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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 두 곳이 교차하고 주변에 이케아(IKEA)를 낀 대형상가가 있는 왕복 8차선 도로에 차들이 멈춰 있다. 소방차나 경찰차, 구급차를 위해 비켜서있는 것도 아니고 신호등도 바뀌었는데 여전히 꼼짝을 하지 않고 있다. 아무도 경적조차 울리지 않는다. 양방향의 이 많은 차들이 그저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무슨 일일까? 

한 차선씩 조심조심 차들이 빠져나가며 보니 거위 가족들이 도로를 무단 횡단 중이었다. 고속도로와 상업 지구가 된 지 오래인데도 귀소 본능에 따라 거위들은 이곳을 찾아 둥지를 튼다. 이맘때쯤이면 워낙 자주 있는 일이라 아무도 경적을 울리거나 치고 가지 않는다. 그랬다간 주변 차에 의해 제지당하고 욕을 먹는다.

심지어 어떤 중년 남성은 성격 급해 보이는 젊은 운전자가 자꾸 차를 앞으로 내밀자, 차에서 내려 거위들이 다 지나기까지 팔짱을 끼고 젊은 운전자의 차 앞에 서 있어 준다.
 
마지막 새끼 거위가 무사히 건널 때까지 차들이 모두 정지하여 기다린다.
▲ 4차선 도로 건너는 거위 가족 마지막 새끼 거위가 무사히 건널 때까지 차들이 모두 정지하여 기다린다.
ⓒ 장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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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근교라고는 해도 맨해튼에서 조금 벗어나 있을 뿐 차량 통행이 많은 이곳도 도시나 다름없다. 이케아뿐 아니라 영화관과 푸드코트, 여러 가게들이 모여있는 이곳 대형 상가는 집에서도 가까워 한 주에 두어 번은 들른다. 큰 건물 안에 복도식으로 매장들이 연결되어 있는 흔한 동네 상가이다. 건물 안팎으로 크고 작은 행사도 자주 열리고 주차 공간 한쪽으로 작은 축제장이나 놀이공원이 자주 설치되어 이용객이 넘쳐난다. 
 
차량 통행량이 왕성한 상가 주변에 새로 설치된 거위 주의 간판. 사실 이런 주의 간판이 없어도 5~6월이 되면 주민들은 길 건너는 거위를 위해 서행하거나 멈춰 기다려 준다.
▲ "거위 횡단" 간판  차량 통행량이 왕성한 상가 주변에 새로 설치된 거위 주의 간판. 사실 이런 주의 간판이 없어도 5~6월이 되면 주민들은 길 건너는 거위를 위해 서행하거나 멈춰 기다려 준다.
ⓒ 장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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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에 상가 곳곳에 재미있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거위 횡단(Geese Crossing)

거위들의 횡단보도인 셈이다. 사실 이런 간판은 필요가 없다. 누구나 거위들을 잘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가 주변만이 아니다. 야생 동물이 지나가는 길목이니 주의하라는 간판은 동네 여기저기 눈에 띈다. 거위 그림 하나만으로도 '이 근처에 거위들이 많이 다니는구나'하고 조심하게 된다.

아빠, 엄마,  새끼들 한 가족만 다니기도 하지만 주로 여러 가족이 무리 지어 다닌다. 아장아장 걷는 새끼 거위들까지 모두 거리를 횡단하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 무리의 대장 격인 거위가 맨 뒤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계하다가 마지막 새끼까지 무사히 건넌 것을 확인하고 보도 위로 올라선다.

그런 모습이 정겹기도 하지만, 한편 거위들의 배설물 처리는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다. '거위들이 지정된 간판 아래로만 지나다녀야 하는데 자꾸 교통법을 어기고 아무 데서나 건너다녀 화가 난다.' 라디오를 듣던 중에 이런 황당한 청취자의 사연에 웃은 적도 있다. 그만큼 주행 중에 방해가 된다는 말일 것이다. 

대형 상가로선 배설물과 교통 방해가 분명 골치 아픈 민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거위를 쫓아낼 궁리보다 오히려 상가 곳곳에 '거위 횡단' 간판을 새로 설치했다. '이맘때는 아직 새로 태어난 거위가 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이니 운전자들은 주행 중 조심해 달라'고 적극 알려가면서.
 
법적인 보호 조치를 받는 동물도 있고, 그렇지 않은 동물도 있지만 주의 표지판이 있는 지역에서는 우선 서행이 교통 문화로 자리잡았다.
▲ "야생 동물 출몰" 주의 표지판 법적인 보호 조치를 받는 동물도 있고, 그렇지 않은 동물도 있지만 주의 표지판이 있는 지역에서는 우선 서행이 교통 문화로 자리잡았다.
ⓒ 장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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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건너거나 갓길에 서있는 거위들을 위한 주의 표지판이다. 마을 곳곳에 설치되어 흔히 볼 수 있다.
▲ "거위 주의" 표지판 길을 건너거나 갓길에 서있는 거위들을 위한 주의 표지판이다. 마을 곳곳에 설치되어 흔히 볼 수 있다.
ⓒ 장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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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들려오는 동물학대 사건 

상대적으로 자연 친화적인 제주에서 동물 학대 관련 소식을 듣는다. KBS 보도에 따르면, 총포 소지 허가를 받은 60대 남성이 지난 19일 오전 7시쯤 서귀포시 남원읍 한 도로에서 길을 막고 비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길고양이 한 마리를 공기총으로 쏴 숨지게 했다. 작년에도 제주에서는 화살을 맞은 개가 구조되어 치료받은 적이 있었다. 

길고양이는 물론 사진 촬영을 위해 야생 조류를 학대하는 일도 자주 보도된다. 가림막이 되어야 할 나뭇가지를 잘라버리니 그늘막을 잃은 깃털 없는 새끼들이 일사병으로 죽기도 하고, 고의 연출을 위한 낚싯줄에 희생되기도 하고, 촬영 후 방치된 둥지가 천적에게 노출돼 공격을 받기도 한다.

지난 2월에는 서울의 한 동물카페에서 개를 둔기로 내려치는 등 잔혹하게 동물학대를 한 카페 업주가 구속됐다. 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는 동물의 60%는 고라니다. 야생 고라니는 국제적으로는 멸종 위기종이지만 한국에서는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되어 로드킬, 포획, 살상을 당한다.

학대 기사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반가운 면도 있다. 학대 기사에 대해 공분하는 댓글과 학대 신고자, 현장에서 제지하는 시민들을 보면서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음을 실감한다. 법적인 처벌도 중요하고 사람에게 피해가 되는 경우 대책 마련도 필요하겠다. 바라기는 생명에 대한 존중, 공존에 대한 인식이 하나의 선한 문화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존중은 조율을 가능하게 한다. 강하기 때문에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강하기 때문에 보호할 수 있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초록 신호로 바뀌자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차들이 정차한 틈을 타 건너는 것이겠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비교적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는 지점을 파악한 건 아닐까.
▲ 건널목으로 길 건너는 거위 무리  신기하게도 초록 신호로 바뀌자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차들이 정차한 틈을 타 건너는 것이겠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비교적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는 지점을 파악한 건 아닐까.
ⓒ 장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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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차선 도로를 뒤뚱거리며 건너는 새끼 거위는 곧 경계선 없는 하늘을 비행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뒤뚱거림을 기다려 주는 모두의 여유가 고맙다. 거위를 보호하려고 고객에게 귀여운 당부를 하는 상가와 거기에 호응하는 주민들의 마음 모두가 귀하게 여겨진다.

그 귀한 마음을 아는지 오늘 만난 거위들은 초록 신호등이 켜진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길을 막은 그들에게 내어주는 시간은 고작 1분이다. 길을 막아섰다고 총에 맞은 고양이는 몇 분이나 버티다 일을 당했을까.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 중복 게재합니다


태그:#동물 보호, #GEESE CROSSING, #동물 학대, #제주 길고양이 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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