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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1919~1921년 제작. 일제는 유관순 열사의 순국을 감춰야했다. 이 카드는 출옥칸에 1921년 1월 2일이 적혀 있으나, 유관순 열사는 3년형을 받았으므로, 1922년 3월 31일 이후에 출소해야 한다. 유관순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옥사하며, 1921년 1월 2일은 옥중 고문 사건이 종료된 시점을 말한다.
▲ 유관순 카드 서대문형무소, 1919~1921년 제작. 일제는 유관순 열사의 순국을 감춰야했다. 이 카드는 출옥칸에 1921년 1월 2일이 적혀 있으나, 유관순 열사는 3년형을 받았으므로, 1922년 3월 31일 이후에 출소해야 한다. 유관순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옥사하며, 1921년 1월 2일은 옥중 고문 사건이 종료된 시점을 말한다.
ⓒ 이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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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柳寬順, 1902~1920) 열사의 항일 전쟁이 조작된 이야기라고 말하는 정신이 나간 자가 있는 것 같다. 그들의 논지는 유관순 열사는 처참한 고문을 당한 바가 없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유관순 열사 자체가 해방 후에 미군정에서 친일파에 의하여 조작된 이야기라는 것이다. 경악(驚愕)을 금치 못할 망언(妄言)이다.

유관순 열사를 부정한다는 것은 친일파를 넘어서 일본 극우의 사고(思考)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일본 극우는 일제의 조선 식민지 통치는 정당한 통치였다고 주장하며, 무자비한 탄압이나 학살은 없었다고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참회가 없는 일본 극우에게 유관순의 존재는 구체적인 고문과 학살의 증거가 된다. 그래서 일본 극우는 유관순의 존재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관순의 고문과 학살은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에서의 학살에 버금간다.

유관순 가족 관련 문건

필자는 유관순 관련 자료를 찾아 나섰다. 1919년 7월 9일 조선총독부의 충청남도 장관 구와바라 하치시(桑原八司, 4대 충청남도 장관 ; 1918년 9월 23일 ~ 1919년 9월 26일)가 조선총독부의 내무부 장관 우사미 가쓰오(宇佐美勝夫)에게 보고한 비밀 보고서가 남아있다.

모두 13면(6.5장)으로 된 '1919년 소요사건에 관한 도장관 보고철(大正八年 騷擾事件ニ關スル道長官報告綴)' 7책의 '내7'에 들어있는 '地方民心ノ傾向ニ關スル件'이라는 문건이다. 문서번호는 "忠南騷秘第441號 ; 朝鮮總督府 內秘補 1370"이다.

이 비밀 문건의 발신일은 1919년 7월 9일이고 접수일은 7월 12일인데, 이 문건에는 충청남도 장관인과 조선총독부 접수인(타원형), 공람한 부서의 문자인(文子印)과 부서장의 원형인(圓形印) 등등이 찍혀 있다. 그 인장을 보면 이 비밀 문건을 열람한 자는 조선총독과 내무부장관, 정무총감, 경무총장, 총무국장, 학무국장, 총무과장, 제1과장, 제2과장, 주임 등 10인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열람했다는 것은 조선총독부가 이 사건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알게 해 준다. 더군다나 이 문서의 첫머리에는 이 문서를 동경으로 송부할 시는 총독의 결재가 필요하다(東京送付總督決裁ヲ要ス)는 사각인까지 찍혀 있다. 문건의 본문은 아래와 같다.
 
"忠南騷秘第441號 (사각인)
大正8年7月9日
忠淸南道長官 (사각인 ; 충청남도장관지인)
內務部長官 殿

地方民心ノ傾向ニ關スル件
騷擾鎭靜後ノ狀況ニ就テハ屢次及通報置候處最近ニ於ケル地方民心ノ傾向ニ三御參考トシテ左記及御通報候也

一, 天安郡東面龍頭里柳寬順ノ一家ハ騷擾罪及保安法違反トシテ處分セラレ一家殆ト全滅ノ悲境ニ陷リタルカ六月十六日同人ノ祖父柳潤基七十五年病死セリ然ニ柳ノ一族ハ基督信者ト然ラサルモノトノ二派ニ別レ一ハ基督式ニ埋葬スルト主張シ一ハ朝鮮式ニ行フヘシト主張シ紛擾ノ未遂ニ朝鮮式ニ依リ埋葬スルコトトナレリ當時彼等ノ言動ナリト云フヲ聞クニ基督敎派曰ク柳潤基ハ生前ニ於テ基督ヲ信敎シ居タルヲ以テ同敎ニ依リ埋葬スルハ死人ニ對スル禮儀ナリ殊ニ將來朝鮮ハ全道基督敎トナルヲ以テ朝鮮式ハ廢スヘキナリト又不信者曰ク柳ノ一家ハ基督敎ヲ信シタルカ爲今回ノ騷擾ニ加ハリ一家全滅ノ悲境ニ陷リタリ之レ皆基督敎ノ致ス處ニシテ我等ハ該敎ノ敵ナリト主張シ爭論シタル由ナルカ基督信者ノ內ニハ今尙朝鮮獨立ヲ夢ミ全道基督敎トナラハ其ノ時ハ死者ヲ改葬スヘシト迄稱シ居レリ
(이하는 연기군 금남면 박산리 김봉기 부분, 이하 생략) 
 
'1919년 소요사건에 관한 도장관 보고철(大正八年 騷擾事件ニ關スル道長官報告綴)' 7책의 ‘내7’., '地方民心ノ傾向ニ關スル件'. 문서번호 “忠南騷秘第441號 ; 朝鮮總督府 內秘補 1370”.
▲ 유관순 가족 조선총독부 문건 '1919년 소요사건에 관한 도장관 보고철(大正八年 騷擾事件ニ關スル道長官報告綴)' 7책의 ‘내7’., '地方民心ノ傾向ニ關スル件'. 문서번호 “忠南騷秘第441號 ; 朝鮮總督府 內秘補 1370”.
ⓒ 이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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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가족 관련 문건의 의미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나,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순국하였다. 1919년 유관순 열사의 연보를 살펴봄으로써 이 보고서가 작성된 7월 9일과 공람 된 시점을 판단해 보자.
 
1919년
- 3월 1일. 서울 기미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다.
- 3월 5일. 남대문 역에서 학생단 가두시위 운동에 참여한다.
-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주도. 시위 중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된다. 이날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는 일본 헌병들이 쏜 총에 맞아 피살되었고, 집은 불탔다. 그리고 당시 공주 검사국에서 영명학교(永明學校)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끌려온 오빠 유우석(柳愚錫)이 잡혀 있었다.
-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실형 선고 받은 후 항소한다.
-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 선고받다.

1920년
- 3월 1일.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며 독립만세운동 전개한다.
- 9월 28일,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옥사한다.

즉, 이 비밀 문건이 충청남도에서 작성되던 7월 9일부터 조선총독부에 접수한 12일, 이후의 공람 되던 시기에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 비밀 문건은 일본 헌병에 의하여 피살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는 물론이고 가족이 전멸하다시피 한 것을 지목하고 있는데, 유관순이 해방후 미군정과 친일을 했던 일부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가공된 인물이라는 일부의 주장이 성립하기나 하겠는가?

일본 극우의 사고가 아니라면 그런 발상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왜? 대한민국이 이렇게 참담한 꼴이 되었는가?

유관순 열사의 옥중 투쟁은 역사적 사실이다. 서대문형무소에 들어서면 나의 눈앞에는 독립운동가들의 그러한 처절한 투쟁이 그려진다.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에게 서대문감옥은 또 하나의 전쟁터였고, 그들의 투쟁은 항일 전투였다. 그 항일 전투에서 가장 맹렬(猛烈)하게 싸운 소녀 유관순을 일본제국은 죽여야 했고, 그의 항거를 끝끝내 철저히 감춰야 했다.

맹렬한 항일 전사(戰士)에게 감옥은 형기(刑期)를 채우는 곳이 아니었다. 항거는 정당했기에 싸운 것이다. 아무런 무기 없이 무방비 상태에서의 맹렬한 항거(抗拒), 서대문형무소에 들어설 때 그들 항일 전사들의 처참한 울부짖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태그:#유관순,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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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서운동가, 서지학 및 회화사학 연구가, 고서수집가. 고려미술연구소 대표, (재)리준만국평화재단 설립자. - 2022~3년에 <통일뉴스>에 [국혼의 재발견]을 34회, [문화 제주-문화 Korea]를 52회 연재하였고, 현재는 [신 잡동산이]를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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