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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기실재에서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우리 매형을 포함한 97구의 시신을 직접 옮겼어요. 일제강점기 북해도 탄광으로 강제징용 갔다 온 둘째 형과 동네 사람들이랑 같이 소달구지로요.

둘째 형은 5년 동안 강제징용을 다녀온 뒤로 당시 친구의 농사일을 도왔어요. 마차도 구입해서 생선을 운반하곤 했는데, 당시 돈으로 산 의경이라는 직함을 사놓고 경찰 노릇을 하던 사람이 둘째 형이 자기 땅의 길목을 오간다고 불만이 있었나 봐요. 그래서 둘째 형을 부역혐의자라고 신고했어요. 당시 충남 태안경찰서에서는 부족한 유치장을 대신하려 인근 방앗간을 유치장으로 썼거든요. 부역혐의로 있다가 거기서 1950년 12월경 억울하게 얼어 죽었어요."


한국전쟁 당시 둘째 형과 셋째 형이 부역혐의로 매형이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사망한 후 70여 년이 넘게 한 맺힌 채 살아온 지동기(88) 할아버지의 말이다. 한국전쟁 당시 무고하게 희생당한 충남 태안민간인희생자들이 1천 명이 넘은 것으로 확인되는 가운데, 그동안 희생자 유족들에게 듣기 어려웠던 유의미한 증언이 나왔다.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2기 진화위)'는 오는 12월 9일까지 진실규명 신청을 받는 상황에서 지 할아버지의 말은 주목할 만하다. 24일 기준 태안군청을 통해 진실규명을 신청한 태안유족은 164명으로 확인됐다.

앞서 태안의 민간인희생자 유족들의 경우 지난 제1기 진화위 당시 유족 236명이 집단소송을 제기해 132명이 승소한 바 있다. 이중 부역혐의 희생자는 195명이 소송해 129명이 인용됐다. 보도연맹 희생자는 41명이 소송했지만 단 3명만이 승소했다. 절반을 조금 넘는 유족들만이 진실규명과 함께 국가로부터 피해보상을 받은 셈이다.

제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민간인 희생의 범위를 사망, 행방불명, 집단희생 사건에 포함된 신체적 피해와 부상으로 정했다. 제1기 진화위의 판단을 근거로 볼 때 직접 집단희생을 목격하고 시신을 옮겼다는 증언은 향후 태안민간인희생자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있어 유의미한 증언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태안의 민간인학살사건은 1950년 6월 말에서 7월 초에 발생한 보도연맹원 학살사건과 인민군 점령기 적대세력에 의한 학살사건, 그리고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까지 발생한 부역혐의 학살사건으로 구분된다.

"97구의 시신 옮겼다"... 그날의 진실은
 
지동기 어르신이 사기실재에서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죽은 97구의 시신을 소달구지로 직접 옮겼다고 증언하고 있다.
 지동기 어르신이 사기실재에서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죽은 97구의 시신을 소달구지로 직접 옮겼다고 증언하고 있다.
ⓒ 김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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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충남 태안 백화산 자락 사기실재와 태안경찰서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지난 17일 사기실재에서 만난 지동기 할아버지의 주름이 깊게 드리워진 얼굴에 주름보다 더 깊은 통한의 삶이 묻어났다. 사기실재에 설치돼 있는 '태안지역 부역혐의 희생사건 희생지' 안내간판을 유심히 살펴보던 지 할아버지의 얼굴이 떨렸다. 

"우리 매형(이종목, 남면 달산리 거주)이 이곳 사기실재에서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어요. 당시 태안경찰이 후퇴할 때 이곳으로 데려와 바위에 세워놓고 총살을 시켰어요. 그리고 총에 맞아 떨어진 시신들을 불 싸질렀고요. 총에 맞지 않은 사람들은 바위에서 떨어뜨려 총에 맞은 시신들과 함께 불에 태워 죽였고요. 확인 사살을 한 셈이죠. 나남문리 태안국민학교 옆 성 뒤에 살았는데, 그 장면을 여럿이 함께 지켜봤고요."

지동기 할아버지 기억은 생생했다. 그날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듯 그의 입 주위가 떨렸다.

"그날 죽은 사람들은 태안경찰서에 가뒀다가 이곳 사기실재로 손에 손을 엮어서 밤에 끌고 와서 죽인 겁니다. 그리고 시신을 불 싸지르는 뒤 태안경찰들은 목탄버스(나무를 태워서 움직이는 버스)를 타고 도망갔죠. 이후 나와 마을사람들이 소달구지를 끌고 시신이 쌓여 있는 사기실재로 왔어요. 당시에는 마을에 소달구지가 많았거든요. 시신들이 불에 그슬려 누가 누구인지 몰라서 금이빨 같은 걸로 보고 찾았어요. 

지금 위치한 군부대를 돌아 태안지구대를 거쳐 동문예식장, 태안중학교, 목애당으로 이어지는 길이 예전에 소달구지가 지나다니는 길이었어요. 당시에 내가 16살이었는데, 같이 시신을 옮기던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태안이 온통 울음바다였습니다."


 
지동기 어르신이 사기실재에서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죽은 97구의 시신을 소달구지로 직접 옮겼다고 증언하고 있다.
 지동기 어르신이 사기실재에서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죽은 97구의 시신을 소달구지로 직접 옮겼다고 증언하고 있다.
ⓒ 김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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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97구의 시신을 옮긴 태안주민 중 현재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한 지 할아버지의 증언은 (사)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가 기획해 만든 '태안민간인학살 백서'의 기록과도 일맥상통한다.

백서에는 "한국전쟁 개전 직후, 태안면에서 서산 팔봉면 방향으로 난 사기실재에서 태안 보도연맹원이 경찰에게 집단학살되었으며, 희생자 중 약 100명의 시신을 태안면 면소재지에 이송해 놓았는데 불에 타 있었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950년 한국전쟁 개전 직후, 태안경찰서가 후퇴하기 2, 3일 전에 공문으로 내려온 충청남도경찰국의 지시에 따라 태안경찰서 관할 각 지서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체포, 경찰서로 이송했다.  태안경찰서는 이들 중 일부 보도연맹원들을 대전형무소로 이송했고, 일부는 태안면 백화산 사기실재에서 학살했다"고 기록돼 있다.

방앗간으로 끌려간 둘째 형, 셋째 형… "부역혐의로 끌려가 얼어 죽었다"
 
지동기 어르신이 한국전쟁 당시 태안경찰서가 유치장을 대신해 사용한 한 방앗간 앞에서 증언하고 있다.
 지동기 어르신이 한국전쟁 당시 태안경찰서가 유치장을 대신해 사용한 한 방앗간 앞에서 증언하고 있다.
ⓒ 김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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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실재에서 학살을 당한 보도연맹원들의 시신을 직접 옮기던 사람 중에는 지 할아버지의 둘째형(지동목씨)도 포함돼 있었다. 

1925년생인 지동목씨는 태안경찰서 유치장을 대신한 영단방앗간으로 끌려가 지난 1950년 12월경 눈이 허리까지 찰 정도로 폭설이 내리던 날 동사했다. 일제의 강제징용에 끌려가 5년간의 갖은 고생 끝에 꿈에 그리던 고향집으로 돌아왔는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부역혐의자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당시 방앗간에는 수백 명이 갇혀 있었다. 죽은 사람들은 태안여고 쪽 골망이나 태안군청 자리에 있던 공동묘지, 현재 아파트가 들어선 곳들에 버려졌다. 

둘째 형 역시 영단방앗간에 갇혀 있다 태안여고 쪽 골망에 내다 버려질 처지였는데, 죽은 시신을 버리러 가는 도중 지 할아버지의 첫째 형수가 얼굴을 보고 발견해 찾았고, 공동묘지에 묻었다. 

1927년생인 셋째 형(지동우씨)는 국방경비대 25연대 소속으로 한국전쟁 시 아산평택지구 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파편에 맞아 겨우 목숨을 건진 뒤 부상당한 채 고향에 돌아왔지만 밤에 죽창 든 사람들이 찾아 와 잡아갔다.

지 할아버지는 "수소문해 보니 셋째 형은 둘째 형과 같은 부역혐의로 방앗간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도 "같은 방앗간으로 끌려갔다는 것만 알지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른다. 시신도 찾지 못했다"고 셋째 형에 대한 그리움에 눈시울을 붉혔다.

이날 함께 한 (사)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태안유족회 강희권 상임이사는 "지 할아버지의 증언은 그간 유족들의 증언에서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은 유의미한 증언"이라며 "태안민간인학살 백서의 기록과도 일치한다"고 짚었다. 

이어 "유족회는 지난 15년 동안 백서의 기록을 뒷받침해 줄 유족을 발굴해왔다. 뒤늦게라도 민간인학살 당시의 기억을 증언해 준 유족을 찾게 돼 다행으로 생각한다"면서 "2차 진화위의 진실규명에서도 그날의 진실이 밝혀져 민간인학살 희생자들과 유족들의 아픔이 해소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태안신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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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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