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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만났던 나의 연인이 있다. 이번에 서울에서 다시 만난 그 연인은 다름 아닌 외규장각의궤이다. 의궤란 왕실과 국가의 중요 행사에 관한 기록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2009년 여름 파리의 유서 깊은 리슐리에국립도서관에서 직접 안아보고 넘겨보았던 바로 그 고귀한 서적들을 한국 땅에서 다시 만나니 잔잔한 감회가 밀려왔다. 서적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때는 약탈당해 이역만리에서 '피랍자' 신세로 지내다 고국에서 면회 온 필자를 만났는데, 이번엔 고국에 돌아와서 필자를 다시 만난 것이니 서적들도 혼이 있다면 어찌 반갑지 않았겠는가.
 
14년 전 프랑스 리슐리에국립도서관에서 반환되기 전 외규장각의궤를 안고 다소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필자. 이번에 서울에서 다시 만난 이 멋진 '파리의 연인'과의 데이트는 한결 마음 편하게 이루어졌다.
 14년 전 프랑스 리슐리에국립도서관에서 반환되기 전 외규장각의궤를 안고 다소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필자. 이번에 서울에서 다시 만난 이 멋진 '파리의 연인'과의 데이트는 한결 마음 편하게 이루어졌다.
ⓒ 유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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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적들은 병인양요(1866년) 때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 군함에 약탈당한 사실만 전해올 뿐 정확한 행방을 모르던 중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1929~2011) 박사에 의해 발견되어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서적들로 인해 지금 우리나라의 고속철이 프랑스산 TGV(떼제베)이다.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 걸까.

이 서적들이 1975년 존재를 드러낸 이래 반환 문제가 한동안 한불 외교 현안이 되었다. 그러던 중 우리나라가 고속철을 도입하기로 한 1993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TGV를 팔기 위해 방한했다. 이때 외규장각 의궤 297 책의 반환을 약속하고 그중 맛보기로 <휘경원원소도감의궤>라는 책 한 권을 가져왔는데, 국립도서관의 여성 사서 2명이 책을 가지고 따라왔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청와대에서 두 나라의 대통령이 직접 반환식을 하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사서들이 책을 못 내놓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프랑스 측에 초비상이 걸렸던 것이다.

외무장관이 장시간 면담 끝에 전달식 몇 분 전에야 사서가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나타나 마지못해 책을 내놓은 해프닝이 발생했다. 사서들은 귀국 후 책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겠다며 사표를 내는 초강수를 두었고, 프랑스 언론들은 대통령을 비판하고 사서들을 지지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TGV는 팔고 의궤 반환 약속은 지키지 않아 한국 측의 원망을 샀다. 그 후 숱한 양국 교섭 끝에 145년 만인 2011년 프랑스 국내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영구대여 형식을 빌어 사실상 한국에 반환한 것이다.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왕의 결혼식 행렬 장면이 천연색 사진처럼 실감나게 펼쳐지고 있다.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왕의 결혼식 행렬 장면이 천연색 사진처럼 실감나게 펼쳐지고 있다.
ⓒ 유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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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은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특별전을 3월 19일까지 열고 있다. 의궤 가운데 임금에게 올리는 어람용(御覽用)은 녹색 비단 표지와 놋쇠 변철, 최고급 초주지(닥나무 종이) 등 최상의 품질과 고귀한 멋을 뽐낸다. 반듯한 글씨체에 인물과 기물을 정교하게 묘사한 후 화려한 채색을 했다.

행사의 목적과 의의, 진행 과정, 참여 인물은 물론 행차 모습, 연주된 악기, 음식 등 물품들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소요비용과 일꾼들의 품삯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가히 조선 기록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조선왕실 의궤에는 예법으로 바른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조선의 의례 경험과 통치 철학이 담겨 있다.

'파리에서 돌아온 나의 연인'은 고국의 품에서 한층 품위 있는 멋과 향취를 내뿜고 있었고, 나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연인과의 데이트를 즐겼다.

덧붙이는 글 | <세계도서관기행> 작가. 전 국회도서관장


태그:#외규장각의궤, #리슐리에도서관, #국립중앙박물관, #유네스코기록문화유산, #파리의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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