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27 11:57최종 업데이트 24.01.12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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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상무부가 발표한 반도체법 가드레일 규정을 설명하는 산업부의 보도자료 ⓒ 산업통상자원부


오늘은 산업통상자원부(산자부)의 반도체 관련 보도자료 하나를 대통령님에게 설명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22일 미국 상무부는 반도체법(CHIPS and Science Act) 가드레일 규정을 최종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를 산자부가 받아서 "미국 상무부, 「반도체법」 가드레일 규정 최종 발표"라는 제목의 보도참고자료를 배포했습니다.

대통령님 역시 산자부로부터 보고를 받았을 거라 생각되지만, 산자부가 설명하는 대로 받아들였다면 이 가드레일 규정이 우리 반도체 기업들에게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되어 다시 한번 설명을 하는 겁니다.

산자부는 보도참고자료에서 미국의 가드레일 규정을 "우리 기업의 중국 내 설비 유지 부분‧확장 및 기술 업그레이드 허용"이라고 요약했습니다. 바로 아래에는 눈에 띄도록 번호까지 매겨가며 "❶기술 업그레이드 허용, ❷업계의견 반영하여 안보 우려 없는 경영활동 보장"이라고 강조하고 이렇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우리 정부는 '22. 8월 반도체법 발효 직후부터 "가드레일 조항 세부 규정"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미국 측과 긴밀한 협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기존 세부 규정 초안에서도 우리 기업이 중국에서 운영하는 생산설비의 유지 및 부분적 확장을 보장하였고 기술 상향조정(업그레이드)도 지속 허용할 것으로 판단되었으며, 관련 내용은 최종안에도 포함되었다.

이것만 보면 중국 시안에서 낸드플래시를 생산하고 있는 삼성전자나 중국 우시와 다롄에서 D램과 낸드플래시를 생산하고 있는 SK하이닉스가 기존 설비의 유지는 물론이고 설비 확장 및 기술 업그레이드에 아무 문제가 없게 됐다고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산자부는 이 모든 게 미국과의 긴밀한 협의의 결과라고 발표했습니다.
   
사실 확인을 위해 미국 상무부 산하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의 해당 발표 내용을 찾아보니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미국 상무부는 오늘 초당적인 '반도체법'의 국가 안보 가드레일 최종 규정을 발표했다. 해당 규정의 두 가지 핵심 조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반도체법 자금 수혜자가 해외 우려 대상 국가에서 반도체 제조 능력 확장하는 것을 10년 동안 금지한다. 둘째, 수혜자가 우려 대상 외국 기관과의 특정 공동 연구나 기술 라이센싱하는 것을 제한한다.

두 가지가 핵심 조항이라면서 첫 번째는 "금지"이고 두 번째는 "제한"이라고 설명합니다. "허용"과 "보장"이 핵심이라던 우리 산자부의 보도참고자료와는 정반대입니다.

손발 묶인 삼성과 SK하이닉스
 

미국 상무부 산하 표준기술연구소(NIST)의 반도체법 가드레일 발표 내용 ⓒ NIST 홈페이지


미국 상무부 발표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이른바 "확장 가드레일"이라고 해서 미국 반도체법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향후 10년 동안 중국에 있는 반도체 제조 설비에 대한 투자가 제한되는 데 구체적으로 보면 첨단 반도체의 경우 5% 이상, 이전 세대의 범용 반도체는 10% 이상 확장이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해당 의무를 위반하면 반도체법에 의해 제공된 인센티브 전액을 회수하겠다고 합니다.

10%까지 확장 가능한 범용 반도체는 기술 수준이 떨어지는 이전 세대의 반도체들입니다. 로직반도체의 경우 28나노 공정 및 그 이전 세대,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디램은 18나노미터(숫자가 적을수록 첨단제품), 낸드플래시는 128단(단수가 높을수록 첨단제품) 이전 공정의 반도체가 그 대상입니다.


그런데 삼성은 현재 중국 시안에서 128단, SK하이닉스는 10나노대 후반의 D램과 144단 낸드플래시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미국 상무부가 판단하기에 "국가안보에 중요한 반도체", "핀펫(FinFET), 게이트올어라운드펫(GAAFET) 등의 구조를 사용한 반도체", "3D적층 패키징을 활용한 반도체" 등은 범용 반도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국에 있는 우리 반도체 기업은 미국이 보장해 준 10% 혜택은 못 받고, 5% 제한에 걸리게 되는 겁니다.

두 번째는 "기술 가드레일"이라고 해서 미국의 보조금을 받는 반도체 기업이 미국 정부의 제재 명단에 포함된 기업, 즉 중국 정부가 소유 또는 통제하는 기업과 국가안보 우려를 높일 수 있는 기술‧품목에 대한 공동 연구 및 기술 라이센싱에 참여하는 걸 제한하겠다는 겁니다. 중국내 반도체 생산시설을 늘이지도 못하고 중국과 관련 있는 기업과의 기술 개발도 하지 못하게 한 겁니다.

이 두가지 제한을 걸어 중국 내 반도체 공장이 있는 삼성과 SK하이닉스의 손발을 묶어 버렸는데 산자부는 "허용"과 "보장"을 이야기한 겁니다.

우리의 요구대로 미국으로부터 보장 및 허용받은 게 워낙 없다 보니 산자부는 보도자료에서 "생산능력 측정기준(웨이퍼 투입량)을 월 단위가 아닌 연 단위로 변경"한 거라든지, 이미 "구축 중인 설비를 상무부 협의 시 가드레일 제한의 예외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걸 큰 변화인양 발표했습니다. 쪽박은 깨졌지만 밥 주걱에 붙은 밥알은 남아 있다며 안도하는 격입니다.

"5% 초과 확장시 투자 금액 제한(기존 10만 달러 기준)을 기업과의 협약을 통해 정하도록 변경하였다"는 내용에서는 실소가 나왔습니다. 우리 기업들이 중국에 세운 반도체 팹에서 사용하는 장비 한 대 가격이 얼만 줄 아십니까? 최소 대당 1000만 달러이고 EUV 장비는 2억 달러가 넘습니다. 애초 발표된 10만 달러로는 정기적으로 교체해야 하는 부품값도 안 돼서 처음부터 말도 안 되던 항목이었습니다. 이걸 금액을 없애고 미 상무부와의 협약 대상으로 남긴 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정부와 대통령은 무엇을 했나
 

지난 4월 26일(현지시간)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한미정상 공동 기자회견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있다. ⓒ 연합뉴스


미 상무부는 이번 최종안이 지난 3월 발표한 내용에 대해 국내외 반도체 업계, 학계, 노동단체, 무역협회 등의 대표를 포함한 이해관계자들의 제안을 검토하고 반영해 확정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우리 반도체 기업들은 불리한 내용을 바꾸기 위해 많은 의견을 내놓고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첨단 반도체의 5% 확장 제한을 최소한 10%로 확대해 달라는 우리 기업들의 핵심 요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산자부는 지엽적인 내용만 부풀려 이번 가드레일 규정이 우리 반도체 산업에 별 영향이 없는 듯, 마치 우리 정부가 뭔가 많이 성취해 낸 듯 홍보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업들이 왜 5% 확장 제한을 최소한 10%로 확대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 주길 기대한 줄 아십니까? 반도체 팹에서는 공장을 확장하거나 장비를 더 투입하는 것 말고도 공정 조건 개선이나 기존의 장비를 개조하는 것만으로도 생산량을 늘일 수 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 이후 현금 유동성 부족으로 존폐 직전까지 갔던 하이닉스가 사내 공정개선 운동인 '블루칩 프로젝트'라는 걸 한 적이 있습니다. 대규모의 장비 투자 대신 기존에 사용하던 장비에 최소한의 투자만으로 공정을 개선해서 생산성을 크게 높인 이 프로젝트는 지금의 SK하이닉스를 만든 초석이 되었습니다. 우리 기업들이 잘하는 게 바로 이런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 기업들이 시설이나 장비에 투자해 공정개선을 이루고 그로 인해 생산량이 늘어나면 제재를 받게 됐습니다. 일상적으로 해 오던 기술 개발과 개선 작업도 행여 생산성 향상을 통한 확장 효과를 불러올까 움츠러들게 생겼습니다. "확장 규모 제한 범위 내에서의 기술 업그레이드 및 기존설비 유지를 위한 장비 교체 허용"을 산자부에서는 '허용'으로 읽었지만, 반도체 업체들은 확장 규모 제한범위 이상 '금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번에 발표된 미국 상무부의 가드레일 규정의 제목을 보면 '칩스 포 아메리카 (Chips for America)', 즉 미국 반도체 산업을 위한 규정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미국 반도체 산업을 위한 규정을 만드는 과정에서 중국에 반도체 팹을 운영하고 있고, 중국을 가장 큰 반도체 고객으로 두고 있는 우리 기업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생겼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대통령님은 미국 대통령과 여러 번 만나는 동안 반도체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했습니까? 그리고 또 어떤 걸 받아냈습니까? 지난 3월 초안 발표 이후 6개월이나 우리 기업의 이익을 위해 협상할 시간이 있었는데 이번 상무부의 발표 내용에서는 도무지 대통령님의 역할을 찾아볼 수 없어서 묻는 겁니다.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 '반도체 전도사' 등의 호칭은 말로 주장하는 게 아니라 실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한때 우리나라 수출의 20% 이상을 차지하던 반도체가 대통령님 취임 이후 11%에서 16% 사이를 맴돌고 있습니다. 이번 미 상무부의 가드레일 발표로 인해 우리 반도체 산업이 얼마나 더 추락하게 될지 걱정됩니다. 반도체의 몰락은 곧 우리나라 산업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 자격을 의심하는 국민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걸 기억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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