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11 05:47최종 업데이트 24.01.12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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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 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7차 비상경제민생회의 겸 반도체 국가전략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9일 대통령실에서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네요. 미국 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현지 공장에 대한 미국산 반도체 장비 반입 규제를 사실상 무기한 유예했다죠.

지난해 10월 미국 상무부가 미국 기업이 중국 내 반도체 생산 기업에 반도체 장비를 수출하는 것을 사실상 금지하는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했었잖아요. 다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현지 공장에 대해선 1년간 유예를 해줘서 그동안 필요한 장비를 별도의 허가 없이도 구매가 가능했었죠. 벌써 1년이 됐으니 그 유예기간의 연장 여부에 대해 다들 관심이 많았는데 오늘 무기한 유예라고 하니 우리 기업들도 이제 한시름 놓게 생겼습니다.


해당 내용을 발표한 최상목 경제수석은 이번 결정이 "우리 반도체 기업의 최대 통상 현안이 일단락됐음을 의미한다"라며 "우리 반도체 기업의 중국 내 공장 운영과 투자 관련 불확실성이 크게 완화됐고 장기적으로 차분하게 글로벌 경영 전략을 모색할 수 있게 됐다"라고 했습니다. "굳건해진 한미동맹 기반 위에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 대응한 결과"란 말도 덧붙였네요.

삼성·SK 中공장에 미국산 반도체장비 공급 무기한 허용된다 - <연합뉴스>
中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 '유예…"반도체 업계 부담 덜었다" – <뉴시스>
中 반도체 리스크 끝?..."삼성 SK에 美 장비공급 허용" – <YTN>


대통령실의 발표를 보도하는 언론들의 기사 제목을 보면, 이번 규제 유예 발표로 인해 중국에 있는 우리 반도체 기업들에게 더 이상의 '리스크'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통령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번 결정을 통해 우리 반도체 기업의 최대 통상 현안이 일단락됐다고 생각하시냐는 말입니다. 만약 대통령님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정말 큰 일입니다. 중국 내 반도체 생산기업에 대한 장비 수출규제는 우리 반도체 기업들의 최대 통상 현안이 아니니까요. 대통령실에서 그렇게 발표하고 언론들이 그렇게 받아쓴다고 해도, 대통령님만큼은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반도체 장비 수출규제 유예, 이미 예견된 내용
 

5월 3일 파이낸셜타임스의 미국 반도체장비 수출규제 유예와 관련된 기사. 기사 본문에 이미 "검증된 최종 사용자 (VEU)" 인증을 제공하는 옵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파이낸셜타임스

 
일단 장비 수출규제 유예기간 연장 자체가 새로운 소식이 아닙니다. 벌써 5개월 전인 지난 5월 3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 정부가 국내 반도체 업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해 중국 공장으로 장비를 수출·반입할 수 있는 기간을 추가로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기사를 자세히 보면 연장을 위한 한 가지 옵션으로 두 한국 회사에 무제한의 "검증된 최종 사용자 (VEU)" 인증을 제공하는 게 있다고도 전했습니다. 다만 최첨단 노광장비는 수입을 할 수가 없다고도 했습니다. 이번 정부의 발표 내용과 완전히 동일한 내용입니다.

지난 5월부터 이미 우리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 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검색창에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 유예"로 검색을 한번 해 보세요. 외신도 그렇고, 수도 없이 많은 우리 언론 보도가 우리 기업에 대한 미국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는 유예될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반도체 업계의 최대 통상 현안은 반도체 장비 수출규제의 연장이 아니라, 지난 3월 미 상무부가 발표한 반도체법 가드레일 규정 초안에 포함된 5% 확장 금지 조항이었습니다.
 

연합뉴스는 지난 6월 13일 기사에서 "한국 기업에 대해선 수출 통제 유예를 당분간 연장한다는 방침을 확인했다"고 보도했습니다. ⓒ 연합뉴스

 
반도체법 가드레일 규정의 독소조항, 5% 확장 금지

미국 상무부의 초안 발표 후 6개월이 흐른 뒤 지난 9월 22일, 미국 상무부는 반도체법(CHIPS and Science Act) 가드레일 규정을 최종 발표했습니다. 가드레일 규정의 두 가지 핵심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반도체법 자금 수혜자가 해외 우려 대상 국가에서 반도체 제조 능력을 확장하는 것을 10년 동안 금지한다." 둘째, "수혜자가 우려 대상 외국 기관과의 특정 공동 연구나 기술 라이센싱하는 것을 제한한다." 지난 기사에서 설명해 드린 것처럼 중국에 있는 우리 반도체 기업들이 생산능력도 못 늘리고, 중국 업체와 기술교류도 못 하게 된 겁니다. 

가드레일 규정은 못 바꿨어도 장비 수출규제 유예를 얻어냈으니 그것만 해도 큰 성과 아니냐고요? 장비 수입에 아무런 규제가 없으니 "공장 운영과 투자 관련 불확실성이 크게 완화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이번 발표로 인해 중국에 있는 우리 반도체 기업들에게 딱히 달라진 건 없습니다.

반도체 장비를 구매하는 이유는 뭘까요? 당연히 더 많은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장비를 사는 건 얼마든지 허용하지만, 그 장비로 인해 생산량이 5% 이상 늘어나는 건 규제를 하겠다고 하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이번 수출규제 유예 조치로 인해 우리 기업들이 얻을 수 있는 혜택이란 기존 반도체 공장에서 운영하고 있는 기존 장비의 대체 수요만 채울 수 있게 된 겁니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반도체 장비를 많이 생산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있는 우리 기업들이 기존 장비의 대체 수요가 있을 때 미국 장비를 사지 못하는 규제가 있다면 대체품으로 한국 반도체 장비를 사게 될 겁니다. 미국은 그걸 우려해서 이번에 중국에 있는 우리 기업에 대한 미국 반도체 장비의 수출규제를 유예한 겁니다. 우리 기업 좋으라고 한 결정이 아니라 미국 반도체 장비 기업의 이익을 위해 한 조치란 뜻입니다.

굳건한 한미동맹을 통해 이뤄낸 성과라면 장비 사느라 돈만 쓰고 정작 생산량은 늘이지도 못하는 이런 규제 대신, 5%로 묶어 버린 확장 제한을 10% 이상으로 늘렸어야 합니다. 중국에 있는 우리 반도체 팹(반도체 부품 공장)들이 미국으로부터 구입한 장비로 대체 수요만 채우며 현상유지만 하는 동안 미국과 싱가포르에 팹이 있는 마이크론은 기술개발과 생산성 향상으로 우리 기업들을 추월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미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기도 합니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3년 1분기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지난 4분기(45.2%)보다 3%포인트 감소한 43.2%였고, SK하이닉스는 3.7% 감소한 23.9%였습니다. 반면 미국 마이크론의 점유율은 5.1%가 상승한 28.2%로 SK하이닉스를 제치고 2위로 올라섰습니다. SK하이닉스가 마이크론에 뒤처지는 것은 SK하이닉스 중국 공장 화재의 여파가 있었던 2013년 4분기 이후 1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미국 정부 당국은 '칩스 포 아메리카 (Chips for America)', 즉 미국 반도체 산업을 위한 반도체법을 만들고 꼼꼼하게 미국 반도체 산업을 위한 규제와 정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그 규제와 정책이 과연 우리에게도 진정 유리한 건지에 대해 제대로 파악도 하지 못하고 대충 한미동맹의 성과라는 말로 포장해서 내놓고만 있는 실정입니다. 미국에 좋은 것이 곧 우리에게도 좋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

이번 미국의 조치가 우리에게 무슨 대단한 성과라도 되는 양 발표하고 보도하고 있지만, 실제 중국에 있는 우리 반도체 기업들의 부담과 리스크는 아직 그대로입니다. 대통령님이라도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봐야 합니다. 지난해 8월 이후 14개월 연속 반도체 수출 역성장이라는 최악의 성적표가 지금 우리 반도체 산업의 현실입니다. 미국으로부터 반도체 장비는 살 수 있지만 그걸로 우리 반도체 팹의 생산성을 높이지는 못하게 된 이 고약한 규제부터 풀어야 합니다. 반도체 업계가 대통령님께 내는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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