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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하다보니 늦은 나이에 철도 노동자가 됐다. 철도에서 필요로 하는 자격증이나 면허가 없었던 나는 사무영업 분야를 지원해 역무원이 되었고, 이전에는 전혀 생각조차 없었던 서울의 1호선 한 전철역에서 역무원 생활을 하고 있다.

감정노동자에 속하는 역무원 생활을 하다보면 가끔씩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열차 안에서 대변을 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말도 안 되는 것들로 항의하는 악성 민원인들 그리고 그날 마지막 열차가 끝나고 가끔씩 출몰(?)하는 난폭한 취객들로 골머리를 앓곤 한다.
 
10년 안에 364개의 철도스탬프를 모두 찍는다는 목표로 현재 한 달 평균 서너 개 역을 방문하고 있다.
▲ 철드스탬프 목록 10년 안에 364개의 철도스탬프를 모두 찍는다는 목표로 현재 한 달 평균 서너 개 역을 방문하고 있다.
ⓒ 신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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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역무실에서 보관하고 있는 철도스탬프를 요청해 가져온 종이에 찍어가는 이른바 '철도덕후'(줄여서 '철덕'이라 부른다)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니, 지난 1999년 철도청 시절에 '한국철도 100주년 기념스탬프'를 제작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101개의 철도스탬프를 제작해 역에 비치했으나 지금은(2023년 1월 현재) 364개로 늘려 비치하고 있다.

철덕들이 이토록 철도에 애정을 가지고 있을진대 명색이 철도 업계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일종의 오기도 생기고 늦깎이로 '철덕'에 입성하고자 올해부터 그들처럼 전국에 퍼져 있는 철도스탬프들을 나홀로 찾아 나서고 있다.

개인적으로 10년 안에 한국철도공사에서 제작한 364개의 철도스탬프를 모두 찍는 것을 목표로 현재 평균 한 달에 3~4개역씩 방문하고 있다. 단순히 철도스탬프만 찍는 것이 아닌 해당역이 속한 지역을 당일 혹은 1박 2일로 여행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1. 충남 서천역
 
서천역은 장항선 거의 끄트머리에 있다.
▲ 서천역 전경 서천역은 장항선 거의 끄트머리에 있다.
ⓒ 신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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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충남에 있는 서천역에 가게 된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이달 초 이 지역에서 열린 지역 행사에 김건희 여사가 참석해 축사를 했는데, 흥미로운 건 윤석열 대통령 내외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역술인 천공이 김 여사가 온 이튿날 이 지역을 방문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나서였다.

뉴스에서 한 역술인의 방문에 군수와 경찰서장, 지역 여당 정치인이 호위를 했다는 의혹 보도를 접하며 기가 차면서도 한편으론 서천군이 어떤 지역인지 궁금해졌다. 윤 대통령이 강원도에 갔을 때 천공은 그즈음 춘천을 방문해 "기를 다스리기 위해 왔다"고 했었는데, 이번 서천에서도 그러기 위해 왔다고 했을까.
  
생각해보니 워낙 여행을 좋아하는지라 지금까지 살면서 전국 253개 지자체 가운데 8할 이상은 최소 한 번쯤 방문해 보거나 여행을 한 것 같다. 충남에서는 공교롭게도 한산모시와 한산소곡주로 유명한 "아부지, 돌 굴러가유~"의 원조고장 서천군만 유일하게 가보질 못했었다.

마침 천안에서 익산까지 서해안 서부지역을 관통하며 이어지는 장항선도 처음 타 볼 겸 장항선 거의 끝에 위치해 있는 서천역을 가고자 아산·천안역에서 기차에 몸을 실었다. 장항선은 현재 새마을호와 무궁화호만 운행 중에 있다.

그동안 빠른 KTX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제법 빠른 속도로 1시간 30~40분을 달려 도착했건만 어릴 적 경험했던 완행열차를 타는 기분이었다. 우린 그렇게 계속 이어지는 빠른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시나브로 느림의 소중함을 잃어가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어느덧 살면서 처음 가보는 서천역에 도착을 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시골역이라 그런지 역 주변에는 한적함 그 자체였다. 시골역 가운데서도 군청을 끼고 있는 역은 읍내 중심에 위치한 역들도 많이 있지만 현재 서천역은 그렇지 않았다.

일단은 읍내로 들어가는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읍내로 향했다. 그리고는 읍내에 접어들어 내린 뒤 구글 지도를 켜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걸음을 옮겼다. 다년간의 여행 경험으로 보면 시골 읍내에서는 대개 걸어서 반경 30분 내 거리에 시외버스터미널이 있기 마련이다.

금강산도 식후경. 일단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찜해 두었던 맛집을 가고자 목적지로 향했다. 여기서 잠깐. 보통 필자는 낯선 지역에서 맛집을 찾을 때, 방송에 나온 곳들을 많이 의지한다. 주로 (지금은 진행자가 바뀐) '김영철의 동네한바퀴'나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을 많이 검색해 보는데, 적어도 이름이 알려진 이들이 방송에 나온 식당들은 최소 중간 이상의 맛을 낸다는 믿음 때문이다.

고맙게도 충남 서천은 두 방송 모두 소개된 지역인지라 무엇을 먹을지 행복한 고민을 하다가 이날 늦은 점심은 콩국수가 당겨 '김영철의 동네한바퀴'에서 소개된 식당으로 향했다. 

서천여행에서 가고자 하는 목적지들이 공교롭게도 동서남북으로 제 각각 나뉘어 있었지만 방송에 소개된 콩국수 맛을 확인해 보려고 터미널에서 식당이 있는 서천군 판교면 음식특화촌 거리로 향했다(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서천역 바로 위에 있는 판교역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그런데 이런! 점심시간이 많이 지나 도착하긴 했지만 오후 3시께 이 식당은 영업마감이었다(절대 카카오맵에 있는 정보들을 신뢰하지 마시길) 여행은 늘 이런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결국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마침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 소개된 식당이 건너편에 있어 그곳으로 향했다. 워낙 면돌이인지라 기대감을 갖고 비빔냉면과 물냉면을 동시에 주문했다. 헌데 비빔냉면은 개인적으로 중간 이상의 맛이었으나 물냉면은 육수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문화시설 휴관일 체크 필수

식사를 하고 나니 그 시간에 다른 목적지로 이동하기도 참 난감했다. 더욱이 뚜벅이로 시골 지역을 여행한다는 것은 길에서 기다리거나 보내는 시간이 많은 법. 서천역에서 시골 가운데 시골에 위치한 이곳 식당에 오기까지 3시간 정도가 소요됐고 다시 읍내로 돌아가니 어느덧 저녁 무렵이었다.

결국 필자는 이날 읍내의 한 여관에서 1박을 한 뒤 이튿날 이른 아침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서천군의 대표적 관광지이자 김 여사가 다녀간 한산모시관이었다. 그런데 아뿔사! 교대근무를 하다보니 요일 개념이 많이 없어졌는데, 필자가 방문한 요일은 안타깝게도 대다수 문화관광지들이 휴관을 하는 월요일이었다.

그곳에서 걸어서 한 시간 거리 안쪽에 있는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지도 역시 휴관인지라 전시관은 둘러보지 못하고 생가지를 돌며 아쉬운 마음만 가득이었다. 한산모시관과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지 중간에 위치한 한산공용터미날에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와 드라마 킹덤·추노 등을 찍은 신성리 갈대밭을 가고자 버스를 찾아보았지만 3시간에 한 번 꼴로 오기에 결국 일정상 그곳마저 포기하고 이날 서천여행은 씁쓸하게 마무리해야 했다.

뚜벅이로 시골역을 방문할 때는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고, 시간에 쫒기지 않으며 한 두 곳의 관광지라도 진득하고 여유있게 그리고 놀며 쉬며 여행하고 오는 것이 제일 좋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아쉬움이 너무 많이 남아 주야근무 후 다시 찾아온 비번과 휴일 때 차를 끌고 지난달 23일 다시 서천군을 찾았다. 이번에는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내려가자마자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 소개된 식당에서 갑오징어 특유의 식감을 회와 볶음으로 맛을 봤고, 인근에 위치한 성경전래기념관과 아펜젤러순직기념관을 방문했다.

이후 서천의 9경 가운데 5경이라고 일컬어지는 춘장대해수욕장에서 텐트를 친 뒤 1박을 하고, 해송 넘어 서해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아침식사를 한 뒤 오전에는 1경 마량리동백나무숲을 산책했다.

이날 오후에는 3경 한산모시관을 다시 방문해 전시관을 둘러본 뒤 고려 말 충절을 지킨 목은 이색의 흔적이 남아 있는 4경 문헌서원을 산책하고, 그의 16대 후손이기도 한 월남 이상재 선생의 생가지를 다시 방문해 지난 여행에서 보지 못했던 그의 유물과 독립운동 정신을 가슴에 간직했다.

그리고는 2경 신성리 갈대밭과 8경 장항송림산림욕장 산책과 장항스카이워크 체험으로 마무리하며 충남 서천에서의 참 바쁜 1박 2일 여행 일정을 소화했다.
 
장항송림산림욕장을 걸으면 솔바람을 만끽할 수 있다.
▲ 장항송림산림욕장 장항송림산림욕장을 걸으면 솔바람을 만끽할 수 있다.
ⓒ 신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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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렇지는 않을텐데 이 지역에서 만난 서천군민들은 대부분 친절하고 말투가 순박했다. 무뚝뚝하고 차가운 도시민들의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언젠가 전북 남원에 여행 갔을 때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받았던 첫인상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풍족한 농수산물들이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 표정 속에 삶의 여유와 느림의 행복이 전해졌다.

도시의 삭막한 정서에 지쳐 있을 때, 휴가 시즌을 제외하고 한적한 숲길과 바닷길, 서원을 찾아 고즈넉하게 걷고 싶을 때, 자연 그대로의 자연을 선사할 충절의 고장 서천군에 한번쯤 여행해보길 권유해 본다.
 
아직 피서철이 아니라 한산한 충남 서천 춘장대해수욕장.
▲ 춘장대해수욕장 아직 피서철이 아니라 한산한 충남 서천 춘장대해수욕장.
ⓒ 신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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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지역시사주간지 <충청리뷰>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충남 서천군, #기차여행, #철도, #철길, #춘장대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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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분야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등 전방위적으로 관심이 있습니다만 문화와 종교면에 특히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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