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4 19:27최종 업데이트 23.05.14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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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팔용산 둘레길에 있는 친일시인 노천명의 시 표지판. 2019.9.3 ⓒ 김성대

 
시인 노천명은 27세 때 발표한 '사슴'에서 청정하고 고고한 내면세계를 노래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라고 읊었다.

그는 세속과 거리를 둔 '관이 향기로운 높은 족속'의 정신세계를 관조했다. 그런 뒤 제2연에서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라고 노래했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라고 했다. 시인이 관조하는 내면세계가 다름 아닌 시인 자신의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국권 침탈 이듬해인 1911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군에서 출생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재학 때인 1932년 21세 나이로 문단에 데뷔한 뒤 조선중앙일보사 및 조선일보사에 들어간 그는 1938년에 스물일곱 살이었다. 그해에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의 내면세계를 노래했던 그는 얼마 안 있어 전혀 다른 정신세계를 드러냈다. 일본제국주의의 세계 침략을 응원하는 극우세력의 의식 세계가 그에게서 표출됐다.

군국주의 정치단체 핵심으로 활동

대통령 소속 친일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5권 노천명 편은 "1941년부터 조선문인협회 간사로 활동하면서 용산 호국신사 어(御)조영지 근로봉사 참여, 결전문화 대강연회에서의 시 낭독, 경성 방문 대동아문학자 대표 환송식 참여, 대동아전 일주년 기념 국민 시 낭독회에서의 시 낭독 등의 행위를 통해 총후(銃後) 문인의 문필보국에" 힘썼다고 서술한다.

1941년 이후의 노천명은 어(御)를 붙여 공손한 느낌을 가미한 호국신사 어조영지 봉사 활동에도 참여하고 전쟁 지원을 위한 갖가지 문학 활동에도 가세했다. 이 시기의 그는 후방 문인의 문필보국에 힘쓰는 전형적인 친일 문인이었다. 늦어도 서른 살부터는 이런 군국주의 침략 활동에 동조했다. 이 무렵의 그는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고고한 내면세계를 발견하는 순수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간사로 활동한 조선문인협회는 겉으로는 한국인 단체였지만 실제로는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였다. 친일파 연구의 토대를 닦은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은 조선문인협회의 출발점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조선 문인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가입 문제 등 기타를 상의한 데서 남상(濫觴)한다"고 지적했다. 전쟁 동원 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가입하는 문제를 상의하려고 모인 데서 이 단체가 기원했다는 설명이다.

<친일문학론>은 "시오바라 도키사부로가 조선문인협회의 탄생에 있어 산파 역할을 담당했다"고 알려준다. 총독부 학무국장이 이 단체의 배후였던 것이다. 또 발기인 대회가 1939년 10월 20일에 열린 것도 야스쿠니신사 임시 대제일(大祭日)에 맞춘 것이라고 임종국은 해설한다.

이때 단체의 설립 취지로 규정된 것도 "비상시국하의 문필보국"이었다. 노골적으로 그렇게 표방했으니, 처음부터 순수한 문인단체이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10월 29일 부민관(지금의 서울시의회)에서 열린 결성대회는 "이광수의 천황폐하 만세삼창으로 폐막하였다"고 위 책은 말한다. 또 시오바라가 이 단체의 명예총재가 됐다고도 말한다. 문인단체로 보아줄 수 없는 군국주의 정치단체였던 것이다.

노천명은 그런 단체에 마지못해 가입한 게 아니었다. 그는 실무 간사가 되어 이 단체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작정하고 친일파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조선문인협회에서만 간사 일을 한 게 아니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노천명 편은 "조선임전보국단 산하의 부인대 간사로 일했다"는 점도 설명한다. 이 사전은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여 학예부 기자로 활동"한 경력도 소개한다. 총독부 기관지 기자로도 일했고 거기서도 문예부 기자로 일했으니, 전쟁 선동의 주요 실무자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침략 전쟁 지원 독려
 

노천명 ⓒ 국어국문학자료사전

 

그는 글쓰기뿐 아니라 말하기로도 친일을 했다. 조선임전보국단 등이 주최한 대중 행사 때는 무대에 서서 연설을 했다. 좌담회나 위문 활동 등에도 적극 참여했다. 시 낭독 대회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열혈 전사가 되어 여기저기 출현하면서 전쟁 지원을 독려했던 것이다.

노천명은 친일단체 실무진으로도 일하고 총독부 기관지 기자로도 일했다. 30대 전반기의 노천명은 친일 재산을 기반으로 살아간 셈이 된다. 그런 재산이 그의 육체로 들어가 피가 되고 살이 됐으니, 그 영혼에서 나오는 문학 역시 제국주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남긴 수필·논설·기행문뿐 아니라 주 종목인 시에서도 그런 색채가 노골적으로 배어 나왔다.

그는 감각적인 시어를 동원해 한국 여성들의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3월 4일 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부인근로대'에서는 군복 수리에 동원된 여성들의 모습을 비장하게 묘사했다.

시에서 그는 "총알에 맞아 뚫어진 자리/ 손으로 만지며 기우려 하니/ 탄환을 맞던 광경 머리에 떠올라/ 뜨거운 눈물이 도네/ 한 땀 한 땀 무운을 빌며/ 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 이여/ 훌륭히 싸워주 공을 세워주"라고 읊었다. 동원된 여성들이 불만을 품지 않고 자기 작업에 의미를 부여하게끔 고안된 시였다.

1944년 10월호 <조광>에 발표한 '싸움하는 여성'이라는 수필에서는 전쟁의 승패가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 달려 있다고 역설했다. 여성들이 근로정신대 활동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게 그의 강조점이었다. 그는 "대동아전쟁의 승패는 결국에 있어서 적국 여성들과 일본 여성의 근로의 투쟁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 뒤 외아들을 전쟁터에 바친 어머니와 새신랑을 전쟁터에 바친 여성을 거론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여자 정신대는 이때 우리 여성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길인 줄 압니다"라고 썼다. 사랑하는 이를 전쟁터에 보낸 여성들이 할 일은 후방 지원이며 '우리 일본 여성'이 적국 여성보다 더 많이 투쟁해야 전승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메시지였다.

그는 청년 남성들을 겨냥한 작품도 썼다. 1943년 8월 5일 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에서는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쟁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이라고 읊었다.

32세의 이 여성은 남성을 부러워하는 듯이 하면서 내가 남자였다면 주저없이 부르심을 받들었을 것이라며 남성들의 등을 떠밀었다.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라는 시구와는 대조적으로, 힘없는 대중을 전쟁터로 몰아넣는 앞잡이 역할을 서슴없이 수행했던 것이다.

1945년 해방 후에 매일신보사의 후신인 서울신보사에 근무하다가 부녀신문사로 옮긴 그는 한국전쟁 때도 전쟁 선동에 가담 또는 동원됐다. <친일인명사전>은 "6·25 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다가 1950년 6월 하순 문학가동맹에 참여했다"라며 "문화인 총궐기대회에 참가하여 결의문을 낭독하고 유세대에 참여했다"고 설명한다. 일제강점기 때의 행위와 맥락은 다르지만, 전쟁 중에 대중 앞에 나서 선전 활동을 하는 모습은 1945년 이전과 다르지 않다.

이 일 때문에 그는 형사처벌을 받았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뒤에 부역자 처벌법에 의해 20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친일로 인한 처벌은 받지 않고 친북으로 인한 처벌만 받았던 것이다.

동료 문인들의 석방 운동에 힘입어 1951년 4월 석방된 그는 부역행위에 대한 해명의 뜻을 담은 <오산이었다>라는 소설을 1952년에 발표했다. 친일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않고 친북에 대해서만 해명을 했던 것이다.

제국주의에 부역한 일로 그가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그의 삶에는 이것이 하등의 장애물도 되지 않았다. <친일인명사전> 노천명 편은 그의 46년 인생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끝낸다.
 
1955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에 강사로 출강했으며, 이화여대 출판부에 근무하면서 <이화 70년사>의 간행을 맡았다. 1957년 6월 16일 서울시 종로구 자택에서 사망했다. 2001년 이후 노천명문학상이 제정되어 매년 시·수필·평론 등 9개 부문에서 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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