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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베테랑의 몸> 표지
 책 <베테랑의 몸> 표지
ⓒ 한겨레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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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하루의 대부분을 '노동'으로 보낸다. 좋든 싫든,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노동에 쓰인다. 노동의 시간이 모여 일상이 되고 일상의 시간이 모여 인생이 된다. 우리는 노동의 시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을까.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기술이 숙련된 사람들이 있다. 베테랑, 달인, 고수라고 불리는 그들은 몸으로 자기 일을 말한다. 책 <베테랑의 몸>(한겨레출판)은 서로 다른 연령·성별·분야의 베테랑 12인의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몸은 일의 기억을 새기는 성실한 기록자이다. 이른 아침 작업장, 주방, 목욕탕, 출산실,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의 성실은 성실하게 몸에 새겨진다. 일하는 사람은 자신의 성실이 자신과 가족을 먹이고 입히고 살린다고 믿지만, 몸에 성실히 새겨진 노동의 기록은 대가를 요구한다." (12쪽)

저자 희정은 베테랑들의 작업 현장에서 그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았다. 그을린 피부, 갈라진 발바닥, 청력 낮은 귀 등 일하는 자세로 인해 변형된 몸을 직접 보고 기록한다. 그리고 그들이 베테랑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들려준다.

베테랑의 조건

<베테랑의 몸>은 몸의 쓰임에 따라 총 3장으로 나뉜다. 1부 '균형 잡는 몸'에서는 세공사, 어부 등 신체를 이용해 노동하는 직업군들에 대한 이야기다. 베테랑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연륜 있는 노동자의 모습이다. 2부 '관계 맺는 몸'은 일터에서 만난 대상을 세심하게 돌보는 직업군에 대해 다룬다. 3부 '말하는 몸'은 수어·연기 등 몸으로 표현하는 직업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신체는 하나의 장비이자 소통의 창구, 표현의 도구 등 여러 가지로 쓰인다.

책에는 조리사, 어부, 조산사, 안마사, 식자공 등 많은 사람이 살아온 삶과 다양한 사연들이 담겨 있다. 각기 다른 인생을 살아온 베테랑들의 공통점은 자기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생계나 흥미, 재능 등 업을 시작한 계기는 달랐지만, 일할 때만큼은 몰입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놨다.
   
<베테랑의 몸> 안마사 최금숙의 모습
 <베테랑의 몸> 안마사 최금숙의 모습
ⓒ 한겨레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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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베테랑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베테랑의 정의가 무엇인지 묻는다. 

조리사 하영숙은 "자존심을 지키며 일하는 사람"이라고 했고, 수어 통역사 장진석은 "준비를 열심히 하는 사람", 일러스트레이터 전포롱은 "내가 하는 일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생각보다 소박했지만 담담하게 말하는 정의에서 베테랑의 일에 대한 열정을 느껴졌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오던 베테랑들도 변해가는 세상을 막을 순 없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일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주얼리 작업장엔 망치로 금을 때려 모양을 잡던 노동자 대신 3D프린터가 놓였고, 고기잡이배에도 프로타(무선 어군 탐지기)가 등장했다. 

그들 역시 새로운 환경에 처하고 어려움을 겪었지만 묵직하게 또는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자신의 직업을 지켰다. 많은 동료가 떠나고 후배 양성이 힘든 상황에서도 자리를 지킨 이유는 종사하는 업에 대한 애정이 크기 때문이다.

"활판 공방은 일흔이 훌쩍 넘은 인쇄공과 아흔이 다 된 식자공, 두 사람이 지키고 있다. 돈 버는 재미에 다리가 굳는 것도 몰랐던 1급 식자공은 이제 '돈을 떠나서 참 재미있어요'라고 한다. 식자대 앞에 설 수 있는 시간이 고마울 뿐이다." (359쪽)

저자는 식자공 권용국의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기원을 품고 돌탑을 쌓는 것만 같았다'고 말한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돌탑처럼 베테랑들의 인생도 일과 함께 단단해져 완성돼 가고 있다.
 
<베테랑의 몸> 로프공 김영탁 씨의 모습
 <베테랑의 몸> 로프공 김영탁 씨의 모습
ⓒ 한겨레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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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기록노동자의 생생한 시선

저자 희정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싸우고 견뎌내는 일을 기록하는 기록노동자다. 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다룬 르포집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 성소수자 노동에 대해 다룬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싸우는 사람들과 그에 연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여기, 우리, 함께>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저항과 삶을 기록해 왔다.

희정은 <베테랑의 몸>을 통해서도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부조리를 짚고 있다.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최저임금을 받지 못했던 상황이나 경주마들이 은퇴 이후 안락사를 당하는 일 등 약자에 대한 사회 문제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책 중간중간에 보이는 베테랑들의 생생한 작업 현장 사진도 보는 재미를 더한다. 약 10년간 <프레시안> 기자로 활동한 최형락 사진작가는 2020년, 2023년 온빛사진상(사회의 생활상과 사건을 충실히 드러내는 다큐멘터리 사진상)을 수상했다. 현장을 찍은 사진들은 베테랑들의 직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저는 오랫동안 일하면서 좋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이 별것 아닌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베테랑을 꿈꾸거나 이미 베테랑이 되었다며 내 앞에 앉아 자신의 일을 설명해주던 사람들이 입 모아 하는 말이었다. 이곳에서 오래, 잘 일하고 싶다. 그들의 일터는 아름답지만은 앉았다. 검은 분진이 날리고, 폐에 가스가 차고, 자릿세를 내야 하고, 성희롱이 있고, 차별이 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평생 해온 일 자체가 사라지기도 했다. 그 곳에서 '좋은 숙련자'가 되기 위해 한 걸음씩 걸어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330쪽)

AI가 많은 일을 대체하는 시대가 왔다. AI의 몸에는 노동의 주름이 생기지 않는다. 사람들 대신 일한다고 해서, AI를 베테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저자가 찾은 베테랑들은 그저 일을 오래 해서 숙련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아끼고 사랑해 온 일, 그 일을 오래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사람들. 그들이 베테랑이다.

베테랑의 몸 - 일의 흔적까지 자신이 된 이들에 대하여

희정 (글), 최형락 (사진), 한겨레출판(2023)


태그:#베테랑의몸, #희정, #최형락, #노동, #베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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