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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미학미술사학과를 전공하고 미술학과 석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우리 역사 기록을 읽고 기록화 하는 과정(광주의 누정, 광주의 금석문, 광주의 옛지명, 광주의 수령들)에서 그림과 관련된 기록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림과 관련된 역사 기록을 정리함으로써 우리 문화의 콘텐츠화 가능성을 열어보고자 합니다.[편집자말]
한국화, 일본화, 중국화 등 동양화를 배우는 초보자들은 다른 그림을 보고 베끼는 연습을 오랫동안 한다. 붓으로 먹을 치고 채색을 하는 연습 과정이 꽤 오래 걸린다. 최소한 10년은 지나야 어디 전시장에 '부끄럽게' 작품을 걸 수 있을 정도이다.

다른 그림은 '화첩'이라고 말하는 유명한 화가의 그림책에 실려 있거나, 화실에 나가 스승이 그려주는 것을 받은 그림 등이다. 이런 그림을 오랫동안 그리다 보면 대부분 스승의 화퐁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때 베끼는 그림을 '화본(畵本)'이라고 말한다. 화본의 종류는 여러 가지이다. 다른 화가의 그림책, 그림 그리기 적합한 사진, 스승이 그려준 모범이 되는 그림 초안 등이다.

국어사전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데 쓰는 바탕이 되는 종이나 감, 그리고 어떠한 사람의 얼굴과 똑같게 그린 그림'이라 했다. 즉 화본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에서는 사전적 의미보다 가장 많이 쓰이는 의미인 원본이 되는 '샘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그림을 배우는 사람은 처음엔 바로 화본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비슷하게 베껴 그릴 줄 아는 공력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그리는 실력이 늘다 보면 야외에 나가 자연 풍광을 보고 자연을 모방하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쯤 되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화본'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태조 1년(1392) 10월 28일 기록에 나온다.

"태종이 세자 시절에 함길도 동북면에서 돌아와 여러 능의 산세를 그린 화본을 바쳤다[今殿下來獻諸陵山勢畫本]"

이 기록에 따른 여러 능은 실제 왕릉이 아니라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부친과 조부, 증조부, 고조부와 그 부인들의 능을 말한다. 이 화본은 태종이 세자 시절에 조상들의 묘가 있는 정확한 위치를 그려 태조 이성계에게 바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태종이 당시에 직접 그렸는지, 화공에게 시켜 그렸는지는 글로만 봐서는 알 수 없다.

이어 화본이 등장한 것은 세종 7년(1425) 5월 3일이다.

"지난번 성절표(聖節表)에 절할 때에 보니, 표통의 그림이 뜻과 같지 아니하므로 특별히 화공에게 명하여 고쳐 그려서 내려보내는 것이니, 이후로는 진헌(進獻)하는 다래와 표통은 이 양식대로 그리게 하라."

세종이 화공에게 명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진상할 다래(韂)와 표통(表筒)을 고쳐 그리게 하고, 이에 필요한 화본을 공조로 내려보낸다는 내용이다. 원래 취지를 살린 화본을 보내니 다시 베껴 그리라는 것이다.

세종은 왕자 시절부터 거문고와 그림에 꽤 정통했었다고 한다. 다래나 표통까지 틀린 부분을 찾아 다시 그리라고 할 정도로 다방면에 예술역량이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가장 유명한 위작사건으로 관직을 얻기 위해 어필을 위작한 그림을 조정에 바치는 일도 있었다. 사진은 채널A에서 방영된 '천일야사' 중 '선조의 대나무를 찾아라'의 한 장면.
▲ 벼슬을 얻기 위해 어필 그림 위작까지 조선시대에 가장 유명한 위작사건으로 관직을 얻기 위해 어필을 위작한 그림을 조정에 바치는 일도 있었다. 사진은 채널A에서 방영된 '천일야사' 중 '선조의 대나무를 찾아라'의 한 장면.
ⓒ 채널A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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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모조품을 화본으로 속였던 것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현종 8년(1667) 10월 16일 옛 임금들의 어필을 찾아 조정에 바치면 새로운 직급을 제수받거나 한 자급을 올려받는 일이 거론되었다.

이런 정보를 들은 지방의 한 관리가 더 높은 관직을 받으려고 속임수를 썼다. 선조의 부마였던 박미의 후손들이 선조의 대나무 병풍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한 선비가 이를 빌려 집에 쳐놓고 자랑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 관리는 이 선비 집에 찾아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선조의 병풍을 잠시 가져오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선조의 대나무 그림을 화가에게 그대로 모사하게 한 다음 오래된 것처럼 색을 물들여 모사품을 빌려왔던 선비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물론 진품 화본은 조정에 바쳤다. 그는 조정을 상대로 잔꾀가 아니라 사기를 친 셈이다. 이렇게 해서 관직을 받은 이는 완평 부수가 된 홍(洪)가이다. 결국 이 사건이 들통나 홍가의 직첩을 거두고 잡아 가두어 신문하는 일이 있었다.

결국 그는 관직도 빼앗기고 곤장도 맞기도 했지만 이처럼 위작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궁중 수장고가 소실되면서다. 왕실이 소장했던 역대 왕들의 어필이 줄어들자 민간에 산재한 어필을 모아 궁중 수장고를 채우기로 한 데서 발단했던 것이다.

Copies of paintings, which were important for diplomatic relations, flood of fake images

A design is a pattern that serves as an original for drawing. Beginners develop their skills by practicing looking at and copying hwa-bon.
Historically, hwa-bons appear several times in th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Taejong and Sejong painted them or had paintings drawn from them.
Paintings were also sometimes used as tools in counterfeiting cases. During the reign of King Hyunjong, an official made a copy of an ancestral folding screen and offered it to the court.
 

덧붙이는 글 | - 외국인에게도 도움이 되도록 영문요약본을 글의 말미에 싣는다.


태그:#화본, #위작, #묵죽도, #서양 그림,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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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무등일보에서 경제부장, 문화부장, 정치부장, 논설위원을 지냈다. 시민의소리에서 편집국장도 했다. 늘 글쓰기를 좋아해서 글을 안쓰면 손가락이 떨 정도다. 지금은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원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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