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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독립운동의 의의를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순수 민간단체‘시민모임 독립’은 일본 근대의 뿌리를 살펴보기 위해 1월 13일부터 17일까지 규슈(九州) 지역을 다녀왔다. 규슈는 일본 열도 서쪽에 자리한 섬으로,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워서 우리와 역사적 인연이 깊은 곳이다. 아울러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메이지(明治) 유신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이글은 이번 여정에 동행한 기자가 규슈지역 여러 곳을 돌아보고 느낀 점을 정리한 것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탐방기를 소개할 예정이다. [기자말]
지금으로부터 약 430년 전, 일본 열도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전국의 번주에 명을 내려 20만 명의 병사를 사가(佐賀)번 가라쓰에 집결시킨다. 조선 침략을 위한 전초기지를 짓기 위해서다. 가라쓰의 한자는 당진(唐津)이다. 중국 당(唐)나라와 교역하던 항구라는 뜻으로, 충청남도 '당진'과 글자가 같다. 그의 명에 따라, 해안가 인근 17만 평방미터의 땅에 성을 짓는 대공사가 시작된다.

히데요시가 전쟁을 지휘하기 위한 본영으로 지은 이 성의 이름이 나고야(名護屋)다. 일본 본토 중부에 있는 나고야(名古屋)와 음은 같으나 한자가 다르다. 혼슈(本州) 나고야와 구별 짓기 위해 히젠(肥前) 나고야라고 부른다. 열도의 거의 모든 번주들이 참여한 이 대규모 토목공사는 1591년 가을에 시작해 5개월 후인 이듬해 봄에 주요 골격이 완성된다. 임진년부터 정유년까지 이어진 7년 전쟁의 거점이 만들어진 것이다.
 
뒤쪽에 보이는 섬이 가카라시마(加唐島)다.
▲ 가라쓰시 나고야(名護屋)성터 기념탑 뒤쪽에 보이는 섬이 가카라시마(加唐島)다.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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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쓰시(市)에 당시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어 사가현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성터 입구에 각 진영이 주둔했던 자리가 표시된 안내판이 서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이름도 보인다. 성터 마루에 올라서니 기념탑이 서 있다. 바다 너머로 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항구를 떠난 왜선의 이정표가 되었을 가카라시마(加唐島)다. 저 방향으로 대한해협을 건너 북상하면 쓰시마섬(對馬島)이 나온다.

1592년(선조 25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약 2만 명의 선발대가 이곳 가라쓰에서 출발해 쓰시마섬을 거쳐 부산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된다. 나고야성은 정유재란 때도 전쟁 지휘소로 사용됐다. 한글로 작성된 안내문에 임진, 정유왜란은 조선과 대륙에 진출하기 위해 일으킨 침략전쟁으로, 그 피해는 조선국 전체에 미쳤다는 문구가 쓰여있다. 한국인 관광객들을 의식해서 일부러 이런 표현을 쓴 것일까.

성터 인근에 나고야성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입구에 제주에서 볼 수 있는 돌하르방이 서 있다. 안내원을 따라 2층 상설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전시주제가 '일본 열도와 한반도의 교류사'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일본과 한반도가 교류했던 흔적들을 모아 시대별로 구분해 둔 곳이다. 히데요시의 초상화와 친필 편지, 당시 성 주변에 살던 주민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자료와 그림들이 진열되어 있다.

여기가 일본 박물관이 맞는가
 
박물관 곳곳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배려한 흔적들을 볼 수 있다.
▲ 나고야성 박물관 입구의 돌하르방 박물관 곳곳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배려한 흔적들을 볼 수 있다.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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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히데요시 초상화 옆에 이순신 장군 영정을 걸어두었다. 홀 중앙에는 거북선 모형과 전쟁 때 사용한 대포가 자리를 잡고 있다. 여기가 일본 박물관이 맞는가, 라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한국인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마케팅 차원의 접근인가. 오랜 기간 뇌리에 각인된 확증편향이 고개를 내민다. '침략이라는 표현도, 전시물의 내용도 일본 현지 박물관으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접근인 것 같은데 특별한 배경이 있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한일 양국의 우호 관계를 일시적으로 단절시킨 두 왜란과 그 무대였던 나고야성터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전시관을 꾸밀 때, 중앙정부와 의견 충돌이 컸는데 사가현(縣) 주지사가 강한 의지를 내보이며 밀어붙였다고 한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무척 인상적이었다. 가라쓰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둘러보시기를 추천한다.

사가는 일본 규슈 북부에 자리한 작은 현(県)으로 규슈 지역 7개 현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고 특별히 내세울 만한 관광자원도 많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에도 시대의 사가는 나가사키(長崎) 일부 지역까지 상당히 넓은 땅을 관리하고 있었고, 이 항구를 통해 서양 문물을 일찍 받아들여 근대화된 번(藩) 중 하나였다. 자체 제철소를 통해 근대식 화포를 생산할 만큼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사가번은 막부 정권에 이 사실이 알려질 것을 두려워해 강력한 쇄국(鎖國)정책을 실시한다. 다른 번과 교류하거나 지역을 이탈하면 사형죄로 다스리고 외부인의 이주도 금지할 만큼 빗장을 굳게 잠그고 살았다. 에도 말기, 규슈지역에 막부타도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자 뒤늦게 조슈번, 사쓰마번과 힘을 합치게 된다. 근대식 무기를 앞세워 막부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많은 전공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메이지 정권 출범 후, 논공행상(論功行賞) 과정에서 조슈와 사쓰마, 도사에 이어 4번째로 밀리게 된다. 특별히 기여한 것도 없는 도사번(현 고치현)이 공을 많이 차지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사족(士族)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사가의 난(1874년)이다. 난은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고 주모자들은 참수된다.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시대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주저한 탓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타국에서 쓸쓸히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탑
  
마을 뒷편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인 형세를 이루고 있다.
▲ 이마리(伊万里)시 오카와치야마(大川內山) 도자기마을 전경 마을 뒷편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인 형세를 이루고 있다.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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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쓰에서 차로 1시간 정도 가면 이마리(伊万里)라는 작은 도시가 나온다. 이 도시에 오카와치야마(大川內山)라는 오래된 도자기 마을이 있다. '비요마을'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비요(秘窯)는 숨겨진 가마터란 뜻이다. 왜란 때 끌려온 조선인 사기장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던 곳이다. 사가번의 다이묘가 도자기 기술의 외부 유출을 막기 위해 이곳에 마을을 짓고 유폐(幽閉)했다고 한다.

마을 뒤쪽 삼면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입구만 막으면 밖으로 빠져나가기 어려운 형세다. 좁은 골목길 양편에 고색창연한 간판이 붙은 집들이 사이좋게 잇대어 서 있다. 이곳에서, 4백 년 이상의 세월을 조선의 도공과 그 자손들이 도자기를 빚으며 살아가고 있다. 평생을 가마터에서 살다가 저세상으로 떠난 도공들의 슬픈 이야기는 강남주 작가의 작품(비요, 2021년)에도 담겨 있다.

마을 입구에 공동묘지가 있고 중앙에 삼각주 모양의 돌무덤이 서 있다. 연고 없이 생을 마감한 도공들이 묻힌 도공무연탑(陶工無緣塔)이다. 표지석에, 살던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쓸쓸히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탑을 세운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겹겹이 쌓아 올린 비석에 새겨진 글씨들은 풍화되어 희미했다. 탐방단 일행은 무연탑 앞에서 묵념하고 명복을 빌었다. 편히 쉬시라고.
 
무연고로 사망한 조선인 도공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세워졌다.
▲ 비요마을 입구에 있는 도공무연탑  무연고로 사망한 조선인 도공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세워졌다.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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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현에서는 가라츠와 아리타, 이마리를 도자기의 본향으로 꼽으며 이곳에서 매년 도자기 축제가 열린다. 아리타(有田) 마을에는 일본 도자기의 시조라 일컫는 이삼평(李參平)의 신사가 있다. 충남 공주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끌려왔고, 아리타 근처에서 도자기의 원료인 고령토를 찾아내 일본의 첫 백자를 구워낸 인물이다. 현재 이삼평의 14대손인 가나가에 쇼헤이(金が江 省平)씨가 대를 이어가고 있다.

이마리 도자기는 파리 만국박람회(1867년) 때 출품한 것을 시작으로 해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유럽식 자기와 문양과 질감이 다른 도자기를 본 유럽 상인들로부터 주문이 쇄도했다고 한다. 1873년에 열린 비엔나 박람회에서는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조선인 도공이 만든 도자기가 세계 시장을 평정한 것이다. 도자기 산업이 사가현에 큰 재정적 수익을 창출하게 해 주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가현 관광 누리집을 방문해보면,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 때 함께 간 사가번의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한반도에서 도공들을 데리고 돌아온 것이 이마리 도자기의 기원이라고 쓰여 있다. 나오시게는 임진왜란 때 1만 2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장수다.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의 부인인 나시모토 마사코(한국 이름, 이방자)의 외가가 나베시마 가문이다.

남의 나라를 침략해 도공을 강제로 끌고 간 게 명백한데 '데리고 돌아왔다'라는 말로 표현하다니, 마음이 불편해진다. 도공 이삼평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전쟁터에서 잡혀 억울하게 끌려간 도공이라는 이야기와 왜군에 협력한 순왜(順倭)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해석이 함께 공존한다. 한일의 역사 흐름이 교차하는 지점에서는 막연한 추정이 아닌 실증적인 역사 연구가 필요함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집필한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일본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은 근대사 콤플렉스가 있어서 일본을 미워한다'라고 말한다. 열도의 고대 문화가 한반도에서 건너온 문명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애써 부정하려는 일본인. 일제 식민지 시기 동안 겪은 상처가 너무 커서 무조건 일본을 배척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절반만 맞다고 본다. 근대사 콤플렉스가 있어서 일본을 미워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벌인 한반도 침략사에 대한 참회가 없기 때문에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은 간단치 않은 관계를 맺어왔다. 꼬이고 비틀린 과거사를 넘어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야 할 과제가 두 나라 모두에 주어져 있지만, 가해자의 진정성 있는 반성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게 바른 순서일 것이다. 

태그:#일본 근대의 뿌리를 찾아서, #나고야성터, #가라쓰, #이마리, #비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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