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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주말 농장에 핀 청매화
 선배의 주말 농장에 핀 청매화
ⓒ 도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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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전화가 왔다. 대학 선배이자 오래전 같은 학교에 근무했던 분에게서다.

부부 교사였던 선배님은 교직 생활을 마치고 아파트와 주말농장을 오가며 자연을 가꾸는 삶을 택하셨다. 주말농장에 버찌나무와 보리수나무 묘목이 있으니 가져다 심어 보라 하신다. 바람도 쐬고 텃밭 구경도 할 겸 와보라 하니 고마운 마음에 얼른 토요일로 약속을 잡았다. 선배의 주말농장은 우리 집에서 승용차로 약 30분 정도의 외진 곳에 있다. 
     
화창한 토요일 낮 시간. 집 근처 베이커리 카페에서 빵과 구움 과자를 산 후 삽과 비닐봉지를 챙겨 차에 올랐다. 내비게이션이 알려 주는 길을 따라 도착한 들판에 집 한 채가 있다. 그 농가 주택으로 보이는 그 집은 아닌 듯하여 좁은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니 맞은편 산 아래로 대문 없이 낮은 나무로 울타리를 삼은 집이 보인다. 차 소리를 듣고 마중 나오신 선배님과 안쪽에서 한참 나무에 물을 주는 사모님의 모습이 보인다.     

주말농장이라 해서 작은 농막과 텃밭 정도인 줄 알고 왔지만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제법 번듯한 집도 있었고 텃밭은 약 600평이나 되는 곳이다. 게다가 마당은 주인은 있지만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산과 잇대어 있다. 산이 마치 집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것 같아 안정감도 있고 마당과 산과 텃밭이 한 폭의 그림 안에 소롯이 담겨 있는 듯하다.

농장에는 벌써 청매화와 홍매화가 피어 있었다. 개나리도 꽃눈이 여기저기 보인다. 내 집보다 봄소식이 먼저 와 주인처럼 반긴다. 식물을 좋아하시는 두 분이 곳곳에 꽃나무와 유실수를 심어 두셨다. 겨우내 얼어 죽지 않도록 잘 손봐둔 수국가지에서 움이 트고 있었다. 산과 어우러진 정경에 갖가지 꽃이 필 나무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이 넓은 곳을 두 분이 관리하기엔 버겁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차 한잔을 마주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 선배님과의 첫 인연은 삼십 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나는 울산에서의 첫 근무지 S중 인근 동네에서 혼자 자취를 했다. 당시는 학교마다 대학 동문회가 활발했다. 선배님은 같은 과가 아니라도 객지 생활하는 후배들에게 늘 자상하게 대해주셨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도움을 청하라 했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사양한다. 나보다 4살 연상인 선배님은 이미 결혼하여 두 딸아이의 아빠에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매우 가정적인 분이셨다.      

그 당시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외관상 다소 부실해 보인다. 20대는 지금보다 빌빌대는 정도가 더 심해 힘없어 보이고 비실대는 말라깽이였다. 얼굴이 좀 반반했으면 비련의 주인공 같았겠지만 실제로는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초라한 몰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 년에 서너 차례 분기별 행사처럼 찾아오는 급성 위경련으로 결근을 했다. 안 겪어본 사람에게 위경련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면도칼이 식도 아래부터 명치와 오장육부를 훑고 지나가는 뭐 그까짓 정도랄까. 병원을 다녀와 하루 종일 끙끙대며 누워 있었다. 지금처럼 죽 전문점도 없고 즉석밥도 없던 시절이라 하릴없이 굶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산발이 된 머리를 대충 수습하고 문을 여니 선배님이 계셨다. 

선배님은 학교 인근 동네의 아파트에 거주하셨다. 혼자 앓고 있는 후배가 있다고 사모님께 부탁해서 죽을 끓여 오신 것이다. 사모님도 학교에서 퇴근하자마자 저녁 식사 준비에 정신없이 바빴을 텐데 죽까지 준비해 주셨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말은 아마 이런 때 쓰라는 모양이다. 선배님은 "이 죽 다 먹고 내일은 나아서 오라"는 말을 남기고 선 김에 가셨다. 두고 가신 죽에서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그때 내게 그 죽은 그냥 죽이 아니었다. 빈 속에 누워 있는 내게 다음 날 학교를 갈 수 있는 에너지였고, 혼자 겪는 외로움에 대한 가족 같은 위로였다. 객지에서 혼자 끙끙대며 앓고 있는 남편의 후배를 위해 죽을 끓여 주신 마음은 누구나 쉽게 낼 수 없음을 알기에 남기지 않고 죽그릇을 비웠다. 그 뒤로 사모님은 집에 불러 저녁 식사도 대접해 주셨다.      

S중을 떠나 온 후 각자의 삶이 바빠 바람결에 들리는 소식으로만 선배님의 안부를 알고 있었다. 그러던 차 작년에 친한 친구가 모임에서 선배님을 만났고 내 안부를 묻는 선배님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그 뒤 얼마 후 전화를 받았다. 여전히 자상하고 나긋함 그대로인 선배님이었다. 주말농장 다녀오시는 길에 꽃무릇이 활짝 피어 가져다 주마 하셨다. 얼굴도 보고 집 구경도 오시겠단다. 마치 엊그제 만났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주말 농장에서 나무 묘목을 캐는 모습
 주말 농장에서 나무 묘목을 캐는 모습
ⓒ 도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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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의 정은 활짝 핀 꽃무릇에 이어 잘 익은 버찌와 나리꽃 구근이 되어 찾아왔다. 그리고 오늘. 세 그루의 나무가 되어 건네졌다. 두 분의 다정함과 베풂이 삼십 년 전과 다름없이 와닿는다. 그때는 위안이, 오늘은 정으로.     

오래전 기억되는 고마운 인연이었다 여기던 내게 두 분은 긴 세월을 훌쩍 뛰어 다시 내 앞에 계신다. 매번 먼저 연락 주시는 선배님께 고마운 마음보다 죄송함이 앞선다. 후배를 챙겨 주시는 마음씀은 지금도 여전하시다. 사모님은 마당에서 수확한 매실로 담근 숙성된 매실액과 쪽파를 주셨다. 매실액은 체기가 있을 때 소화제로 그만이다. 텃밭에서 얻어 온 보드라운 쪽파 한 줌을 살짝 데쳐 간장, 매실액, 초고추장을 넣어 조물조물 무쳐내니 봄 향기가 입에 가득 찬다. 

해 질 녘 마당에 나와 터를 고르고 버찌나무와 보리수나무, 단풍나무를 정성스레 심고 물을 주었다. 선배님의 고마운 마음이 내 마당에 뿌리내려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란다. 삼십 년 전 인연이 귀한 마음으로 다시 마주한 것은 선배님 덕분이다. 처음 인연을 맺는 것보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이어지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지인들을 살뜰히 챙겨 주시고 정을 나누는 선배님을 보며 생각한다. 놓쳐서는 안 될 소중한 인연을 보내지는 않았는지, 풀어야 할 매듭은 없는가 하고. 다시 만나고픈 그리운 얼굴들도 떠 오른다.    
잔디가 파릇해지고 선배님이 주신 나무에 물이 올라 아가 손 같은 새잎이 돋아나면 먼저 전화를 드려야겠다. 그때쯤이면 텃밭의 싱싱한 상추와 쑥갓을 넣은 비빔국수 한 그릇 드시자고 청해 볼 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brunch.co.kr/@dhs9802에도 실립니다.


태그:#인연, #선배님, #정, #고마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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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생활을 하며 은퇴 후 소소한 글쓰기를 합니다. 남자 1, 반려견 1, 길 고양이 3과 함께 하는 소박한 삶을 글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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