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26 20:07최종 업데이트 23.07.2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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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세워진 이승만·트루먼 동상. 오는 27일 예정인 제막식을 앞두고 천으로 덮어놓았다. ⓒ 조정훈

 
한국전쟁 휴전 70주년인 27일,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 고위급 대표단을 초청해 한국전쟁 전승절을 기념한다. 이날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는 이승만 동상과 더불어 해리 트루먼 동상이 함께 제막된다.

한국전쟁 역사관인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백선엽 동상이 제막된 지난 5일, 경상북도청 보도자료는 "경북은 앞으로도 영웅을 기억하고 최선을 다해 모시고, 새로운 나라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고 만드는 데 앞장서겠다"라는 이철우 도지사의 발언을 전했다. 그러면서 "오는 27일에는 독지가가 건의해 3년 만에 건립되는 이승만과 해리 트루먼 대통령 동상 제막식이 다부동에서 열려 오랜 숙원이 해결된다"고 예고했다.


백선엽 동상이 제막된 데 이어 이승만·트루먼 동상까지 제막되면, 한국전쟁 당시의 한국 대통령 및 육군총참모장과 더불어 당시 미국 대통령의 흔적까지 한곳에 다 모이게 된다. 한국전쟁 기억을 중심으로 초창기 냉전체제를 복원하려는 윤석열 정부의 국가전략에 부합하는 장면이다.

트루먼 대통령 동상이 의미하는 것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열린사회희망연대를 비롯한 단체들은 지난 25일 창원마산 3.15의거기념탑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승만-트루먼 동상 반대"를 외쳤다. ⓒ 윤성효


이승만 동상만 세워지는 게 아니라, 트루먼 대통령(재임 1945~1953)의 동상까지 함께 세워지는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 트루먼은 1947년 3월 12일 세계 냉전의 이념적 기초가 될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그는 전범국인 일본을 용서하고 1948년 1월 6일 육군장관 로이얄의 성명을 통해 일본을 미국의 동맹국으로 격상시켰다. 한국의 이승만 및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총리와 제휴한 그는 일본제국주의의 부조리를 청산하기보다는 한국과 일본을 자국을 위한 반공기지로 만드는 데 주력했다. 

그런 트루먼의 동상을 이승만의 동상과 나란히 세우는 것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중국에 맞서 한국과 미국이 단결한 냉전 초기의 국제적 성격을 부각시키는 조치다. 이는 한국이 대결해야 할 대상이 북한 하나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발산하는 일이다. 북·중·러와의 대결을 명분으로 한·미·일 동맹을 합리화하는 윤석열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에 부응할 만한 것이다.

경상북도 보도자료에는 동상 건립에 대한 "독지가"의 기여도만 언급됐지만, 2021년 이후의 언론 보도들에 따르면 2017년경부터 이 아이디어를 추진한 그룹은 '이승만·트루먼 동상 건립 추진모임'이다.

2019년 9월 강의 도중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에 비유한 류석춘 당시 연세대 교수, 2017년 10월 방송문화진흥회 국정감사장에서 "문재인 대통령께서 평소 소신대로 했으면 적화되는 길을 갔을 것"이라는 수구적 발언을 내놓은 고영주 당시 방문진 이사장과 더불어, 극우 언론인인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등이 추진모임 멤버로 보도됐다.

동상 건립이 추진된 시기는 촛불혁명 기간과 맞물린다. 2016년 연말 이래의 촛불집회에 대한 극우 진영의 맞불집회에서 미군 개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극우 진영의 간절한 염원이 이승만·트루먼 동상의 건립과 연결됐다고 볼 수 있다.

보도에 따르면, 2017년에 동상 건립을 끝낸 추진모임은 용산 전쟁기념관이나 평택 주한미군사령부 경내에 두 동상을 설치하는 방안을 모색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승만+트루먼' 조합으로 인해 안보보다는 냉전 이념이 과도하게 부각되는 이런 이벤트가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았다.

이것이 주한미군 경내에 설치되면, 주한미군이 한국 국민들이나 진보 진영의 표적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게 된다. 미군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갈 곳을 찾지 못하던 두 동상은 경상북도청의 협조 약속이 있은 2021년으로부터 3년째인 지난 6월 16일 새벽 칠곡군 다부동에 기습적으로 설치되고, 뒤이어 휴전협정 70주년을 맞아 제막식을 맞이하게 됐다.

백선엽의 국립묘지 안장 기록에서 친일 이력을 삭제한 지난 24일, 국가보훈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친일 이력을 표시하는 것은 유족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등의 이유로 삭제를 정당화했다. 현충원 홈페이지에 친일 이력을 표시하는 과정에서 "유족의 명예훼손 등 여지가 있음에도 관련 유족의 의견을 청취하지 않았고"라고 언급했다.

보도에 따르면, 백선엽의 장녀인 백남희씨는 아버지의 동상이 들어설 다부동전적기념관에 트루먼 동상이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트루먼 동상이 들어섬으로써 이곳이 안보보다는 이념대립의 장소로 부각될 것을 우려한 결과라고 보도됐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무시됐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을 안보가 아닌 이념대립의 공간으로 만드는 데 급급한 윤석열 정부의 지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한국이 싸워야 할 적이 늘어난다
 

G7 정상회의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21일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장인 그랜드프린스호텔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 앞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인사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지난 4월 24일 미국 국빈방문을 위해 출국한 윤 대통령 부부는 현지 시각 26일 한미정상회담과 백악관 만찬을 가진 뒤, 다음날인 27일 국무부 본관에 가서 오찬에 참석했다. 이 건물의 명칭이 해리 트루먼 빌딩이다. 이 자리에서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은 "한미동맹이 양국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토대로 오늘날까지 발전해 올 수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건물 명칭의 주인공이 미군을 파병해 준 사실을 상기시켰다.

한국전쟁 73주년인 지난 6월 25일, 윤 대통령은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한미동맹 70주년 특별전'에 참석해 인사말을 했다. 이날 그는 한국전쟁보다 한미동맹을 더 강조했다. "여러분, 올해는 한미동맹 70주년이 되는 해이고, 또 오늘은 6·25전쟁이 발발한 지 73년이 되는 날입니다"가 인사말 첫마디였다.

그는 "73년 전 오늘, 트루먼 미 대통령은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신속하게 참전을 결정하셨습니다"라며 미국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런 뒤 지금 한국이 해야 할 것이 대북 방어 그 이상임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6·25전쟁 후 한·미 양국은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동맹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은 성장과 번영을 일구었으며 자유·평화·번영의 인도·태평양 지역을 만들어 나가는 데 기여하는 글로벌 중추국가로 도약했습니다."

미국 행정부는 중국과 협력하던 시절에는 아시아·태평양이란 표현을 사용하다가, 중국과 대립하는 지금은 인도·태평양 표현을 쓰고 있다. 이 표현이 들어간 인도·태평양전략은 미국의 핵심 전략이 되어 있다.

인도·태평양전략은 중국 영토의 최서단과 가까운 인도양, 중국 영토의 최동단과 맞닿은 태평양의 양쪽에서 중국을 압박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을 자유롭고 평화롭고 번영되게 하겠다는 말은, 중국을 압박해야 이 지역의 자유·평화·번영이 가능하다는 미국 행정부의 인식을 반영한다.

윤 대통령은 한국전쟁 73주년을 기억하는 자리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파병을 언급한 뒤, 한국이 한미동맹하에서 인도태평양을 책임지는 글로벌 중추국가로 도약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전쟁의 상처를 되새기며 평화와 전쟁 방지의 필요성을 강조해야 할 자리에서, 중국을 압박해 자유·평화·번영을 만드는 세계 중추국가가 될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가 냉전의 상징적 인물인 트루먼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추론케 하는 대목이다.

국가보훈처 보도자료는 이승만-트루먼 동상이 세워지는 데 '독지가'의 역할이 컸음을 강조했지만, 두 동상이 다부동전적기념관에 배치되는 것은 이것이 윤석열 정부와 바이든 행정부의 세계전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 동상은 트루먼을 강조해 냉전체제를 부활시키려는 양국 정부의 의도에 맞게 활용되고 있다.

두 정부의 세계전략은 한국을 북한과의 대결에만 내모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소련과 중국을 겨냥해 세계 냉전 전략을 수립한 트루먼이 두 정부에 의해 강조되는 것은 한반도를 중국 및 러시아와의 대결로 내몰려는 기획과 무관치 않다. 경북 칠곡에 트루먼 동상이 세워지는 것은 한국이 싸워야 할 적의 숫자를 늘려가는 위험한 세계전략을 합리화하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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