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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전 베이비박스·베이비룸을 운영하고 있는 주사랑공동체교회를 찾았다.
 11일 오전 베이비박스·베이비룸을 운영하고 있는 주사랑공동체교회를 찾았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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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위기임신(예기치 않은 임신, 준비하지 못한 출산)에 놓인 여성을 보호하지 못하나요. 왜 대문 앞에서 새파랗게 식어가는 아이를 지키지 못하나요. 왜 베이비박스만 그들을 품어야 하나요." (이종락 주사랑공동체교회 담임목사)

최근 '수원 냉장고 영아 시신 사건' 등 미등록 영유아 유기·살해 사건이 잇따라 알려지면서, 보건복지부는 미등록 출생 아동 2123명에 대한 전수조사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34명이 숨진 것으로 나타났고, 경찰 수사는 베이비박스로까지 확대됐다. 

지난 10일 오후 한 아기(생후 13일)가 또 베이비박스로 들어왔다. 현재 3월 14일, 4월 24일, 6월 26일, 7월 3일, 7월 10일 맡겨진 5명의 아기가 이곳에서 입양·보호시설 인계 또는 원가정 복귀를 기다리고 있다. 

베이비박스를 만든 이종락 목사는 경찰의 수사 지적하며 '베이비박스가 만들어진 이후 14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아이와 미혼모를 위한 국가의 충분한 지원체계가 없는 현실'을 꼬집었다.

그는 "왜 베이비박스만 사각지대의 아이들을 품어야 하냐"며 "법, 제도, 행정이 이들을 품지 못하고 외면해 온 잘못이 크다"고 말했다. 국가의 공백을 전국에 단 두 곳(서울 관악구, 경기 군포시)뿐인 민간 베이비박스가 메우고 있다는 게 이 목사의 설명이다.
 
11일 오전 베이비박스·베이비룸을 운영하고 있는 주사랑공동체교회 이종락 담임목사가 전날 맡겨진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11일 오전 베이비박스·베이비룸을 운영하고 있는 주사랑공동체교회 이종락 담임목사가 전날 맡겨진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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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박스는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주사랑공동체 위기영아긴급보호센터에 있다. 센터로 향하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산 능선에 든 좁은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미혼모·미혼부들이 아기를 두고 갈 수 있는 상자(베이비박스)와 방(베이비룸)이 하나씩 마련돼 있다. 갓 태어난 아이를 유기하거나 살해하지 말고 이곳에 놓아달라는 의미로 이 목사는 2009년과 2015년 베이비박스와 베이비룸을 만들었다.

2019년 12월부터 이곳을 거쳐 간 아이는 총 2098명이고 대부분 부모들은 편지를 남겼다. <오마이뉴스>가 11일 오전 센터를 방문해 확인한 20개 편지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미안해'와 '사랑해'였다. '법적으로 알아봐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네가 싫거나 미워서 보내는 게 아니야', '너를 포기할 수 없어서 여기까지 왔단다' 등의 메시지가 14년째 쌓여왔다. 

베이비박스를 만든 이 목사는 '베이비박스가 없는 세상'을 꿈꾼다고 했다. 출생신고 사각지대의 아이와 의도치 않게 임신한 여성의 출산과 양육을 정부가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목사의 주장은 최근 '출생통보제' 국회 통과 이후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보호출산제(익명출산제)' 법안에도 담겨 있다.

보호출산제 도입, 우려의 목소리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과 보호출산법시민연대 회원들이 지난 6월 27일 오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보호출산제 도입을 촉구했다.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과 보호출산법시민연대 회원들이 지난 6월 27일 오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보호출산제 도입을 촉구했다.
ⓒ 이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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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국회가 베이비박스의 대안으로 '보호출산제'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보호출산제는 산모가 신원을 노출하지 않고 의료기관에서 아이를 출산해 지자체에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지난달 30일 출생통보제(부모뿐만 아니라 의료기관·국가도 출생신고 의무화)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가운데, 정치권에서는 출생신고를 꺼리는 산모의 '병원 밖 출산'을 줄이기 위해 보호출산제를 함께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여야는 각각 비슷한 취지의 보호출산제 법안을 내놨다.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은 2020년 12월 '보호출산에 관한 특별법'을, 조오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21년 5월 '위기임산부 및 아동 보호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대표 발의했다. 최근 보건복지부는 전수조사에 이어 아동의 생명권을 보장하기 위한 보호출산제 도입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보호출산제 법안이 여성과 아동의 권리를 온전히 보장할 수 있을 것인지는 여전히 논란이다. ▲ 출생신고 후 아동의 입양을 전제로 하고 있어 양육 의지가 있어도 경제적 부담과 사회적 편견 탓에 양육을 포기하는 사례가 발생할 수 있고 ▲ 위기임신 여성의 출산·양육을 지원하는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아동청소년인권위원회 소속 신수경 변호사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보호출산제가 도입되면) 아이는 훗날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본인의 정체성과 뿌리를 찾을 권리가 심각하게 제한된다"며 "임신중지에 관한 입법 공백을 메우려는 노력 없이 아이를 익명으로 낳아 입양 보내는 것만으로는 여성의 선택권과 자기결정권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4월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왔음에도 임신 중단과 관련한 제도 정비가 되지 않아 사각지대가 있다. 낙태(임신중지)를 하거나 아이를 베이비박스에 보내는 문제에 대한 예방책을 먼저 이야기하면서 익명출산제(보호출산제)를 말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교회에 있는 베이비박스를 관계자가 소개하고 있다.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교회에 있는 베이비박스를 관계자가 소개하고 있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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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모 당사자들도 비슷한 우려를 표했다. 지난해부터 서울의 한 모자원에서 4살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미혼모 지아무개(35)씨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아이를 가졌을 때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입양을 고민했었는데,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맡기거나 자살하는 미혼모를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며 "열 달 동안 품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양육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보호출산제로) 아이가 바로 입양되거나 보호시설로 가서 떨어져 지내게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했다.

인천에 거주하는 미혼모 오아무개(34)씨도 "혼자 아이를 낳은 엄마로서 영아 유기·살해 사건을 볼 때마다 감정이입이 많이 된다"며 "보호출산제가 도입되면 엄마에 대한 기록이 증발해버릴 텐데, 이때 아이는 친모를 찾을 수 없고 친모는 영아 유기의 악순환을 반복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했다.

복지부는 지난달 27일 복지위 법안소위에서 '베이비박스 운영 기관'이 보호출산 상담 기관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부모의 양육 포기를 부추길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오자 '공공의료기관'을 통해 상담을 제공하기로 입장을 바꿨고 원가정 양육을 위한 상담을 먼저 거치도록 하는 새로운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보호출산제, 최후 수단이어야... 출산·양육 지원체계 선행"     
 
지난 5월 국회앞에서 열린 ‘보호출산제’ 논의 중단 요구 기자회견 한장면.
 지난 5월 국회앞에서 열린 ‘보호출산제’ 논의 중단 요구 기자회견 한장면.
ⓒ 보편적출생신고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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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출산제를 둘러싼 논의는 주로 아동과 여성 간 '권리의 충돌'로 이해된다. 마치 보호출산제를 도입하지 않으면 아동의 권리가 아닌 여성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식의 대립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여성계는 출산을 비밀에 부치고, 익명으로 아이를 낳고 직접 키우지 못하도록 하는 보호출산제가 아동과 여성 모두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사회안전망이 여성과 아동을 보호하려면 임신·출산·양육 지원체계의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 또한 미혼모단체들의 주장이다.

신수경 변호사는 "보호출산제는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최후의 수단으로 고려되어야 하며, 출생통보제를 정착시키고 임신중지 관련 후속 입법을 논의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2019년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베이비박스를 금지하고, 병원에서 익명으로 출산할 가능성을 허용하는 제도의 도입은 최후의 수단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한국 정부에 권고한 바 있다.

오영나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는 "임신기 여성에 대한 사회적 안전장치가 부재한 상태에서 국가가 미혼모에게 제공하는 임신·출산 관련 제도는 100만 원 상당의 국민행복카드 지원이 전부"라며 "민간의 위기임신 지원 및 상담체계를 포함해 모든 임신기 여성을 위한 공적 지원체계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민정 한국미혼모가족협회 대표는 "미혼모를 위한 초기 지원체계가 있었다면 정말 아이를 베이비박스로 데려갔겠나"라며 "친모가 결과적으로 아이를 분리시키고 포기하게 만드는 정책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면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베이비박스·베이비룸을 운영하고 있는 주사랑공동체교회는 11일 오전 현재 5명의 아기를 보호하고 있다.
 베이비박스·베이비룸을 운영하고 있는 주사랑공동체교회는 11일 오전 현재 5명의 아기를 보호하고 있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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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베이비박스, #주사랑공동체, #보호출산제, #익명출산제, #미혼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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