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21 11:36최종 업데이트 23.09.2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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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는 '하필이면'이란 말을 자주 떠올리게 만든다. 이런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하필이면, 일본 자위대와 군사훈련을 벌이고, 하필이면 그 훈련을 독도 인근에서도 벌이고, 하필이면 시마네현 다케시마의 날인 2월 22일에도 벌일 때가 있다.

윤 정부는 일본 전범기업들의 강제징용(노동자 강제동원) 배상책임을 한국이 떠안는 방안을 못박기 위해 공개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행사를 하필이면 금년 1월 12일 개최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조 바이든 대통령을 만나 한일관계 성과를 보여줘야 할 미일정상회담 하루 전날이었다.


'하필이면'을 떠올리게 하는 사례들은 한국 국익을 최우선 순위에 두지 않는 한국 정권의 모순을 드러낸다. 외국에 끌려 다니며 그 이익을 우선시하다 보니 한국 국민들의 금기를 배려하지 못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존 F. 케네디재단(JFK재단)이 수여하는 2023년 '용기 있는 사람들 상(Profile in Courage Award)'을 수상하는 것도 '하필이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상이 수여되는 날이 10월 29일이기 때문이 아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 등과 공동 수상하기 때문도 아니다. 하필이면 케네디재단이 주는 상이기에 그렇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간) 인도 뉴델리의 정상회의장인 바라트 만다팜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대통령실은 19일자 보도자료에서 "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화해라는 힘겨운 일을 하고 있으며, 용기가 필요한 시기에 민주주의를 위한 헌신을 보여주었다"는 게 케네디재단의 선정 이유라며 "동 상은 JFK재단이 1990년부터 매년 정치적으로 용기 있는 리더십을 발휘한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저서인 <용기 있는 사람들>에서 이름을 따온 상"이라고 소개했다.

윤 대통령 본인은 19일 X(트위터)에 "기시다 총리와 함께 2023년 '용기 있는 사람들 상'에 선정되어 대단히 영광스럽다"며 "한일관계의 지속적인 개선과 보다 긴밀한 한미일 협력이 인도태평양과 그 너머의 자유·평화 및 번영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썼다.

위 보도자료와 수상 소감은 케네디재단 상을 받게 된 것이 세계 평화에 대한 기여 때문이라는 인식을 드러낸다. 케네디 전 대통령이 추구한 세계평화가 한일관계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를 간과한 글들이다. 1960년대 초반으로 돌아가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이번 수상을 보며 '하필이면'이란 말을 떠올릴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1960년대 초반 무슨 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국 대통령들은 전임자들과 달리 적극적인 세계전략을 펼쳤다. 그중에서도 특히 적극적인 인물이 JFK였다. 세계전략가인 헨리 키신저 전 국무부장관도 이 점을 인정했다.

지난 5월 27일 만 100세가 된 그는 7년 전에 한국어로 번역된 <헨리 키신저의 세계질서>에서 "전후(戰後) 12명의 대통령은 모두 세계에서 미국의 각별한 역할을 열정적으로 주장했다" "양당 출신의 모든 대통령들은 미국의 원칙을 세계에 적용할 수 있다고 선언해왔다"고 한 뒤 이렇게 썼다. 괄호 속은 번역문 그대로다.
 
그 선언들 중에서도 (결코 독특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유창하게 선언된 경우는 1961년 1월 20일의 존 F. 케네디 대통령 취임 연설일 것이다. 케네디는 자신의 국가를 향해 '자유를 지키고 키워 나가기 위해 어떠한 대가도 치르고 어떠한 짐도 지고 어떠한 두려움에도 맞서고 우방을 지지하고 적에게 대항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위협을 구분하지도 않았고, 미국의 개입에서 최우선 사항이 무엇인지도 정하지 않았다.
 
케네디가 다소 무모한 듯 보이는 세계전략을 천명한 배경에는 미국 국내의 위기감이 크게 작용했다. 1950년대 중후반부터 유럽 경제의 대미 의존도가 낮아지고 아시아·아프리카 신생국들이 미국·소련과의 비동맹 노선을 표방하며 제3세계 그룹으로 뭉쳐 나갔다.

거기다가 미국의 자긍심을 건드리는 물체가 라이벌 소련에서 지구 밖으로 발사됐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이 1957년 10월 4일 미국이 아닌 소련에서 발사된 일은 미국 사회에 상실감을 확산시켰다. 2011년에 <미국사 연구> 제33권에 실린 김정배 신라대 연구교수의 논문 '케네디 행정부의 중국정책 그리고 냉전체제'에 이런 대목이 있다.
 
패기와 열정의 상징인 케네디와 그의 행정부의 등장은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 이후 널리 퍼진 미국인의 상실감을 상쇄하고 미국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변화와 지도력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
 
케네디는 동맹관계를 강화해 미국의 힘과 활력을 보여주고자 일부 동맹국들에게 극진한 호의를 베풀었다. 위 논문은 "미국은 독일과 일본을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 회복과 발전을 위한 금융과 원자재의 공급을 보장하고 외부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해 주어야 했다"는 말로 일본 등에 대한 케네디 행정부의 우대 정책을 설명했다.

케네디는 아시아·아프리카의 제3세계 국가들에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한국은 형식적으로는 제3세계가 아닌 미국 진영에 속해 있었지만, 얼마 전까지 식민지배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제3세계와 동질성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제3세계에 대한 케네디의 전략은 한국인들의 이해관계와도 맞닿았다. 위 논문은 이렇게 지적한다.
 
케네디 행정부가 대외정책의 초점을 주로 제3세계로 돌린 것은 1960년대 상황에서 그 지역의 민족해방운동과 탈식민지주의가 미국의 세계 지배를 어렵게 하는 주요 요인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제3세계가 식민지 잔재에서 탈피해 고유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것은 미국의 세계전략에 지장이 됐다. 그런 탈식민 노력은 민족주의를 확산시키고, 민족주의는 미국의 세계지배 이념을 저해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케네디는 탈식민과 민족주의를 억압하는 노선을 지향했다. 그런 지향이 반영된 사례 중 하나가 한일관계였다. 한국은 제3세계 국가가 아니었는데도, 케네디 세계전략의 피해자가 됐다.

지금처럼 그 당시에도 북·중·러의 위기 의식이 고조되면서 이들이 뭉치는 양상이 나타났다. 케네디 취임 6개월 뒤이자 5·16 쿠데타 직후인 그해 7월 6일에는 북한과 소련이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닷새 뒤에는 북한과 중국이 군사동맹을 맺었다.

케네디는 이런 상황을 활용해 한·미·일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한일관계에 적극 개입했다. 1951년에 시작돼 결실 없이 장기화되던 한일회담 국면에 끼어들어 이를 한일협정 국면으로 바꾼 인물이 바로 그였다.
 

케네디 박정희 한미정상회담 장면(1961. 11. 14.). ⓒ 국가기록원

 
대일굴욕외교의 숨은 주역, 케네디

1996년 9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 '한일협정, 케네디가 지시'는 "1960년대 초 한일협정의 조기 체결을 서두른 장본인은 당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었음이 최근 비밀 해제된 미 정부의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났다"며 그 이틀 전에 발간된 국무부 발행물인 <미국의 외교관계, 1961~63년, 제22권 동북아 편>에 이런 대목이 있다고 보도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62년 4월 한국 정부의 반대로 한일협정 체결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협상을 빨리 타결지어야겠다고 결심하고 국무부로 하여금 협상 촉진안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한일협정은 역사문제를 경제문제와 뒤섞는 그랜드바겐 방식으로 체결됐다. 이 같은 일괄타결 방식은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반성·배상 없이 경제협력 제공 및 일본 기업 진출의 방식으로 국교정상화를 매듭짓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와 더불어, 무상 3억 달러 제공으로 식민지배 채권채무관계를 처리하는 어이없는 결과도 낳았다. 2014년에 <일본 비평> 제10호에 실린 국제지역학자 조아라의 '한일회담 과정에서의 미국의 역할: 케네디 정권기 청구권 교섭을 중심으로'는 이렇게 설명한다.
 
특히 케네디 정권은 한·일 양국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상호 이익을 보여주고 청구권 관련 금액의 액수를 줄이는 데에도 깊이 관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청구권 문제에 관한 김종필과 오히라의 일괄 합의가 이루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한일협정이 체결된 1965년은 강제징용 제3자 변제가 선언된 2023년과 더불어 대일 굴욕외교가 가장 강했던 시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때도 대일 굴욕외교의 배후에 미국 행정부가 있었다.

미국은 동맹국들을 한데 모아 자국의 힘을 전 세계에 투사한다는 목표하에 한일관계의 특수성을 무시한 채 무조건적 화해를 촉구했다. 이로 인해 미국은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 이 책임의 상당 부분은 케네디에게 있었다. 케네디는 대일 굴욕외교의 숨은 주역이었다.
 

윤석열 대통령. ⓒ 연합뉴스

 
이달 29일 윤 대통령이 받게 될 상은 하필이면 케네디의 유지를 계승하는 상이다. 케네디가 말한 세계평화를 위해 '용기'를 발휘하고 한일관계를 잘 정리했다고 받게 되는 상이다. 윤 대통령이 이런 상을 받는 것은 한국 정부가 한국의 이익이 아닌 미국과 일본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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