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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정상회담과 관련해 한일관계를 되돌아보면 호오(好悪)의 굴곡의 파도가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렀다. 서로 좋고 싫어함에는 정치가들의 발언이 문제시돼 변곡점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망언'이라 부르면서 비난하는데, 일본 정치가들의 망언을 주목해본다.

전후 일본 정치가들의 한국에 대한 망언을 살펴보면, 내용별로 그 유형을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식민통치에 대한 미화를 비롯한 역사 인식. 둘째, 한일의정서, 을사늑약, 한일병합조약 등과 같이 기존의 조약에 대한 법적 합리화. 셋째, 조선, 한국에 대한 우월, 증오와 같은 감정적인 작용.

식민통치에 대한 미화

한일관계가 반복해 어긋나게 흘러간 배경에는 식민통치에 대한 미화에서 비롯하는 데, 위의 두 번째와 세 번째 모두 식민통치에 대한 인식과 관련돼 있다. 조선식민통치의 미화 등에 관한 일본 정치가들의 망언은 조선식민지 지배가 합법이었다는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통치의 미화란 조선식민통치가 합법적이었고, 한국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는 식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논리다.

1953년 10월 15일 일본 외무성에서 열린 한일회담 재산 및 청구권 분과위원회에서 당시 일본측 수석대표인 구보다 간이치로우(久保田寛一郎)는 "한민족의 노예상태를 언급한 카이로선언은 연합국의 전시 히스테리식 표현이다. 일본의 35년간의 한국통치는 한국인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다"라고 하며 식민지 지배를 두둔하는 발언을 했다. 구보다 발언이 장애가 돼 한일교섭은 4년 반의 기간에 걸쳐 중단됐다.

외무성과 대장성의 문서

패전 후, 일본 외무성은 문서를 통해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한국 내의 일본인 재산을 확보하려고 했다. 1949년 말 일본 외무성의 식민지 지배에 대하 기본적인 태도는 다음과 같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시정은 식민지에 대한 착취정치로 보아서는 안된다. 조선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 일본의 영토가 됐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조선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인 근대화에 공헌을 하였다. 그럼에도 조선으로부터 일본인 추방과 사유재산에 대한 박탈은 국제관례상 이례인 것이다.'

외무성의 문서만큼 어조가 강하지는 않지만, 1950년에 나온 대장성의 문서도 식민지 지배를 옹호하는 견해를 비추고 있다.

'일본의 조선 통치는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지배와 착취로 일관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 결과적으로 실패와 과오도 있었지만, 일본의 조선통치는 이상적으로는 식민지 지배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야 또는 그때까지 처한 조선의 상태를 비춰볼 때, 어떠한 의미에서도 완전한 독립국으로 자립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던 조선의 상태를 되돌아 볼 때, 반드시 일본만이 비난받아야 할 팽창정책이라고 말할 수 없다.'


패전 직후부터 일본 정부의 관계부처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문서를 남기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문서는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본 정부 관계자들의 대한정책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논리는 오늘날까지 불편한 한일관계와 촘촘히 얽혀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일회담과 망언외교

1953년 한일회담 일본측 대표인 구보다 간이찌로(久保田貫一郎 1902~1977)는 이미 식민지시대 외교관 시절 조선이란 일본이 보호할 대상이라는 인식이 형성돼 있었다. 이는 한일회담에서도 이러한 인식이 묻어나오고 었다. 1950년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미국의 입김이 들어가 자율반 타율반으로 한일 간의 국교교섭이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해방전 조선에 대해 구보다를 비롯한 일본 외교관의 인식이 바뀌어진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 보통 일본인들이 갖고있는 한국에 대한 인식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에 우리 측은 일본이 한국을 통치함으로써 한국이 은혜를 입었다는 구보다의 발언을 비판하고 있다. 구보다는 한국 측에서 식민지지배의 마이너스 측만 강조했기 때문에 플러스 측면도 있다고 말한 것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한일회담 일본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가 1953년에 작성한 문서.
 한일회담 일본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가 1953년에 작성한 문서.
ⓒ 동북아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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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이 매듭지어가던 1965년 1월 7일 당시 일본 측 대표인 다까스기 신이찌(高杉晉一)는 외무성 출입기자단과의 회견에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한 것은 조선을 보다 나은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일본의 이같은 노력은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좌절되었지만 20년쯤 더 오래 조선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강변함으로써 한일회담은 결렬되는 위기에 직면했지만, 한일간 회담을 조기 타결시킨다는 의사를 확인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한일기본조약이 타결된 후에도 일본 정치가들의 조선식민지에 대한 인식에는 변화가 없었다. 1974년 1월 24일 다나까 가꾸에이(田中角栄) 일본 수상은 "식민지 시대에 일본은 한국에 김 양식을 전했으며, 교육제도, 특히 의무교육제도를 한국에 심었다"고 발언해 한국 정부의 취소 요구에 정정발언을 함으로써 한국민의 감정을 무마시키려고 했다.

1980년대는 교과서 기술을 둘러싼 한중일 간 역사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1982년 7월 23일 마쓰노 유끼야스(松野幸泰) 국토청장관은 "한국의 교과서는 한일병합에 대해 일본이 침략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당시 한국의 국내사정 등을 감안할 때, 어느 쪽이 옳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여 한국으로부터 비판받았다. 

덧붙이는 글 | 송부하는 기사는 아래의 논문을 참조하여 재구성하였습니다.
김광욱「한일관계와 망언외교」『외교』 40호, 한국외교협회, 1996년 12월.


태그:#혐한 , #한일관계, #한일회담, #망언, #한미일 공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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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외형적인 성장과 함께 그 내면에 자리잡은 성숙도를 여러가지 측면에서 고민하면서 관찰하고 있는 일본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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