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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8일 '그날이오면' 홈커밍데이에 함께 한 사람들
 7월 28일 '그날이오면' 홈커밍데이에 함께 한 사람들
ⓒ 그날이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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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일 오후 3시 16분]

지난 7월 28일 저녁, 서울대 앞 녹두거리 옛 한남운수 종점 근처 한 건물에 삼십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

경영난으로 서림동(구 신림2동) 골목길로 밀려났던 서울대 앞 유일한 인문사회과학서점 '그날이오면'이 1988년 설립 당시의 공간으로 돌아와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30여 년 세월을 돌아보다

이날 서점을 메운 이들의 면모는 다채로웠다. 20대 초반의 학부생부터 중국에서 온 유학생, 35년 서점 역사를 지켜봐왔던 동네 주민, 대학시절 서점의 기억을 간직한 초로의 남녀, 백발이 성성한 은퇴한 교수, 노동현장에서 프레스를 함께 다뤘던 오랜 인연들까지, 이들이 시간에 쫓긴 사회자의 제지를 무시하고 구성지게 풀어놓는 '그날이오면'과의 인연은 그 자체로 서점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30년이 넘도록 서점을 책임져온 '책임일꾼' 김동운 사장이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순서였다. 
 
'그날이오면' 서점의 과거와 현재를 말하는 김동운 대표
 '그날이오면' 서점의 과거와 현재를 말하는 김동운 대표
ⓒ 최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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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몸을 던졌던 청년 유정희·김동운 부부는 1990년대에 신림동에 정착해 '그날이오면'을 인수해 인문사회과학서점 운영을 시작했다. 연세대의 '오늘의책', 고려대의 '장백서원', 성균관대의 '풀무질' 등 대학가 인문사회과학서점들은 민주화 전후의 학생운동과 더불어 성장했다. 

김동운은 당시 서울대 앞 인문사회과학 서점들이 이른바 NL과 PD 정파로 나뉘어 다른 생각을 담은 서적들을 다루지 않고 서로 교류하지 않음에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그날'을 생각을 구분짓지 않은 너른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작은 차이에 집착하지 않고 큰 뜻에 목표를 두어 함께 하고자 한 태도가 오랜 풍파를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였다고 김동운은 평가했다. 

1996년에 큰 사건이 있었다. 불온서적을 다룬다며 국가보안법 혐의로 서점이 압수수색을 당하고 유정희·김동운 부부가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된 것이다. 서울대 학생들 400여 명이 대공분실과 서점 앞에서 항의와 응원의 뜻으로 집회를 열었다. 김동운은 풀려났으나 유정희는 구속되어 징역을 살았다. 이 때 김동운은 결코 여기를 떠나지 않고 학생들과 함께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김동운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활동에 지금도 꾸준히 앞장서고 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서점의 경영이 크게 어려워졌다. 학생운동은 퇴조하고, 인문사회과학서적의 수요가 줄었다. 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했지만 어려움은 해소되지 않아 2017년에는 임대료가 낮은 길 건너 골목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강연회, 저자와의 대화, 심야책방 등 학생사회와 지역사회와의 교류는 꾸준히 지속했다. 그리고 2023년 7월, 드디어 서점이 태어났던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됐다.

서점 안쪽에는 '그날이오면'이라 쓴 서예 액자가 걸려 있다. 2006년 고 신영복이 '그날' 주최의 강연을 수락하며 희사한 것이라 했다. 신영복은 '그날이오면'의 가치를 두 단어로 표현했다. '씨 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석과불식(碩果不食), 그리고 잎사귀를 떨구어 거름으로 삼는다'는 엽락분본(葉落糞本)이다. 눈앞의 쓸모보다는 미래를 예비하며 몸을 다해 사회의 양식을 일구는 자세, 김동운이 말하는 '그날' 정신이다.  
 
신영복의 '그날이오면' 글씨를 담은 책갈피
 신영복의 '그날이오면' 글씨를 담은 책갈피
ⓒ 그날이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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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바위 위에 우뚝 선 등대

내가 '그날'과 처음 만난 것은 20년 전이다. 신입생 시절, 선배가 책을 사준다고 해서 이곳을 방문했다. 참고서와 자기계발서가 서가를 메우던 보통의 서점과는 다른 이채로운 기세에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분필로 칠판에 정자로 곱게 쓴 신간 소개, 노동/경제/맑스주의/통일/인권 등 저세상에서나 볼 법한 책 분류들, 그리고 영리의 의지보다는 기개를 내보이려는 듯했던 '그날이오면'이라는 이름까지 모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학생운동의 끝물에서 관악구에서의 여럿 투쟁에 함께 하며 '책임일꾼' 부부와 인연을 맺었다. 서점 후원회 운영위원으로서 강연과 서평대회와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동명의 학회도 만들기도 했다.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으나 동시에 실패도 아니었다. 나를 비롯해 '그날'은 많은 이들의 삶에 여러 방식으로 흔적을 남겼다.

수많은 이들이 시대는 거스를 수 없다고 말한다. 대체로는 옳으나 한편으로는 그르다. 달라진 시대의 면모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궁구하며 과거에 귀중했던 무언가를 변용해서라도 현세에 전하려는 안간힘이 때로는 시류에 부합해 정처없이 떠내려가는 이들보다도 청명한 빛을 발하기도 한다. 

'그날이오면' 서점은 학생운동의 몰락, 인문사회과학의 위기, 동네서점의 어려움이라는 몰아치는 파고 속에서도 단단한 바위 위에 우뚝한 등대로 남아 외로이 빛나는 지성들을 연결하고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길을 안내해 왔다. 누가 그 가치를 고루하다며 외면할 수 있겠는가. 견결한 고집의 역사에 찬사를, 그리고 출발한 원점에서부터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길에 축원을 보낸다.  
  
'그날이오면' 홈커밍데이
 '그날이오면' 홈커밍데이
ⓒ 최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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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오면' 홈커밍데이
 '그날이오면' 홈커밍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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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짐과 소회를 이야기하는 김동운 대표
 다짐과 소회를 이야기하는 김동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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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공연을 하는 서울대 사범대 노래패 '길'
 축하공연을 하는 서울대 사범대 노래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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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골패'의 몸짓 공연
 서울대 '골패'의 몸짓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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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자리로 돌아온 '그날이오면' 서점 전경
 원래 자리로 돌아온 '그날이오면' 서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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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그날이오면, #인문사회과학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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