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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강사다. 강사이기 때문에 '교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불편해한다. 누가 나를 소개하면서 '교수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면 "아니에요, 강사예요"라고 정정한다.

학교 밖 공간에서 그런 호칭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을 때 올 후폭풍, 예를 들어 교수도 아니면서 교수인 척 한다, 교수라는데 정교수 맞냐 하는 반응을 쉽게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가 뭐라고, 호칭 때문에 내가 괜한 오해를 받아야 하는 게 달갑지 않다. 교수는 교수고 강사는 강사일 뿐이다. 

반면 강의실에서는 학생들이 나를 '교수님'이라고 부르든 '선생님'이라고 부르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 공간의 특성을 고려한 것이다. 학생들에게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고 대학에서는 가르치는 사람을 교수라고 통칭하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애써 정정할 생각은 없다.

학생들에게 내가 교수인지 강사인지 엄청나게 중요할까. 나는 교단에서 자신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물론 내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거나 학생들에게 신뢰를 잃었을 때 "그 사람 교수야? 강사야?"라는 호구조사식 발언이 뒤따를 수는 있겠지만 가르침과 배움의 현장에서 서로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한다면 직위가 큰 상관이 있을까. 
 
학생들에게 내가 교수인지 강사인지 엄청나게 중요할까?
 학생들에게 내가 교수인지 강사인지 엄청나게 중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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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날, 출강하는 학교에서 총학생회장 후보 공약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그 후보는 공약으로 학교 '정교수'와의 그룹 멘토링을 내걸었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아, 학생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구나. 나 혼자 상관 없었던 것이고 모두에겐 매우 상관 있는 일이구나. 내가 강사인지 교수인지 이렇게나 중요한 문제였구나.

우리는 여전히 신분제 사회에 살고 있다. 가끔 나를 하대하기 위해 '강사'라는 호칭을 골라 쓰는 사람들을 만난다. 일부러 그 호칭을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그 민낯과 마음 속 깊은 의도를 눈치채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특정 순간에 나를 강사라고 호명하면 내가 위축될 것이라고 기대하는데, 그 상황이 대체로 비슷해서 또 한번 웃음이 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정한 척 살지만 그만큼 위선적이다. 여러 호칭으로 불리며 존중과 하대를 다양하게 경험하는 내게는 그 위선이 더 가깝게 다가온다.

이런 생각 속에 살며 딱히 교수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내가, 최근 '초빙교수'라는 직위를 갖게 됐다. 사실 학교에 있는 사람들은 알지만 강사나 초빙교수나 크게 다를 바 없는 비슷한 처지다.

대학은 많은 교수자가 필요하다. 교수자를 고용하는 여러 방식과 여러 목적이 있다. 초빙교수는 강사보다 월급여가 조금 더 들어오고 국민건강보험 직장가입자가 된다. 이뿐이다. 오히려 언제 잘려도 이상하지 않은 위치다.

이제 다시 궁금하다. 사람들은 나를 뭐라고 부를까. 정교수는 아니고 강사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니까 이번에는 '초빙교수님'이라고 부르려나. 교수자는 말그대로 가르침을 잘 전달하면 되는 사람 아니던가.

이 세계에서 직위와 호칭, 그것이 무엇이고 왜 중요한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억울하면 정교수? 오케이! 패스! 나를 무어라 부르든 나는 내 일을 잘 수행하기로 한다. 내가 할 것은 여전히 그것뿐이다. 모든 것은 다 허울이다.

태그:#대학강사, #대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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