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4 11:44최종 업데이트 23.10.04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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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민 주일 한국대사가 3일 주일본 한국대사관 주최로 도쿄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국 국경일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배상의 제3자 변제를 밀어부치는 과정에서 자주 언급한 것이 1998년 10월 8일의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다. 윤 정권은 정식 명칭이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인 이 문건이 체결됐을 때가 한일관계가 가장 좋았을 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시절로 되돌리기 위해 강제징용 문제를 그렇게 처리하는 듯 행동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선언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지난 9월 1일 제31차 한일포럼 공동성명에도 그런 제안이 있었다.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일본국제교류센터 주최로 양국 정부 및 의회 관계자와 경제인·학자·언론인·예술인·정치인 60명이 참여한 이 포럼의 공동성명은 금년을 "기념할 만한 해"로 평가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본 포럼의 참가자들은 이 기념할 만한 해를 맞이하여 한일관계 개선의 흐름을 공고히 하고, 국제질서의 거대한 전환기의 새로운 한일관계를 위한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2.0'을 발표해야 한다는 점에 의견을 함께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9월 27일에는 강제징용 문제에 관한 윤 정부의 입장을 대변해온 윤덕민 주일대사가 지지통신 계열인 내외정세조사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공동선언 업그레이드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새로운 양국의 미래를 향한 선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했다.

이 말은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5주년인 올해에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새로운 공동선언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청중의 발언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즉흥적 대답의 형식을 띠었지만, 꽤 구체적인 내용들이 이 답변에서 나왔다.

윤 대사는 새로운 공동선언 안에 투자 및 무역환경 개선이나 기후변화 대응 같은 내용을 담을 수 있다고도 했고, 공동선언을 대체할 새로운 선언을 금년이나 내년 혹은 내후년에 할 수 있다고도 했다. 또한, 사견을 전제로 독일과 프랑스가 체결한 1963년 엘리제 조약을 새로운 선언의 모델로 삼을 수 있다고도 말했다.

그는 개천절인 3일에도 도쿄에서 이 문제를 재차 부각시켰다. 가미카와 요코 신임 외무대신이 축사자로 참석한 한국 국경일 행사에서 오는 8일이 공동선언 25주년임을 상기시키면서 "한일관계를 양국 국민들이 피부로 체감할 수 있고 지역과 국제사회에 기여하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업그레이드해 나가야 한다"고 발언한 것으로 보도됐다.

윤석열 정부, 김대중 아닌 박정희 정신으로 한일관계 봉합

윤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에 착수할 때부터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내세웠다. 하지만 실상은 이 선언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선언은 식민지배에 관한 배상 문제는 다루지 않았지만,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는 표현을 통해 일본이 잘못을 범했음을 분명히 표시했다. 윤 정권은 이런 사과를 받아내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지 않았다. 배상은 물론이고 사과 한마디도 관철시키지 못했다.

배상은 차치하고 반성과 사과도 없이 식민지배 문제를 봉합하는 것은 김대중 방식이 아니라 박정희 방식이다. 1965년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부속협정)은 그런 식으로 체결됐다. 김대중 정신에 입각해 한일관계를 처리하는 것처럼 공언해 놓고, 실상은 박정희 정신으로 한일관계를 봉합했던 것이다.

윤 정권 입장에서 볼 때, 한일협정으로 국민적 저항을 초래한 박정희를 내세워 강제징용을 봉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 카드를 꺼내 들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을 좋아하는 국민 상당수 혹은 대다수가 강제징용 제3자 변제를 반대하므로, 상대 진영을 교란시킬 생각으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내세웠다고 해석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옳지 않은 일에 김대중의 이름을 악용한 윤 정권이 김대중의 이름을 한 번 더 더럽힐 의중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공동선언 업그레이드 운운이다. 윤 정권이 말하는 공동선언 2.0은 1998년 선언을 계승하는 것이기보다는, 이와 전혀 무관한 것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형식적으로는 2.0이니 업그레이드판이니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무관할 것을 김대중 이름을 내세워 관철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은 <김대중 자서전> 제2권에서 "흔히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1965년 체제'라고 한다면 나와 오부치 총리가 합의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이후의 한일관계는 '1998년 체제'라고 해야 마땅하다는 이들이 있다"는 말로 공동선언에 대한 만족감을 표했다. 배상이 결여된 불완전한 공동선언임을 그가 몰랐을 리 없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의 혼란 속에서 그 정도라도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판단에서 그렇게 자평했을 수 있다.

윤 정권이 말하는 공동선언 2.0이니 업그레이드판이니 하는 것은 실상은 김대중이 말한 바로 그 '1998년 체제'를 깨트리는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판단의 근거는 비교적 충분하다. 지난 1년 반 동안의 상황만 놓고 봐도, 윤 정권이 실제로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점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일본의 운신을 제약하는 요소들을 많이 담고 있다. 공동선언 제3항은 일본이 전적으로 수비에 주력하는 전수방위원칙을 견지하는 것을 김대중 대통령이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작년 12월 16일 기시다 내각이 사실상의 선제타격능력인 반격능력을 천명해 전수방위원칙을 실질적으로 훼손한 것과 배치되는 대목이다.

공동선언 업그레이드 맞나?

제5항은 "양국 정상은 양국이 각각 미국과의 안전보장체제를 견지하는 동시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다자간 대화 노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라고 알려준다. 군사동맹을 한미 및 미일의 투 트랙으로 유지한다는 이 문구는 한미·미일에 이어 한일의 준동맹까지 사실상 이뤄진 지금의 현실과 괴리를 보인다.

제7항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4자회담의 순조로운 진전이 바람직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말하는 4자는 남북한과 미국·중국이다. '재팬 패싱'을 떠올리게 하는 이 문구가 기시다 내각을 만족시킬 리는 없다.

공동선언은 일본의 팽창에 제약을 줄 뿐 아니라 대북관계 측면에서도 지금의 한·미·일 3국에 걸림돌이 된다. 선언 제7항은 "오부치 총리대신은 확고한 안보체제를 유지하면서 화해와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한 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화해와 협력의 기조하에 대북정책을 추진한다는 이 선언을 윤 정부의 통일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명약관화하다.

이 외에도 공동선언은 윤석열·바이든·기시다 정권을 불쾌하게 할 만한 요소들을 담고 있다. 제8항은 국제경제체제를 개방형으로 유지할 것을 천명했다. 중국을 배제하는 공급망 구축에 힘쓰는 바이든 행정부를 힘 빠지게 하는 발언이다. 제8항은 세계무역기구(WTO)를 더욱 활성화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세계무역기구(WTO) 무대에서 중국에 뒤지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대목이다.

이처럼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은 식민지배 문제뿐 아니라 기본적인 세계관에서도 지금의 한·미·일 3국과 전혀 맞지 않는다. 이런데도 윤 정권에서 공동선언 업그레이드에 관한 말들이 나오고 있다.

위 조문들에서도 나타나듯이 공동선언 당시 김대중은 윤석열 정권을 기분 좋게 할 만한 말들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공동선언 2.0이라는 말이 윤 정권에서 나오고 있으니, 정말로 2.0이 맞나 정말로 업그레이드가 맞나 하는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정권은 제3자 변제를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김대중의 이름을 악용해 '재미'를 봤다. 김대중 지지층을 교란시켜 반발 여론을 최소화하는 데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2023년을 "기념할 만한 해"로 만드는 과정에서 김대중의 이름을 적지 않게 더럽혔다.

그런 윤 정권이 지금은 업그레이드를 운운하며 김대중의 이름을 한 번 더 이용하려 하고 있다. 윤 정권하에서 김대중의 이름이 거듭거듭 더럽혀질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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