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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숙소는 맨해튼의 센트럴파크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숙박비가 놀랍도록 저렴했다. 물가 비싸기로 세계 제일이라는 뉴욕 한복판에서 독립된 거실과 방, 화장실 2개를 갖춘 공간이 하룻밤에 80달러라니 믿기지 않았다.  
   
밤 비행기에 입국 수속까지 늦어져 숙소에 도착하니 밤 12시였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문을 안 열어주면 호텔이라도 갈 각오였는데 고맙게도 호스트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숙소는 한 달 반 넘게 이용한 십여 곳의 에어비앤비 중 최고였다.
  
뉴욕의 숙소
 뉴욕의 숙소
ⓒ 김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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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센트럴 파크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내가 마주친 사람들은, 노숙자이거나 알코올에 취하거나 눈빛이 몽롱한 사람, 소리 지르는 사람 등 생활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제야 숙소값의 비밀이 풀렸다. 내가 묵은 곳은 바로 할렘(Harlem) 125번가 근처, 범죄의 온상으로 악명 높은 할렘가였다.

미국에 오니 역시 이불 밖은 위험했다. 그렇다고 여행 와서 숙소에만 있을 수도 없는 일. 뉴욕에서 머무는 동안 해지기 전에 귀가했고 지하철과 거리에서 늘 사람을 경계하며 다녔다. 그러나 할렘가도 사람이 살고 있었고 나 또한 그렇게 할렘을 살며 여행했다.
 
숙소가 있었던 할렘 126번가. 과거 중산층 동네였던 곳으로 빅토리아풍 고급 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숙소가 있었던 할렘 126번가. 과거 중산층 동네였던 곳으로 빅토리아풍 고급 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 김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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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렘에서 식당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사실인데 유난히 소울 푸드 식당이 많았다. 여기서 소울 푸드는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듯이 '위로를 주는 음식'이란 뜻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미국 남부 흑인들이 먹어온 음식류'를 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남부 흑인들의 고향인 서아프리카 음식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흑인 음악을 '소울 뮤직(Soul Music)'이라 하듯 흑인 음식을 '소울 푸드(Soul Food)'라고 부른다.

숙소 주인의 추천으로 갔던 할렘의 한 식당은 미국 남부 요리를 내는 식당으로 꽤나 유명한 곳이었는데 퓨전 소울 푸드를 내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먹은 남부의 대표 가정식 요리 쉬림프 앤 그릿(Shrimp&Grets)은 새우와 치즈 옥수수 수프의 콤비네이션이었고 이때만 해도 소울 푸드가 그리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미국 남부의 가정 요리, 쉬림프 앤 그릿(Shrimp & Grits)
 미국 남부의 가정 요리, 쉬림프 앤 그릿(Shrimp & Grits)
ⓒ 김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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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의 소울 푸드 식당에서 쌀을 베이스로 한 스튜 요리 '검보(Gumbo)'를 접하고 남부 음식에 매료되었다. 마침 스테이크도 치즈도 감자튀김도 싫증 났을 때쯤이고 국물 없는 마른 식사에 질릴 대로 질린 참이라 검보는 한국의 집밥만큼이나 입에 맞았다. 마침 바람도 쌀쌀한 날이라 고슬고슬한 밥알과 함께 잘박하게 제공된 따뜻한 국물을 떠먹으니 속이 단번에 데워지면서 행복감이 올라왔다.
 
미국 남부의 스튜 요리 검보(Gumbo)
 미국 남부의 스튜 요리 검보(Gumbo)
ⓒ 김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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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떠나는 날, 숙소에서 걸어서 소울푸드 전문 식당을 찾아갔다. 식당 이름에 소울 푸드를 내건, 제이콥의 소울 푸드 전문 식당(Jacob Soul Food Restaurant)이었다. 오픈 시간 10시에 맞춰 갔더니 음식 준비가 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차려진 음식들은 하나같이 풍미 가득하고 먹음직했다.
 
제이콥 소울 푸드 전문 식당(Jacob Soul Food Restaurant)에서
 제이콥 소울 푸드 전문 식당(Jacob Soul Food Restaurant)에서
ⓒ 김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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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가는 길이라 더 기다릴 시간이 없었고 준비된 음식 중에서 용기에 골라 담았다. 그동안 못 먹은 익힌 야채를 실컷 먹었다. 그중 야채 볶음 하나가 짭짜름하며 발효된 신맛이 났는데 김치를 떠올리게 하는 맛이었다. 나중에 구글링을 해보니 콜라드 그린(Collad Green)이라는 야채였다.
 
원하는 양만큼 담아 무게로 음식값을 지불하고 먹는다.
 원하는 양만큼 담아 무게로 음식값을 지불하고 먹는다.
ⓒ 김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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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값은 1인당 15달러가 청구되었다. 뷔페식 자율 식당처럼 운영되어 원하는 양만큼 담고 음식값을 지불하면 된다. 밥 먹기 겁날 만큼 고물가의 뉴욕에서 이 정도면 훌륭한 '가성비 식사'다. 할렘에서 만난 소울 푸드는 할렘의 보석이었다. 뉴욕을 다시 가게 된다면 여행 주제는 '소울 푸드 순례'가 될 것이다.

할렘은 과거 백인 중산층이 살았던 곳이 흑인 주거지로 변하면서 우범지역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곳이지만 한때 흑인 문화와 예술, 인권 운동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할렘이 개발되면서 흑인 문화의 상징이었던 역사적 건물들이 많이 철거되었다고 하니 여행자로서 아쉽기 그지없다. 대신 할렘의 소울 푸드 한 끼로 한때 할렘을 풍미했던 흑인들의 소울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뉴욕 할렘, #뉴욕여행, #할렘, #맨해튼, #소울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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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여행자입니다. 여행이 일상이고 생활이 여행인 날들을 살고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과 기억을 '쌓기 위해'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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