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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이 빼곡히 가득한 푸른 산자락 한가운데 우뚝 솟은 하나의 건축물. 우연히 본 사진 한 장에 마음이 뺏겨 단번에 찾게 된 곳이었다. 아니, 사실 '단번에'는 아니었다. 마음만은 이미 이곳 사유원으로 달려가던 중에, 끼익 급제동. 당장 달려갈 마음으로 홈페이지에 예약을 하러 들어갔다가, 관람료를 확인하곤 주춤했다.

주말 관람과 한식 특선을 즐기는 '관람, 디너 패키지 상품'의 가장 높은 금액은 무려 26만9000원이었다. 내심 놀랐다. 가고 싶다고 쉽사리 갈 만한 금액이 아니었다. 다행히 평일 관람은 5만 원이었고 가고 싶은 마음이 커 결국은 가게 됐지만, 5만 원 역시 적은 돈은 아니다.

미지의 공간, 사유원을 걷다

그렇게 사유원으로 향했다. 개인적으로 미리 알고 가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사유원에 대해 아는 지식이라곤 관람 금액, 그리고 그 사진 한 장 속의 풍경이 전부였다.

궁금함을 안은 채 도착한 사유원의 입구에는 숲으로 향하는 계단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자연 한가운데 위치한 멋진 건축물을 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이곳까지 왔는데, 입장과 동시에 걸었다. 일단 걸었다. 초입부는 여느 산 속 숲길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숲길을 자꾸만 걷다 보니 슬그머니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사유원으로 들어서는 초입부
 사유원으로 들어서는 초입부
ⓒ 배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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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다른 산속 숲길을 걷는 것과 뭐가 다를까. 요즘 이곳저곳의 멋진 산들도 산책로 정비를 잘해놓아서 걷기 참 좋은데.'

소위 비싼 돈 내고 나는 왜 여기서 이렇게 걷고만 있는가와 같은 뾰족한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의문은 사유원에 들어선 뒤 꽤 오래 걸으면서까지 이어졌다. 평소 걷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정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더랬다.

아마도 비싼 관람료를 내고 왔단 생각 때문일 텐데 숲길 자체는 좋았다. 울창하게 쭉쭉 뻗은 나무들, 숲길 양쪽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다양한 꽃들, 풀밭 속 작은 줄기에 매달린 빨간 산딸기, 이따금 날아오르는 팔랑팔랑 나비, 어디선가 졸졸 흘러내리는 물소리, 나무 위 새소리. 싱그러운 초록빛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자연이 자연스럽지 않고 자유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자연이 아니다.'

산책로 중간 중간에는 문구들이 담긴 표지석이 놓여 있었는데, 그 중 한 곳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사유원은 걷기 편하도록 산책로를 잘 마련해 놓았고 조경도 잘 되어 있었지만, 되도록 본연의 모습을 해치지 않으려는 듯했다.
 
숲길을 걷다 만난 글귀
 숲길을 걷다 만난 글귀
ⓒ 배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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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헌'을 만나다

그렇게 꽃과 나무들로 가득한 자연 속에서 가끔씩 좋은 글귀들도 읽어가며 걷다가, 만났다. 파란 하늘 아래 초록빛 숲이 우거진 풍경 속에, 회색빛의 뭔가가 보였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번째 건축물, 소요헌이었다.

꽤 걷다 처음으로 마주한 건축물이라 그런 걸까. 와 닿는 울림이 예상보다 더 컸다. 천천히 건축물 안으로 들어갈수록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뭔가로 인해 살짝 소름이 돋았다.
 
사유원 내 건축물, 소요헌
 사유원 내 건축물, 소요헌
ⓒ 배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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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원 내 건축물, 소요헌
 사유원 내 건축물, 소요헌
ⓒ 배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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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헌 입구에 세워둔 안내 표지판 속 공간 설명은 이랬다.

'알바로 시자는 피카소의 임신한 여인과 게르니카를 전시할 마드리드 오에스테공원의 가상 프로젝트를 사유원에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피카소의 작품 대신 시자의 조각들이 설치된 소요헌. 한국 전쟁의 격전지였던 이곳은 생명과 죽음의 순환이 새겨진 공간입니다.'

읽어봐도 건축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는 문외한인지라 어렴풋이 느끼는 뭔가가 있을 뿐,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다. 몰라도 좋아할 수는 있으니까.

소요헌 내부에는 앉을 수 있는 기다란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이곳에 가만히 앉아 있자니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왔다. 높디높은 건물 천장 한쪽에 새집이 있었다. 새 한 마리가 그곳을 들락날락거리고 있었다.

소요헌 내부 '소요유'라는 이름의 작은 정원에는 '편안하고 자유롭게 노니는 정원'이란 설명이 적혀 있었다. 설명 속에 주어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알 것 같았다. 소요헌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만난 건축물들 내부에도 역시 새들이 자유롭게 오가고 있었다.

다시 걷는 시간, 쉬어가는 시간

이곳에서 천천히 시간을 보낸 뒤 다시 걸었다. 사유원 내 각각의 건축물들은 넓은 산 속 중간 중간에 자리하고 있어 만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니 오히려 급히 가기보단 천천히 가는 게 좋았다.

사유원 곳곳에는 벤치가 많았다. 앉아 있노라면 언제 더웠냐는 듯 불어오는 바람이 금세 땀을 식혀줬다. 걸을 때와는 또 다른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잠시 쉬어갈 때 미처 보지 못했던 절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유원 곳곳에 자리한 벤치
 사유원 곳곳에 자리한 벤치
ⓒ 배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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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일수록 쉬어가는 걸 잊지 말 것. 마냥 걷기만 하다보면 사유할 시간은 까맣게 잊게 된다. 그렇게 쉬다 걷다 하며 사유원이 숨겨 둔 풍경들을 하나하나 만났다.

푸른빛 자연과 회색빛 건축물의 조화

건축물들은 빠짐없이 인상 깊었다. 물론 그 자체가 풍기는 아우라도 강렬했지만, 건축물들이 자리하고 있는 곳 역시 자연 한가운데였다. 콘크리트나 녹슨 철판으로 세워진 건축물들은 자연을 향해 열려있는 듯 했다. 건축물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빛과 그림자의 어우러짐들이 공간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건축물 내부의 빛과 그림자
 건축물 내부의 빛과 그림자
ⓒ 배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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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자연과 회색빛 건축물의 조화가 마치 하나의 작품 같았다. 드넓은 자연 속 미술관에 온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짐작하건대, 아마도 이곳은 시간마다 계절마다 다 다른 느낌일 것이다. 들어오는 햇살의 온도도, 그림자의 길이도, 불어오는 바람의 세기도, 하늘의 색깔과 모양도 오전 오후가 다르고, 봄여름가을겨울이 다 다를 테니. 피어나는 꽃도, 숲의 색깔도 계절마다 모두 다 다를 테니 말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사유원을 나서려는데, 막 입구로 들어서는 한 분이 물었다.

"좋던가요?"

단답형으로 답하기엔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그렇다고 긴말을 할 수는 없어 간단히 답했다.

"좋은데 많이 걸어야 돼서 힘들어요."

그거라면 문제없다는 듯 웃으며 "걷는 거 좋아해서"라고 답하셨다. "저도 좋아하는데..." 라는 뒷말은 혼자 삼켰다.

사유원에 막 도착하면 입구에서 GPS가 내장된 목걸이와 안내 팸플릿, 엽서 그리고 물 한 병을 제공해준다. 이것은 명백한 복선. 사유원은 작은 숲이 절대 아니다. 오래도록 걸어야 한다. 다 걷고 나서 드는 느낌은, 산을 통째로 산책한 기분이다. 그러니 혹시 가신다면 비교적 선선한 오전부터 천천히 산책하시길 추천 드린다.

천천히 걷다 쉬다 하면서 숨겨진 풍경들을 만나보시길. 자연 속 수목원인 듯 미술관인 듯한 이 공간들을 다 만나보려면 걷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넓은 공간인 까닭에 미처 닿지 못하는 곳도 있고, 여러 갈래의 길 앞에서 가끔씩 길을 잃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타날 멋진 무언가를 담기 위해선, 어쨌든 한 걸음 한 걸음 그곳으로 향하는 과정이 필요할 테니.

덧붙이는 글 | 위 글은 개인 블로그 (https://blog.naver.com/tick11)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태그:#군위, #군위여행, #사유원, #사립수목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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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여행하며 자주 글자를 적습니다. <그때, 거기, 당신>, <어쩜, 너야말로 꽃 같다> 란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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