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시민기자들이 '점심시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씁니다.[편집자말]
얼마 전, 부서 이동으로 6년 간 몸담았던 부서를 떠나게 되었다. 때가 되면 움직이는 게 직장인의 숙명이지만, 새로운 업무와 사람에 적응할 일이 막막했다. 14년간 이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업무 분야를 맡게 되었는데, 마침 가장 바쁜 시기에 발령이 나서 요즘 눈 코 뜰 새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여태껏 해 왔던 업무와 다른,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것은 꽤 좋았다. 배움을 즐기는 편이기도 하고, 해 보고 싶다고 막연히 희망을 품었던 분야의 업무를 맡게 된 이 기회가 감사했다. 하지만 매사 모든 것이 다 좋을 수 있을까. 업무는 재미도 있고 괜찮은데, 업무 환경과 시스템 등 다른 부분이 마냥 좋을 수는 없었다.

'부서 이동'이라는 미션

예전 부서에서는 각각 맡은 담당 업무가 있어서 독립성을 기본으로 한 협업이 가능했다면, 지금 부서는 하위 직급 1인의 노동에 의해 많은 것들이 굴러간다. 물론 그 1인은 바로 나다. 민원을 상대하면서 한창 바쁜 철인 담당 업무를 하고, 외근도 다니고 상사들도 보조한다. 하루, 한 주가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일을 겪는 중이다.

아침에는 밝고 힘차게 업무를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급하고 몸과 머리는 지쳐간다. 천천히 하려면 쌓인 일, 갑자기 터지는 일을 다 감당하기 어렵고, 급히 빨리 하다보면 정확도도 떨어지고 체력이 금세 소모된다. 일을 하다보면 달달한 음식이, 퇴근 후에는 매콤한 음식이 자꾸 당긴다. 지난 몇 주 사이 체중도 살짝 늘었다.

수시로 울리는 전화, 자꾸만 밀려드는 업무를 쳐내느라 어둑해져서야 너구리같은 얼굴로 퇴근하는 나날의 반복인 한 주였다. 푹 쉴 수도 없건만 주말이 얼른 오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그런데 아직도 목요일 아침이었다. 내일이면 금요일이라는 설렘 대신 '아직도 하루 남았어?' 투덜대며 출근길 지하철에 올랐다.

그날은 마침 시내에 외근을 가야 하는 날이었다. 이동으로 인한 업무 시간 손실을 최대한 줄이고자 외근지로 곧장 출근했다. 볼일을 마치고 회사가 있는 지하철역에서 막 내리려는데, 방금 방문한 기관에서 다시 와 달라는 요청이 급히 들어와 두 번을 왕복하고 나니 사무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때였다. 가방에서 진동이 느껴져 휴대폰을 꺼내보니 메시지가 한 통 들어와 있었다. 지난 부서에서 상급자로 모셨던 분이 보낸 문자였다.

"혹시 통화 괜찮아요?"

전화를 해 보니 상급자도 외근을 가셨다가 회사로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오늘 시간 되면 점심이나 한 끼 합시다."
 
회사 동네 햇살 맛집에서의 한끼
▲ 햇살맛집의 인기메뉴 삼총사 회사 동네 햇살 맛집에서의 한끼
ⓒ 박은정

관련사진보기

 
지난 부서에서 함께 생활했던 동료 여직원과 함께 상급자와 정한 약속장소로 갔다. 회사 앞, 최근에 생긴 브런치 식당이었다. 사내 정보지에 따르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나온 표현처럼 이 동네 '햇살 맛집'이라고 했다. 

식당 곳곳에 놓인 초록의 화분과 화병, 꽃무늬 장식보, 레이스 커튼 같은 것들이 서로 튀는 것 같으면서도 조화롭게 어울려 있었다. 테두리에 금을 둘렀거나 나비와 꽃이 만발한 차 주전자와 컵 세트, 접시들은 주인의 취향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가구, 꽃, 나무,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충분히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공간이었다.

이미 한번 와 본 동료 직원의 추천에 따라 가장 잘 나가는 브런치 메뉴 두 가지와 태국식 볶음밥을 시켰다. 점심 메뉴에는 커피도 제공되었다. 살짝 더워서 만장일치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주문이 들어가고 얼마 안 있어 나온 컵 속 얼음은 장미 봉오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왠지 커피에서 은은한 장미향이 풍겨오는 것만 같았다.

음식도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주문이 들어가면 주인이 직접 요리를 하는 시스템이라 시간은 좀 걸렸지만 정성스러웠다. 사이좋게 음식을 나눠 먹으며 일,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직급이 높은 분이지만 공적으로는 분명하고 사적으로는 편안한 분이다. 상급자는 더 먹고 싶은 것은 없는지 거듭 묻고 확인했다. 이미 충분히 배가 불러 정중히 사양했다.

마음의 여유가 필요한 이유

식사를 하는 동안, 지금 내가 겪는 어려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경청하는 것뿐만 아니라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할 능력과 부하 직원의 욕구를 살피며 챙기는 상급자의 존재가 간절했다. 자신이 총괄하는 업무를 제대로 알고 있으면서 하급자가 겪는 문제나 한계에 대해 조언해줄 상급자가 직장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존재인지 새삼 깨달았다.

아직은 서툴지만 새로운 일은 어떻게든지 적응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업무가 나의 노동에 기대어 있다는 것, 많은 어려움을 혼자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부담감과 막막함이 버겁고 외로웠다. 돌덩어리 하나가 통째로 가슴에 박힌 것만 같았는데 점심을 먹는 동안 그 돌덩어리의 존재를 잠시 잊었다.

어느 가을 목요일의 점심시간, 하얀 타일이 깔린 환한 식당 안까지 햇빛은 아낌없이 비추고, 너른 창밖 하늘은 눈부시게 파랗고, 건너편 나무들이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식당 안은 초록과 꽃무늬들이 어우러져 편안하고 따스했다. 주인이 오래 아껴 온 것들이 내뿜는 밝음, 온기,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한 가운데 서서히 마음의 돌덩이를 내려놓았다.

맛있고 편안한 점심 한 끼가 지금 나의 어려움을 말끔히 해결할 수는 없다. 잠시 그것을 잊게 해 주는 위로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계속된다. 그렇지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누군가와 밥 한 끼 덕분에 다시 희망을 품고 '한 번 더 해 보자'를 다짐하며 어렵게 한 걸음을 뗄 수 있는지도 모른다. 가끔 너무 힘이 들면 다시 그 위로를 찾아 지친 마음을 달랠 수도 있을 것이다. 
 
의자 밑 조각그늘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고양이
▲ 한낮의 고양이 의자 밑 조각그늘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고양이
ⓒ 박은정

관련사진보기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테라스에 고양이 한 마리가 의자 밑 조각 그늘에 느긋하게 엎드려 있었다. 밥을 먹기 전에 그 고양이를 봤다면 살짝 질투가 났을 것 같다. 하지만 방금 전 든든하고도 맛있는 점심 한 끼를 막 선물 받은 참이었다. 질투와 푸념을 대신해 이 가을이 참 아름답다는 걸 느낄 마음의 공간이 한 뼘 생겨나 있었다.

오래된 골목길을 셋이 나란히 걸으며 회사로 돌아가는 길 저 끝에 걸려 있는 파랗고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당장 한 치 앞만 보면 길은 아무렇게나 뱉은 껌 자국과 좁은 길에 빼곡히 주차된 차들로 어지러웠지만, 조금 멀리 바라보면 이렇게 눈부신 가을 하늘이 내 앞에 펼쳐져 있다. 조금 더 자주 하늘을 바라보며 이 가을을 보내볼까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저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시민기자들이 '점심시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씁니다.
태그:##우리들의점심시간, ##목요일의점심, ##소풍같고산책같았던점심한끼, ##지친마음에위로와용기를주는점심한끼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