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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김광석.
 생전의 김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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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학씨의 '벗이여 해방이 온다'는 김세진, 이재호 열사를 염두에 두고 쓴 곡이다.
 이창학씨의 '벗이여 해방이 온다'는 김세진, 이재호 열사를 염두에 두고 쓴 곡이다.
ⓒ 이창학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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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인터뷰①] "'벗이여 해방이 온다'는 내게 트라우마였어요"
[인터뷰②] "후배가 저에게 '신내림한 무당'이라고 했어요

 *맨 아래 볼륨을 높이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 노래가 나옵니다. 

왜 '이창학'은 '이성지'가 되었나?

-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아는 분들은 '이창학'보다 '이성지'라는 이름이 익숙합니다.

"그 당시에는 이름을 안밝혀야 하는 거잖아요. 그와 관련해서는 재미없는 스토리가 하나 있어요. 1986년도에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만들고 얼마 안있어 이영미 선배가 김학민 선배가 하는 '학민사'에서 민문협의 <민중의 노래>라는 노래책을 만들었어요. 영미 누나가 주도한 거였죠. 그 당시 서울 마포 도화동에 출판사가 있었는데 저더러 와서 악보 교정, 악보 조판을 봐 달래요.

갔더니 내 노래가 '부활하는 산하'랑 '사월 그 가슴 위로' 두 곡이 있었는데 거기에 '이창학 작사·작곡'으로 써 있는 거예요. 승현이형 노래도 다 '문승현 작사·작곡'이라고 돼 있었구요. 그래서 영미 누나한테 이거 빼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지금이 1986년인데 말도 안된대요. 그런 시대가 아니래요. 작곡가도 자기 이름을 밝혀야 한대요. 그래서 내가 '그러고 싶지 않다, 잘못돼 끌려가면 어떡하냐, 빼 달라'고 했죠. 선배니까 말을 안들어요. 작사·작곡를 제대로 밝혀야 한다면서. 그대로 들어가면 큰일 날 것 같아서 제가 '필명을 쓰면 어떠냐?'고 했더니 그거는 허락하겠대요. 그 자리에서 5분 안에 이름을 대라고 해서 5분 만에 아무 생각없이 대충 넣은 이름이 '이성지'에요.

며칠 있다고 정말 황당한 장면이 있었어요. 승현이형 있는 자리에 영미 누나랑 같이 만났거든요. 승현이형이 노래책(<민중의 노래>) 원고를 봤나 봐요. 영미 누나한테 '내 이름이 다 들어갔던데, 내 이름 다 빼' 딱 한마디 했어요. 그래서 문승현 작사·작곡은 다 빠졌어요. 내 노래 두곡만 '이성지 작사·작곡'으로 들어갔구요. 저는 그게 굳어질 거라 생각 안했는데, '벗이여 해방이 온다' 악보를 처음 발표한 게 민문협 회지였어요. 민문협 소장파가 발간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다 전면 다음에 그 노래를 집어넣자는 거예요. 내가 며칠을 고민해서 멋있게 이름을 붙인다고 '민창석'이라고 했어요. 노래 만들 때마다 다른 이름을 붙이면 얼마나 재미있겠냐 하고 생각하면서요. (웃음)

미국을 갔다 왔는데 '벗이어 해방이 온다'가 되게 유명해졌더라구요. 근데 1989년 초 쯤이었을 거예요. 이건제라는 선배가 고대 노래얼 노래책을 발간하면서 '귀례 이야기', '한라산', ' 벗이여 해방이 온다' 등 제 모든 노래를 '이성지 작사·작곡'으로 밝힌 거예요. 고대 노래얼 노래책에서 처음으로 통일해서 작사·작곡을 밝힌 거죠. 한국에 왔더니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만든 이성지씨냐 물어보고, 다른 이름을 쓰겠다고 할 수도 없고. 이창학보다 이성지가 더 유명해져서 이성지로 그냥 돼 버린 거죠. 전혀 의도했던 바가 아니에요. 그럴 줄 알았다면 더 멋있게 만들 걸 그랬어요."

- 그런데 갑자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셨네요. 

"제가 더 이상 그 상태로는 집안 압박 등을 버틸 수가 없었어요. '새벽' 상설조직화할 때 말이에요."

- 물론 고등학교 때부터 물리학이라는 학문 탐구가 꿈이긴 했지만, 혹시 물리학으로 세상을 읽거나 변혁할 수 있다고 봤나요?

"그런 것도 있었어요. 우리가 1985년~1986년에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사적 유물론 등 소비에트 철학을 공부했잖아요. 그 소비에트 철학이 다 물리학 설명이에요. 양질전화의 법칙이라든지 다 물리학적으로 설명하잖아요. 동일하게 사회현상들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얘기하거든요.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사적 유물론을 공부하는데 문과애들은 그 내용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더라구요. 저는 고등학교 때 물리를 좋아했으니까 다 설명해주면 어떻게 그걸 다 아느냐고 그래요.

물리학으로 소비에트 철학이 설명되는 것을 보고 물리학을 공부하면 철학적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컸어요. 좀더 실용적인 학문을 택하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였구요. 대학원에서 양자역학을 처음 배우는데 세상이 열리고, 새롭게 보이는 느낌이었어요. 물리학 공부를 하길 정말 잘했다, 이런 생각이 죽 들었죠.

박사과정부터는 학생이 아니라 일꾼이에요. 교수가 박사과정을 뽑은 이유는 자기 논문과 관련된 일을 시키기 위한 거예요. 돈이 많은 교수는 일을 많이 시키기 위해 박사과정을 많이 뽑을 것 아녀요? 돈이 많은 교수는 연구비가 많은 교수에요. 연구비가 가는 데로 움직이게 돼 있고, 거기서부터는 잡(job), 직장이에요. 제가 핵물리실험을 하게 된 것은 내가 핵물리실험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일 돈을 많이 주니까, 제일 많이 뽑으니까 그런 거예요.

핵물리실험을 하면 핵이 도는데 도는 스핀값(자전값)이 얼마냐를 측정해요. 사회주의 이념도 붕괴됐는데 이거 하러 물리학 공부하러 미국에 온 것도 아니고, 이게 세상을 바꾸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거에 목숨을 걸고... 나는 그저 일하는 사람일 뿐이더라구요.

박사과정 논문 연구하던 때가 1990년~1994년인데 사회주의는 무너지고, 집안은 (빚보증으로) 망하고, 경제는 힘들어 죽겠고, 연구는 '일하는 것'이고, 그렇다고 그만둔다고 할 수도 없었어요. 같이 노래했던 (김)광석이나 (안)치환이는 가수가 돼 잘 나가지, 노찾사는 100만 장 팔리는 음반을 냈다지, 작년에 여름방학에 잠시 한국 갔을 때 '벗이여 해방이 온다' 작사·작곡자라고 해서 '와' 환영받았지... 내가 여기 때려치고 한국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고민을 엄청 했어요.

그때 이게 고집스러운 거일지 모르겠는데 마음 속에 한 번 시작한 거 중간에 끝내지 않고 마무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1~2년 더 하면 박사학위를 받을 텐데, 박사학위를 받으면 나는 다시는 핵물리학은 쳐다보지 않겠다, 그게 그 당시 내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음악을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졸업할 때 되니까 집이 망해서 한국에 가서 음악을 하면 밥벌이가 큰일날 지경이더라구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배운 게 그거(핵물리학)밖에 없으니까 직장을 알아보고 서울대 포닥(post doctor, 박사후과정)까지 흘러온 거죠."

- 그래도 계속 노래를 하고 싶었던 거네요.

"그쵸. 대학 졸업하고 미국 가서도 노래를 계속 썼어요. 노래는 1년에 한두 곡은 계속 썼던 것 같아요. 1998년까지는요. 한국에 들어와서도요. 그런데 더 희망을 얘기하기에는 주변 사람들이 희망이 없이 사는 데 급급하고, 나 또한 사는 데 급급해지는 것 같고, 나도 더 이상 희망이 없어지고 희망을 얘기하는 것도 무의미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1998~1999년부터는 쓸 이야기가 없어서 노래를 못썼죠."

"학원으로 안갔다면 '부산대 교수'가 됐겠죠"
 
'벗이여 해방이 온다'의 작사, 작곡자인 이창학씨는 서울 강남 대치동에서 과학영재학원을 10여 년 운영하기도 했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의 작사, 작곡자인 이창학씨는 서울 강남 대치동에서 과학영재학원을 10여 년 운영하기도 했다.
ⓒ 이창학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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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미국에서 귀국해서는 사교육 1번지 강남 대치동에서 과학영재학원을 운영해요. 물리학도 그렇지만 이것도 정말 노래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행로 같은데요.

"서울대 연구원 생활 할 때만 해도 대학 교수가 되려고 했죠. 그런데 연구원이 워낙 박봉이라서 먹고 살기가 어려웠어요. 부모님한테 얹혀 사는데 전셋값도 없고, 먹고살기 힘든 지경이었죠. 그런데 당시에 운동권 사람들 중에 대치동 학원에 진출해서 원장들이 된 사람이 몇 명 있었어요. 그 중에 '최민'이라고 옛날 CA(제헌의회그룹)를 이끌었던 선배가 있었죠. 최민 선배는 미국에서 만나서 친하게 지냈는데, 그 선배가 일요일에 하루 와서 세 시간만 중학생들에게 물리 강의를 해 달래요. 내가 당시 서울대에서 포닥비로 100만 원 받고 일반물리강의로 40만 원, 총 140만 원 받을 때거든요. 근데 세 시간 강의하면 한 달에 50만 원을 준대요.

알바 한다고 생각하고, 일요일에 가서 세 시간 강의했죠. 그때 저는 대치동을 처음 알았는데 깜짝 놀랐어요. 서울대에서 일반물리학 강의를 할 때였거든요. 그걸 중학생들에게 강의해요. 근데 애들이 똘똘하고 그걸 잘 알아들어요. 서울대 애들은 시험 보면 평균이 40점밖에 안나와요. 근데 얘네들은 잘 알아들어서 신기한 거예요. 똘똘한 애들 가르치는 게 재미있긴 하더라구요. 그런데 얘네들이 계속 과학을 안하는 애들도 있어서 줄어들고 줄어들고 하다가 남아 있는 애들이 몇명 안됐는데, 그 다음에 서울시 과학경시대회에서 금상, 동상을 탔어요. 그 학원이 설립된 후 처음이에요.

경시대회에서 금상, 동상이 나오니까 동네에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저학년반들이 늘어났어요. 내가 저학년 애들은 안가르쳤고, 윤선애를 학원에 데리고 왔는데 선애한테 맡겼죠. 선애는 그때 학원에서 과학 선생님이었어요. 그 프로그램이 대박을 쳐서 선생도 더 뽑고, 나는 일주일에 사흘을 나갔어요. 수입이 늘긴 했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이건 알바이고, 나는 1년 후면 대학교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최민 선배가 적자를 많이 봐서 학원을 접겠다고 선생님들에게 선언해버리고, 나한테 '네가 인수하면 너한테는 주겠는데 안 그러면 학원을 폐업해 버리겠다'고 했어요. 나는 안하겠다고 했는데, 주변에서 내가 안하면 폐업한다고 하니까, 같이하자고, 잘 할 수 있다고 그랬어요. 고민하느라 그때 일주일이나 새벽 기도를 나갔어요. 사람들이 저렇게 하자고 하고, 애들 가르치는 것도 재미있고 하니 한번 해보자.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고 학원으로 나선 거죠. 그게 2000년 초반이에요."

- 대학교에 남았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학계가 뻔해서 같은 전공을 하는 교수 티오(TO)가 나오는 걸 보거든요. 내가 학교를 떠나고 6개월 뒤에 부산대에서 티오가 나왔더라구요. 제가 한국에 와서 총장만 만난 게 8번이에요. 총장을 만났다는 것은 파이널 인터뷰(final interview)에요. 총장 만난 게 8번인데 다 떨어졌거든요. 서울대에 있으면 뻔히 보이기 때문에 이번에 총장한테 갈 때에는 안 될 것을 알아요. 나보다 논문수도 많고 졸업도 먼저 한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러다 보면 내 앞이 다 없어져요.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그 다음은 내 차례에요. 근데 바로 6개월 있다가 부산대에서 핵물리실험 교수를 뽑는다고 나왔더라구요. 내 차례였거든요. (학원으로 안가고 대학교에 남았다면) 아마도 부산대 교수가 돼 있었겠죠."

- 학원을 운영하면서도 계속 노래는 만들었나요?

"그 10년 동안은 못 만들었죠. 10년 동안은 쓸 수가 없었어요."

- 그래도 2005년에 음반을 내긴 했는데요.

"그것은 1998년까지 썼던 노래들을 모아서 낸 음반이에요. '벗이여 해방이 온다'도 음반화 된 적이 한번도 없었구요. 노찾사도 음반에 그 노래를 수록하지 않았으니까요. '귀례이야기' 빼놓고 제 노래들 중에 음반화된 노래들이 거의 없었어요. 한번도 음반으로 발표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솔직하게 그때는 돈도 좀 벌었겠다, 그래서 계속 음악을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유작사업 같은 걸로 한 거죠. 내 노래들이 있는데 음반화된 적이 없으니까 이번에 음반화하고 쫑 하고 다시는 음악 하지 말자고 생각했죠. 미국에서 만든 노래 등 그동안 했던 노래들을 다 모아서 정리하자는 의미로 낸 거예요.

당시 한국에 있는 대학 후배들, (김)창남이형도 불렀고, (조)경옥이 누나도 했고, 그 다음에 메아리 동기들과 후배들, 민중가수 하고 있는 후배들, 노찾사 후배들, 여러 대학 후배들이 같이 불렀거든요. 내가 지정해서요. 나는 안 부르고, 여러 사람이 같이 품앗이로 불러서 기념음반을 만든 게 2005년 음반이죠."

"지금까지 했던 방식의 음악은 그만하고 싶어요"
 
'벗이여 해방이 온다'의 작가.작곡자인 이창학씨는 미국으로 건너가 물리학을 공부하는 한편  '우리문화찾기회'에서 활동했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의 작가.작곡자인 이창학씨는 미국으로 건너가 물리학을 공부하는 한편 '우리문화찾기회'에서 활동했다.
ⓒ 이창학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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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는 학원사업도 정리했는데 앞으로도 계속 노래를 만들면서 살 생각인가요?

"그건 모르겠어요. 이번에 음반 내는 바람에 고민을 좀 해봤어요. 더 할 얘기가 있을까? 한다면 어떤 얘기를 할까? 여기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의 방향이 잡혀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까지 했던 방식의 음악은 그만하고 싶어요. 새로운 음악적 자극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음악적 자극을 얻고 변화될 수 있어야지 그 다음 음악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은 저걸로 일단 접고 가고 싶어요."

- 그동안 노래는 많이 만들었지만 직접 노래를 잘 부르지는 않았는데 혹시 노래를 직접 불러볼 생각은 없나요?

"다른 사람들은 잘한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노래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서(웃음). 생각해보세요. 예전에 치환이가 옆에 있었고, 선애가 있었고, 광석이가 있었어요. 걔들하고 비교하면 내가 잘한다고 함부로 생각할 수 없죠. 내가 치환이나 광석이보다 기타를 잘 친다고 할 수도 없구요. 그나마 쟤들보다 좀 할 수 있는 건 노래 만드는 일이에요."

- 지금 이 순간 한 곡만 불러야 한다면 어떤 노래를 부르고 싶으세요?

"'벗이여 해방이 온다'에요. 제 마음이 많이 담겨 있던 노래니까요. 제 곡이 음역도 넓고 해서 가수를 고문시키는 노래라고 해요. 그나마 제가 부르기에 제일 편한 것이 '벗이여 해방이 온다'에요. 저를 가장 잘 담고 있는 노래이고, 열과 성의를 들였던 노래이기도 하고, 가장 솔직한 것을 잘 담고 노래기도 해서요."

- 젊음의 한 시기를 '민중음악'이라고 부를 만한 노래들을 만들었고, 그 당시에는 그런 민중음악들이 대중들에게 널리 불려지고 사랑받았는데 민중음악이라고 할 만한 노래들이 거의 사라진 것 같아요. 물론 지금도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아쉬움은 없을까요?

"근데 시대가 변했잖아요. '메아리'는 아직도 서울대에 있거든요. 고대 '노래얼'도 있을 거예요. 제가 메아리 동문회장을 오래 했는데 후배들과의 연결이 끊어진 지 오래에요. 처음에는 어떻게든 같이해보려고 했는데 차이도 많이 나는데다가 애들은 그냥 '밴드'에요. 말 그대로 그냥 밴드고, 음악도 특별한 음악이 없어요. 그냥 좋은 노래를 하는 밴드에요.

그러니까 대학에 들어가 저를 노래운동에 나서게 했던 동아리 자체가 변했다는 것, 그것 자체가 큰 얘기를 해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이 변한 거죠. 말하는 방식도 변했었어요. 말하는 방식들이 잘 변했으면 조금 세련되게 변해가면서 아직도 말할 게 있으니까 영향력을 가지면서 어느 정도 버틸 수는 있었을텐데.... 그렇게 노력하는 민중가수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대부분 보면 세상은 변했는데 옛날 방식으로 말하고, 관성으로 가면서 (스스로) 영향력을 잃어간 것도 큰 것 같아요."

"민중가요를 붐 업 시키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1985년 명동성당에서 했던 '녹두벌에 다시 살아' 공연을 시작하기 전 노래 함께 부르기를 지도하는 이창학씨. 이씨는 이 공연에서 '부활하는 산하'를 발표했다.
 1985년 명동성당에서 했던 '녹두벌에 다시 살아' 공연을 시작하기 전 노래 함께 부르기를 지도하는 이창학씨. 이씨는 이 공연에서 '부활하는 산하'를 발표했다.
ⓒ 이창학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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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트로트 전성시대'인데요 어떤 생각이 드세요?

"트로트 전성시대는 <TV조선>의 기획이잖아요. 들을 음악이 없는 연령층 50-70대를 딱 치고 들어가서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전성시대를 만들어낸 거죠. 잠재적인 수요자층이 있었잖아요. 트로트 전성시대가 지금같은 대규모 영향력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젊은 수요자층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젊은 세대 쪽으로 파급력이 있거나 확장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우리도 전성시대는 아니지만 40-50대들에게 잠재적 수요층은 있다고 봐요. 트로트가 그랬던 것처럼 옛날 것을 향수하는...."

- 민중가요 진영에서도 '미스 트롯'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아직 '그 시대의 그 노래들'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트로트 붐이 일어나기 전에 트로트 가수들이 많았어요. 안 떴다고 할 수 없지만, 행사에 잘 통하는 가수들이 있었거든요. 그 가수들을 내세워 트로트 중흥기가 왔을까? 아니었거든요. 신인들을 발굴했고,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큰 이슈몰이를 했고, 매스컴을 통해 쇼를 만들어서 집중시켰고, 구구절절한 불쌍한 사연들로 스토리를 만들어 냈고, 젊은 애들이 트로트를 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부각시켰잖아요. 그리고 옛날 최고의 스타였던 남진과 주현미까지 소환했잖아요. 이것까지 결합시키면서 쇼를 붐 업(boom up)시킨 거죠.

지금 민중가요 한다는 친구들이 많이 있거든요. 이 친구들이 해온 것들을 존중하는데 향수를 자극해서 붐 업 시키려고 하면 확장력이 있어야 해요. 트로트처럼 젊은 사람들이 이걸 부르려고 할 거냐? 저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이것을 붐 업 시키는 게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게 트로트와 똑같이 확장적이지 않으니까요."

- 마지막으로 약 40년의 노래인생에서 꼭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책에는 '문승현', '조경옥', '윤선애', '김광석', '이산하' 등이 나온던데요.

"광석이에요. 걔는 유명가수 이런 거를 떠나서 착했었어요. 그냥 겸손하고 착한 친구였어요. 그래서 그냥 보고 싶죠. 걔를 처음 만나서 같이한 게 노찾사 1집 할 때였는데, 그때는 거의 매일 보다시피했어요. 내 기억에는 겸손하고 장난기 있고 착했던 친구죠. 변혁운동에 대한 생각은 없었지만 음악에 대해서는 열정이 많았어요. 나는 정치적으로는 열정이 있었고 음악도 좋아하긴 했지만, 광석이만큼은 있지 않았어요. 걔는 어마어마한 애정이 있었어요. 기타 하나 하나도 너무 소중하게 다루고.

또 가수로서 성공하려는 의지도 강했고, 보통 그러면 거슬릴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전혀 거슬리지 않고, 되게 겸손하고 항상 유쾌하고, 장난기 있게 얘기하고, 궂은 일도 지가 다 하고. 한 번도 뽐낸 적이 없어요. 음악적 열정이나 애정이 어마어마했던 친구로 기억해요. 세상을 달리 했으니까 더 보고 싶네요. 처음 봤을 때 운동권 같지 않았는데, 처음 봤을 때 그런 선입견이 있잖아요. '저런 날라리 같은 애가 어떻게 여기에?'라는. 근데 알고 나면 속이 아주 여리고, 착한 친구였어요. 마음이...."
 
'벗이여 해방이 온다'의 작사, 작곡자인 이창학씨가 만든 최신곡 '노래여 내 사랑이여'의 악보.
 '벗이여 해방이 온다'의 작사, 작곡자인 이창학씨가 만든 최신곡 '노래여 내 사랑이여'의 악보.
ⓒ 건강미디어협동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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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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