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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참석차 리투아니아를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2일 빌뉴스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한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참석차 리투아니아를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2일 빌뉴스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한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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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일부터 4박 6일 일정으로 리투아니아·폴란드 순방에 나섰습니다. 먼저 10일부터 12일까지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한 뒤 12일부터 2박 3일 간 폴란드를 국빈 방문하고 돌아오는 일정입니다.

대통령실은 이번 순방의 3대 목표를 국제 안보 협력의 강화, 글로벌 공급망 협력 확대, 부산 엑스포 유치 외교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대통령실의 설명이고, 이번 순방과 관련한 국민의 관심은 온통 12일 낮(현지 시각) 리투아니아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에 쏠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온 국민의 최대 관심사, 한일 정상회담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문제

국내에서 서울-양평 고속도로 김건희 일가 특혜 의혹과 함께 양대 현안으로 떠오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처리 문제와 관련해, 윤 대통령이 당사국인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 총리에게 어떤 말을 할 것인지 매우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 80% 이상이 원전 오염수 방류에 불안감을 표시하고 있는데도 국내에서 이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부담됐는지 정부와 국민의힘 관계자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뒤로 빠져 있었습니다. 4일 일본에서 기시다 총리에게 후쿠시마 오염수 처리가 안전하다는 보고서를 전달한 뒤 우리나라를 방문(7일~9일)한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도 충분히 만날 시간이 있었는데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후쿠시마 오염수와 관련한 윤 대통령의 생각이 처음 드러날 기시다 총리와 회담이 기다려졌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대통령실이 내놓은 보도자료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30분 동안 열린 회담에서 후쿠시마 오염수와 관련해 세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계획대로 방류의 전 과정이 이행되는지에 대한 모니터링 정보를 공유할 것 ▲방류의 점검 과정에 우리 전문가도 참여하도록 해줄 것 ▲방사성 물질의 농도가 기준치를 초과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즉각 방류를 중단하고 우리 쪽에 그 사실을 바로 알려줄 것입니다.

윤 대통령의 세 가지 요구에 기시다 총리 묵묵부답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2일 리투아니아 빌뉴스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발언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2일 리투아니아 빌뉴스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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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요구는 사실상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용인하는 '방류허가서'를 발급해 준 것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세 가지 요구를 하기 전에, 이미 "원자력 안전 분야의 대표적 유엔 산하 국제기구인 국제원자력기구의 발표 내용을 존중한다"라고 전제한 데에서 속내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판이니 일본 정부도 윤 대통령의 요구에 전혀 긴장감을 가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일본 정부가 한일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형식과 내용에서 느긋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날 정상회담 결과를 대통령실 누리집에 잘 보이게 단독으로 올려놨지만, 일본은 '총리의 하루'를 알려주는 난에 여러 나라 정상과 회담한 일정을 종합해 올려놓은 뒤 한일정상회담 결과는 외무성 누리집으로 들어가 보도록 연결해놨습니다.

더구나 일본 정부의 회담 설명을 읽어 보면, 기시다 총리가 설명한 내용만 장황하게 나오고 윤 대통령의 요구는 내용도 없고 요구를 받아들인다거나 거부한다거나 하는 반응조차 없습니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 게시된 한일정상회담 관련 보도자료. 파란색 네모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 입장의 간접인용. 빨간색 네모는 기시다 총리의 입장.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 게시된 한일정상회담 관련 보도자료. 파란색 네모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 입장의 간접인용. 빨간색 네모는 기시다 총리의 입장.
ⓒ 일본 외무성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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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으로부터는 국제원자력기구 포괄보고서의 내용을 존중한다는 것을 포함해, 한국 정부의 입장 설명이 있었다. 양 정상은 당국 사이에 계속 긴밀히 의사소통해 가기로 했다."

이것이 일본이 전한 한국 쪽 얘기의 전부입니다. 그 앞에는 기시다 총리의 얘기가 길게 나옵니다.

"알프스(ALPS) 처리수에 관해, 기시다 총리가 지난 국제원자력기구의 포괄보고서에 관해 언급했다. 일본 총리로서 해양 방류의 안전성에 온 힘을 다하고 있고, 일본 및 한국 국민의 건강과 환경에 악영향을 주는 방류는 하지 않는다는 취지를 재차 설명했다.

또 해양 방류의 개시 뒤 국제원자력기구의 점검을 받으면서 일본이 실시하는 모니터링 정보를 투명성 높게 신속하게 공표하겠다. 만일 이 모니터링 결과 방사성 물질의 농도가 기준치를 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 계획대로 즉각 방류를 중단하는 것을 포함해 적절한 대응을 취하도록 준비하고 있다는 취지의 설명을 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양쪽 설명자료를 비교해 보면, 윤 대통령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요구한 것은 '방류 점검 과정에 우리나라 전문가를 참여시켜 달라는 것' 하나뿐입니다. 나머지 둘은 이미 일본이 스스로 하기로 한 조치입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윤 대통령의 요구에 가타부타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이런 경우 대답 회피는 거부를 뜻합니다. 우리나라 전문가의 참여가 전혀 일본의 방류에 걸림돌이 될 수 없는 '체면치레용'에 불과한데도 말입니다.

지렛대 없는 '솜방망이 외교'의 한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참석차 리투아니아를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12일 빌뉴스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며 기념촬영 장소로 향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참석차 리투아니아를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12일 빌뉴스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며 기념촬영 장소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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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와 관련한 윤 정권의 물렁물렁한 대응은 '외교의 실패'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대표 사례로 기록될 것입니다. '우는 사람에게 떡을 하나 더 준다'라는 말이 있듯이, 외교 협상에서도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 상대는 무시당하기 십상입니다.

예를 들어 홍콩이 최근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방류하면 일본산 수산물 수입을 금지하겠다는 방침을 흘리자, 일본 정부는 12일 부랴부랴 외무성의 담당 부장을 현지에 보내 만류에 나섰습니다. 그런데도 홍콩 당국은 이날 오염수를 방류하는 즉시 후쿠시마현과 도쿄도를 비롯한 10개 도·현의 수산물 수입을 금지하겠다고 공식 발표했고, 일본은 파장이 커질까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외교란 이런 것입니다. 상대를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가 없으면, 아니 지렛대를 사용하지 않으면 상대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윤 정권은 유독 일본에 너그럽게 대응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우리에게 오염수 방류의 직접 피해자라는 유리한 지렛대는 버리고 일본의 선의에만 기대는 '솜방망이 외교'를 했습니다. 반면, 국내의 노동·언론·교육 문제에 대해서는 무자비할 정도로 '쇠몽둥이'를 휘두르고 있습니다. '가짜 평화론'을 내세운 강경 대북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12일 열린 한일 정상회담의 후쿠시마 오염수 외교를 보면서 솜방망이와 쇠몽둥이의 사용처가 뒤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민 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태그:#한일 정상회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윤석열, #기시다 , #국제원자력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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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논설위원실장과 오사카총영사를 지낸 '기자 출신 외교관' '외교관 경험의 저널리스트'로 외교 및 국제 문제 평론가, 미디어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일관계를 비롯한 국제 이슈와 미디어 분야 외에도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다. 1인 독립 저널리스트를 자임하며 온라인 공간에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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