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06 11:02최종 업데이트 23.07.06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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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 연합뉴스


전범기업의 배상책임을 떠안는 제3자 변제를 선언한 윤석열 정부가 난관에 부딪혔다. 행정안전부 산하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이 개시한 법원 공탁 절차가 뜻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지난 3일 외교부는 제3자 변제를 거부하는 강제징용(강제동원) 원고 4명의 승소 판결금 및 지연이자를 공탁하는 절차를 개시했다. 피해자 측이 대법원 판결금을 수령하지 않거나 수령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법원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광주지방법원은 위 재단의 신청에 대해 공탁 불수리 결정을 내렸고, 외교부는 4일 "강한 유감을 표한다"며 "즉시 이의절차에 착수해 법원의 올바른 판단을 구할 것"이라는 입장문을 내놓았다.

다음날인 5일에는 전주지방법원이 불수리 결정을 내렸다. 보도에 따르면, 같은 날 수원지방법원도 "지난 4일자 공탁 신청 2건에 대해 모두 불수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외교부의 4일 자 입장문에서 예고된 이의신청도 이날 광주지법에서 기각됐다.

광주지법은 피해자 양금덕이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서류를 제출한 사실을 근거로 불수리 결정을 내렸다. "채무의 변제는 제삼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제삼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때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는 민법 제469조 제1항을 존중한 결정이다.

예체능 레슨을 해주기로 계약한 경우에, 채무의 성질상 제3자의 채무 이행이 가능한지가 헷갈릴 수 있다. 강사 개인의 특성이나 수강생과의 관계 등이 계약 체결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제3자가 대신 이행할 수 있는 채무인지가 고민될 수 있다.

이에 비해 당사자가 의사표시를 한 경우에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양금덕 할머니가 법원에 서류를 보내 의사를 표시했으니, 광주지법으로서는 제3자의 공탁 신청에 대해 불수리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수원지법도 동일한 이유에서 불수리 결정을 내렸다. 보도에 따르면 이 법원 관계자는 "공탁신청서에 첨부된 제3자 변제에 대한 피공탁자의 명백한 반대 의사 표시가 확인되므로 민법에 따라 제3자 변제 요건을 갖추지 못한다"라고 밝혔다.

전주지법이 불수리 결정을 내린 것은 재단이 법원의 보정 권고를 신속히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해자 박해옥이 세상을 떠났으니 상속인에 관한 소명자료를 제출하라는 권고를 기한 내에 이행하지 않은 결과다.

공탁 불수리 사태 자초한 윤석열 정부

윤석열 정부가 피해자들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제3자 변제에 착수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렇게 급하게 공탁 절차에 뛰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강제노동과 인권침해를 당하고도 80년 가까이 방치돼 온 피해자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면, 공탁을 서두르기보다는 피해자들의 처지를 살피는 데 좀 더 치중했을 것이다.

그런 신중함이 있었다면, 공탁 요건이 충족되는지도 충분히 살폈을 것이다. 제3자 변제에 대한 일부 피해자들의 거부 의사가 명확한데도 절차를 강행한 것이나, 상속인 소명자료를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지 않은 것은 윤 정부가 사안을 빨리 종결하는 데 급급했음을 보여준다.

역대 정부 중 법률을 가장 잘 아는 것이 윤석열 정부다. 법률 참모를 따로 두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윤 정부는 법률에 밝다. 야당과 협력하지 않으면 법률 제·개정이 힘든 여소야대 정국을 피해 가고자, 시행령을 교묘히 뜯어고쳐 실질적인 법률 개정의 효과도 거두고 있다.

그런 윤 정부가 공탁 신청에 필요한 준비 과정에 대해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불수리 결정이 4건이나 나온 것은 사안 종결을 서두르는 정부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상태로 한일관계가 봉합되면 한국보다는 일본이 좀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된다. 미국-일본-한국으로 서열화되는 삼각 구도가 정착되면, 군사뿐 아니라 경제 문제에서도 일본이 한국보다 유리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야 할 쪽은 윤 정부가 아니다. 그런데도 서두르는 모습을 보이다가 공탁 불수리 사태를 자초했다. 안 그래도 불리한 삼각 구도하에서 조급증마저 보이고 있으니, 한일관계로 인한 한국의 불이익이 '지금까지'보다 '지금부터' 더 심화될 것이라도 전망해도 무방하다.

1965년 굴욕외교의 조급증
 

굴욕외교라는 거센 비판 속에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회담 비준서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 자료사진


1965년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부속협정) 당시 박정희 정권도 무척 조급했다. 지금처럼 그때 역시 한·미·일 삼각 구도는 한국보다 일본에 더 많은 이익을 제공할 것이 확실했다. 실제로, 한일협정 이후에 일본은 경제뿐 아니라 외교에서도 한국을 아랫자리에 놓게 됐다.

한국보다 일본이 국교정상화 혜택을 더 많이 받을 게 확실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이 점을 협상 과정에서 활용하지 못했다. 오히려 '빨리빨리'를 주문하며 조급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일협정 27주년인 1992년 6월 22일 발행된 <동아일보>는 비밀 외교 문건들이 공개된 사실을 보도하면서, 일본이 아닌 한국이 서둘렀던 당시 정황을 소개한다. 이 기사는 "외형에 급급한 나머지" 조급증을 보인 박정희와 김종필의 협상 태도를 잘 보여준다.

"이 같은 대일 외교의 배경에는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김씨 등이 민정이양 이전에 교섭을 마무리짓겠다는 의도가 깔렸던 것으로 문서에 의해 드러났"다고 기사는 말한다.

군사정부는 민정 이양으로 정권을 잃을 가능성, 정권을 유지한다 해도 국회의 견제로 권력이 위축될 가능성 등을 염려했다. 이런 염려에 기인한 조급증이 대일 협상에 그대로 투영됐다. 같은 날짜 <동아일보>에 따르면, 1962년 8월에 시작된 배의환 주일대사와 스기 미치스케 한일회담 일본 수석대표의 협상에도 영향을 줬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대신이 협상한 결과로 1962년 11월 12일에 한일협정의 윤곽을 담은 김·오히라 메모가 나왔다. 배의환-스기 협상은 김·오히라 협상의 예비 절충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이때 배의환 대사는 지금의 윤 정권 관계자들처럼 일본의 성의 표시를 촉구했다. "(일본은) 최대한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라고 그는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급증을 드러냈다. "우리로서는 민정 이양이 가까워지면 사정이 복잡해지고 민정이양이 돼 국회가 생기면 더 시끄러워진다"라며 "되도록 빠른 것이 좋다"고 주문했다. 빨리 끝나게 해달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김종필의 협상에도 조급증이 나타났다는 점은 박정희가 김·오히라 협상에 급히 끼어든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대일 청구권은 물론이고 평화선 문제에서까지 김종필이 밀리게 되자, 박정희는 1962년 11월 8일 자 긴급훈령에서 "평화선에 관해 신축성을 보이는 데는 각계 의견을 조정하는 데 시일을 요함을 명심할 것"이라고 지시했다.

해상 경계나 독도 영유권이 관련된 평화선 문제와 관련해 국민적 양해를 얻어내려면 시일이 걸린다는 점을 명심하고 협상 속도를 조율하라는 훈령이었다. 박정희가 보기에도 김종필이 급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종필의 조급증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는 일본으로부터 받아올 금액에만 치중한 나머지, 그 명목이 배상금인지 청구권자금인지 경제협력자금인지 등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일본으로부터 얼마를 받아왔다'는 실적을 보여주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이는 일본 측이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주겠다'는 말을 계속 하도록 만드는 원인이 됐다. 위 기사는 "오히라 외상이 독립축하금 경제원조 등의 명목을 제시하는데도 명확한 반대 의사를 표시하지 않아 의혹을 남긴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1965년판 굴욕외교의 핵심 원인 중 하나인 조급증은 윤석열 정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상황을 대국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당장의 성과에 연연하며 일을 서두르고 있다. 이것이 한일관계와 한국의 국익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은 확실하다.

이런 조급증은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 역사교과서 문제, 독도 영유권, 문화재 반환, 사도광산 문제, 관동대지진 한국인 학살 문제,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 재일 코리안 처우 문제 등등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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