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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프놈펜으로 들어오는 버스 위에서 저는 약간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캄보디아는 첫 번째 방문이기도 했고, 그간 캄보디아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가 별로 좋지만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랜 기간 이어진 현대사의 비극과, 그로 인한 부패와 가난이 제가 단편적으로 들어았던 캄보디아의 이미지였습니다.

수치로 봐도 그렇습니다. 캄보디아의 전체 GDP는 280억 달러, 1인당 GDP는 1,752달러입니다. 굳이 한국과 비교하자면 총 GDP는 100배 차이가 나고, 1인당 GDP는 4배 차이가 납니다. 주변국인 베트남이나 태국과 비교해도 총 GDP는 20배 가까이 차이나고, 1인당 GDP도 5배 정도는 차이가 납니다. 인간개발지수는 0.593, 지니계수는 36으로 둘 모두 그리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며칠 동안 프놈펜에 머물며 느낀 것은, 예상한 것보다 이곳이 아주 잘 정비된 도시라는 것입니다. 물론 관광객인 제가 느끼는 아주 단편적인 인상일 뿐이겠지만요. 다만 그 짧은 시간에도 이 도시의 매력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은 분명히 듭니다.

뚜얼슬렝 대학살 박물관
 
뚜얼슬렝 대학살 박물관
 뚜얼슬렝 대학살 박물관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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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도시에 대해 조금 더 깊숙이 생각하게 된 것은, '뚜얼슬렝 대학살 박물관'에 방문한 뒤였습니다. 이름에서 아실 수 있듯 이곳은 크메르 루주의 집권 이후 벌어진 '킬링 필드'에 대해 전시해 둔 기념관입니다.

베트남에 있을 때도 언급했지만,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베트남과는 전쟁까지 벌이며 식민지를 사수하고자 했죠. 캄보디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2차대전기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장악한 때도 있었지만, 일본이 패망하자 프랑스는 다시 캄보디아에 진주해 식민정부를 재건했습니다.

그래도 캄보디아는 베트남보다 사정이 나았습니다.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장악한 것은 영국의 영향력이 강했던 태국과 완충지대를 설정하기 위함이었지, 딱히 캄보디아 영토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던 탓입니다. 물론 그 때문에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겪으면서도 별다른 산업화나 경제 발전을 경험하지 못했죠. 역설적인 일이었습니다.

프랑스와의 협상 끝에 1949년, 캄보디아는 프랑스 연합(Union française) 내의 자치국으로 독립합니다. 물론 완전한 독립은 아니었습니다. 군사권도 상당 부분 제약되었고, 외교권은 프랑스 연합 고등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만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국제사회에서는 이를 국가로 승인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아시아에서는 태국과 남한만이 프랑스 연합 하의 캄보디아를 국가로 인정했습니다.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 동상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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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캄보디아 내에도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립파 세력은 의회주의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고 있었고, 국왕인 시아누크와 갈등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국왕 시아누크가 직접 정치에 개입하며 초대 총리를 지냈을 정도로 영향력이 강했습니다.

결국 갈등 끝에 1953년 시아누크는 의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캄보디아의 완전한 독립을 약속받은 것 역시, 이 시기 국왕 시아누크가 프랑스와 벌인 협상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이것 역시 역설적인 일이지요.

도시민들의 대학살

결국 1953년 11월 9일, 캄보디아는 '캄보디아 왕국'으로 프랑스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합니다. 1955년 총선이 치러졌고, 시아누크 세력은 크게 승리했습니다. 시아누크는 총리와 외교부 장관을 맡으며 국가의 전권을 장악했죠. 1957년 의회주의를 주장하던 야당 민주당은 해산되었습니다.

시아누크 정권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베트남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시아누크는 자국 내 공산주의자를 탄압했지만, 북베트남 세력이 캄보디아로 넘어오는 것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자 미국의 지원을 거부하고 중립 노선을 주장하기도 했죠.

미국은 북베트남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경유해 남베트남으로 진입(소위 '호치민 루트')하는 것을 확인하고 전쟁의 당사국이 아닌 라오스와 캄보디아에도 막대한 폭격을 가했습니다. 미군의 폭격에 캄보디아 내에서는 반발감이 싹텄고, 공산주의 세력이 힘을 키워갔습니다.

캄보디아 내의 정치상황이 위기에 달하자, 미국은 1970년 쿠데타를 사주합니다. 미국의 지지를 받아 쿠데타를 벌인 론 놀은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크메르 공화국'을 수립하죠. 시아누크는 북한으로 망명했습니다.
 
북한 망명 생활을 거친 시아누크 국왕의 영향으로, 프놈펜 시내에는 아직 김일성 거리가 남아있다.
 북한 망명 생활을 거친 시아누크 국왕의 영향으로, 프놈펜 시내에는 아직 김일성 거리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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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국이 사주한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 내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힘은 점점 강해졌습니다. '캄푸치아 공산당', 즉 '크메르 루주'는 1973년이 되면 캄보디아 영토의 60%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미국이 남베트남 철수를 결정하자 론 놀 정부 역시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1975년 4월 17일, 남베트남이 함락되기 보름 전에 론 놀의 크메르 공화국은 프놈펜을 빼앗기고 붕괴했습니다. 시아누크는 한때 크메르 루주를 탄압했던 장본인이었지만, 론 놀을 축출하기 위해 크메르 루주와 연합했습니다.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장악하자 시아누크도 캄보디아로 돌아왔죠. 하지만 시아누크는 1년 만에 모든 실권을 잃고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습니다.

크메르 루주는 1976년 1월 '민주 캄푸치아'라는 정부를 만들고 자신들의 구상에 따라 국가체제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도시민은 농촌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전화와 우표의 사용을 금지하고, 화폐제도까지 폐지하려 했습니다. 원시 공산주의 사회로의 복귀를 추구한 것이지요.

도시민은 차별의 대상이, 곧 학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식인 계층 역시 처형 대상이 되었고, 과거 정부 기관에서 일했던 관료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구 600~700만의 캄보디아에 최대 2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갖가지 이유로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어린아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의사도 교사도 사라졌습니다. 사회의 중추를 이루는 중산층과 지식인 계층이 캄보디아 사회 전체에서 축출되고 처형되는 끔찍한 학살극이 이어졌습니다.

크메르 루주가 벌이고 있는 학살극은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외국에 거주하고 있던 캄보디아인 가운데에는, 내전과 군부독재의 종식에 희망을 품고 새로운 캄보디아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 자발적으로 귀국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외국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 언급했던 것처럼, 이 학살극은 1979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정치범 수용소가 된 고등학교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뚜얼슬렝 대학살 박물관'은 킬링 필드 당시 'S-21 보안감옥'으로 불렸던 정치범 수용소였습니다. 2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이 수용소를 거쳐갔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단 12명에 불과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수감되고, 고문당하고, 죽음보다 못한 삶을 견뎌내다 못해 끝내 죽어 캄보디아 곳곳에 암매장되었습니다.

혁명의 이름을 쓴 학살만을 목적으로 했던 이 수용소는, 수용소로 쓰이기 전에는 평범한 고등학교였습니다. 아이들이 배구를 하던 운동장에서는 공공연히 물고문이 이루어졌습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던 자리에는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로 반혁명적'이라 주장하던 비밀경찰이 들어섰습니다. 새로운 캄보디아를 위한 꿈은 그렇게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뚜얼슬렝 대학살 박물관
 뚜얼슬렝 대학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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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킬링 필드가 끝난 뒤에도 캄보디아는 한동안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몇 차례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프놈펜은 16세기부터 캄보디아의 수도였을 정도로 역사가 깊은 도시입니다. 그러니, 그만큼 많은 상처를 입은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 상처입은 도시 위에서 살아가는 프놈펜의 시민들을 보며, 재건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학살극의 현장이었던 뚜얼슬렝은 다시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남은 사람들을 수습해 묘비를 세우고 추모비를 세운 공간이 되었습니다. 강변의 도시는 다시 불을 밝히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이 오고, 집의 문을 열고, 길가를 청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둘러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된 도시의 상처 위에서도 이어졌을 그런 일상을 상상합니다. 서로의 삶 자체가 서로에게 위로였고 힘이었을 시간들을요.
 
프놈펜의 야경
 프놈펜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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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불빛이 모이고 모여 결국 화려한 도시의 야경을 만들어내기까지 걸렸을 긴 시간을 생각합니다. 무너진 흔적 위에서도 살아냈던 사람들, 산산이 깨어져 부서진 삶과 꿈을 어떻게든 주워담아 이어가던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재건해낸 이 도시에서, 저는 나른하게 강변에 앉아 흘러가는 메콩 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느리지만 천천히 앞으로 가는, 강의 하구를 어쩐지 오래도록 보고 있게 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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