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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에 찾아온 광복은 많은 것을 변화시킨 커다란 역사의 전기였지만, 그런 변화들이 바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음반만 놓고 보더라도, 1943년 말이나 1944년 초에 일본 음반회사들이 주도하던 생산이 중단된 이후 광복이라는 계기를 통해 진정한 '국산 레코드'가 등장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긴 했으나, 실제로 음반 발매가 재개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945년 10월에 조선레코드문화협회라는 단체가 이미 활동을 하고 있었고, 1946년 7월에는 첫 번째 음반회사 고려레코드가 광고를 내기도 했지만, 고려레코드에서 제작한 첫 음반이 발매된 때는 광복 이후 만 2년이 지난 1947년 8월이었다. (관련 기사 : 한국 음반 제작의 발상지, 마장동 791번지를 아시나요 https://omn.kr/1s5ys)

다만 음반 발매에 관한 조건을 약간 달리해서 보면 광복 이후 첫 음반의 역사는 조금 달라질 수도 있다. 한국인이 한국어로 녹음한 내용을 한국인의 자본과 기술로 한국에서 만들어낸 음반으로 보면 고려레코드 음반이 첫 번째가 맞다. 그러나 '한국에서'라는 조건을 완화해서 시야를 좀 더 넓혀 보면 다른 사례가 확인되기도 한다. 고려레코드보다 한 해 빠른 1946년 8월에 일본에서 또 다른 첫 번째 음반이 발매되었던 것이다.

1945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창간된 <민중신문> 1946년 8월 1일자에는 새로 나온 음반 판매를 알리는 광고가 등장했다. 음반 발매 주체는 리베라(Libera)레코드. 'Libera'는 에스페란토어로 자유를 뜻하며, 리베라레코드 음반 딱지에 표기된 알파벳은 모두 에스페란토어이다. <민중신문>은 재일조선인연맹, 즉 조련(朝聯)의 사실상 기관지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리베라레코드 또한 조련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음반회사였다. 광고에 등장하는 리베라레코드 주소가 '東京都 芝區 田村町 1ノ3 朝聯 內 民衆映畫社'으로 '조련 내'라고 적힌 데다가, 음반 딱지에도 조련(朝聯管絃樂團)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1946년 8월 리베라레코드에서 발매한 <청춘이로다>, <독립의 아침> 음반 딱지
 1946년 8월 리베라레코드에서 발매한 <청춘이로다>, <독립의 아침> 음반 딱지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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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레코드에서 발매한 첫 음반은 모두 다섯 장이며, 수록 내용과 음반번호 체계로 보아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음반번호 201~203에는 국악과 대중가요가 수록되었다. <양산도>/<청춘이로다>(201), <호접몽> 상/하(202), 그리고 <노들강변>/<고향설>(203)인데, <청춘이로다>를 제외한 다섯 곡은 광복 이전 오케(Okeh)레코드에서 나왔던 것을 다시 찍어낸 경우이다. <청춘이로다>는 리베라레코드에서 새로 만든 창작곡으로, 조련관현악단이 반주를 맡았다.

그리고 음반번호 301~302에는 김순남이 작곡한 '해방가요'가 실렸다. <농민가>/<독립의 아침>(301), <해방의 노래>/<우리의 노래>(302)가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성악가 장비, 진예훈의 노래로 녹음되었고, 여기서도 반주는 이경주가 지휘하는 조련관현악단이 담당했다. 리베라레코드 음반에 담긴 해방가요 네 곡은 모두 1945년 12월 서울에서 간행된 조선예술연맹 기관지 <예술운동> 창간호에 악보와 가사가 실려 있으므로, 조련에서 그 자료를 입수해 음반으로 발매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술운동> 창간호 표지
 <예술운동> 창간호 표지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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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음반 생산이 아직 재개되지 않아 식민지시기 음반이나 외국 음반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재일교포 음반회사 리베라레코드의 한국어 음반 첫 발매 소식은 당연히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거기 담긴 내용이 광복의 의미와 기쁨을 담아 새로 만들어진 해방가요라는 데에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외경제신보> 1946년 12월 28일자에는 당시 분위기를 알 수 있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해방의 노래> 재일동포 간에 보급

작곡가 김순남 씨의 가요곡 <해방의 노래>와 <우리의 소래>(<우리의 노래> 오기)는 일본 재류동포까지도 널리 보급되어 많은 찬송을 받고 있다 하며 전기 두 곡을 일본 재류조선인 예술단체에서 오케스트라 반주로 노래를 취입한 녹음판이 요즘 서울중앙방송국에 전해 왔다 한다.
 
1946년 5월 서울에서 열린 해방가요 발표회에서 연주된 30여 곡 가운데 대다수를 작곡했을 만큼 해방가요 창작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던 김순남은, 해방가요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음악 활동을 통해 한국 현대음악의 개척자로 평가받을 만큼 1940년대 후반 가장 주목받는 작곡가였다. 하지만 1948년 월북과 이후 북한에서 당한 정치적 숙청 때문에 그의 많은 작품들 중 상당수가 사라져 버렸고, 활동 당시에 녹음되어 지금까지 들을 수 있는 예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김순남 작품을 확인할 수 있는 당대 자료는 1949년 10월 북한 국립예술극장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연주된 <피아노 협주곡> 영상 일부, 그리고 리베라레코드에서 1946년에 발매한 해방가요 네 곡이 전부이다. 리베라레코드의 첫 음반은 음반사(史)는 물론 음악사 측면에서도 더없이 소중한 자료인 것이다.

좌익 색채가 짙은 재일조선인연맹 관련 음반회사에서 좌익에다 월북까지 한 음악가 김순남의 해방가요를 제작한 것이라 리베라레코드 음반은 그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를 못했다. 그러니 이제라도 자료 복원이나 좀 더 나아간 조사, 예컨대 리베라레코드의 후속 음반 발매 여부나 관련 인물들에 대한 연구 등을 진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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