구들'이란 시민모임이 주축이 돼 원주아카데미극장을 다시 시민들의 품으로 되돌리기 위해 다양하고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니 다행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따뜻해진다. 그 힘으로 삶을 더욱 여유롭게 펼치고 세상을 관조하는 능력도 지닌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말이다. 살아오면서 무너지고 넘어지고 일어났던 수많은 경험들은 세상을 이겨내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처방전이다. 나는 이런 부분들이 오래된 건축물에도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과 오롯이 함께 해왔던 공간들이 오래 됐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추억을 추억으로만 남기는 게 아니라, 추억을 즐기고 다시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는 공간이자 장소로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가는 역사가 아닐까. 그것이 오래된 미래의 가치를 찾는 일일 것이다.

추억을 꺼내기 좋은 가을이다. 나무들이 천천히 제 몸을 가다듬고 부지런히 겨우살이를 준비하는 가을. 제 몸의 수분들을 한 생 살아온 잎들에게 모아주고 마지막 찬란한 색으로 빛나게 하는 나무처럼, 떨어진 잎들이 뿌리로 떨어져 다시 나무의 몸속에서 양분이 되는 자연의 순리가 추억이라는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우리에게도 전해지는 가을이면 참 좋겠다.

* 원주 단관극장과 아카데미극장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면 아래 링크를 눌러주세요. https://bit.ly/아카데미극장알아보기
 
원주시 철거 강행을 규탄하고 극장 보존 원칙을 지켜 달라는 원주아카데미극장 친구들과 범시민연대
▲ 원주아카데미극장 친구들과 범시민연대  원주시 철거 강행을 규탄하고 극장 보존 원칙을 지켜 달라는 원주아카데미극장 친구들과 범시민연대
ⓒ 원주아카데미극장친구들과 범시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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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작가회의 회보 가을호에도 게재됐음을 밝힙니다.


태그:#원주아카데미극장, #근대문화건축물, #경기실크부지, #원주, #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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