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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모농숲'에 상추를 심고 있다.
 봄날 "모농숲"에 상추를 심고 있다.
ⓒ 피스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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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던 여성 뮤지션이 숨을 거두고 변희수 하사의 부당한 죽음을 목격하면서 '너의 내일을 우리가 지킬게' 깃발을 들고 닷페이스 온라인 행진을 펼치던 2021년 3월. 그해 겨울은 꽤 혹독했던지라 겨울 끝자락에서 만난 봄은 더없이 좋았다.

퇴사 후 시간이 많아졌다 느끼던 때, 제로웨이스트샵 은영상점을 운영하던 나현이 "친구들끼리 텃밭 농사해보려고 하는데 함께 할래?"라고 제안을 해왔다. 친구들끼리 뭘 한다는 것도, 그 '무엇'이 텃밭이라는 것도 기뻤다. 

처음 텃밭에 간 날,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아이돌 그룹 젝스키스의 무대 복장 같은 펑퍼짐한 노랑 우비를 꺼내며 모카가 말했다.

"비가 오는 게 오히려 좋아요. 모종과 씨앗을 촉촉한 땅에 심으면 땅속에 잘 자리 잡을 수 있을 거예요." 

예술가, 프리랜서, 자영업자,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이었던 우리는 텃밭을 매개로 처음 모였고, 농사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재밌겠다'는 생각 하나로 대전역 옆에 있는 시장에서 토마토, 고추, 케일, 고수 등 모종과 씨앗을 하나씩 샀다. 그저 우리가 좋아하는 작물을 수확할 날을 설레며 상상할 뿐이었다. 모르는 것투성이지만 재밌고 설레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여름 '모농숲'에서 감자를 수확하던 날의 모습이다.
 여름 "모농숲"에서 감자를 수확하던 날의 모습이다.
ⓒ 임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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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인 방식으로 농사짓는 다른 친구들 보니까 밭고랑을 직선으로만 하지 않고 곡선으로도 하더라고. 우리도 여기 모퉁이는 곡선으로 고랑들을 연결해볼까?"

그렇게 조금씩 우리만의 텃밭을 꾸렸다. 봄은 떠나가고 여름이 찾아올 무렵에는 울타리 용도를 겸할 옥수수를 심었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는 풀을 뽑고 땅에 물을 주면서 모기에 물렸다. 소소한 노동력을 잠깐씩 쏟았지만 여럿이 밭을 가꾼 덕에 밭은 무사히 살아가고 있는 듯했다. 

그 당시 밭 이름도 정했다. "모여봐요 농사의 숲"을 줄여 '모농숲'이라고 지었다. 귀여운 게 꼭 우리를 닮아 마음에 쏙 들었다. 모농숲 친구들은 저마다 삶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이들이라 조금씩 바빴다. 시간을 맞추어 함께 밭으로 향하기가 쉽지 않았다. 밭을 예쁘게 하고 벌이 잘 모이도록 꽃도 심어보자, 여름에는 매실청도 담가보자 하는 귀엽고 씩씩한 약속들을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모농숲은 무사히 살아갔다. 어느새 연두색 토마토가 맺혔다. 잠시 시들했다가 다시 살아나는 가지도 있고, 씨앗에서부터 흙위로 힘차게 자라난 고수를 보며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고추와 토마토는 지지대를 설치해야 한다고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고 동네 다른 밭들의 모양을 참고삼아 작은 잎들과 곁가지를 따고 지지대를 설치했다. 여름에 고구마를 심어야 겨울에 비건김치 얹어 먹을 수 있다고 해 고구마 모종도 심었다. 
 
여름날 '감자파티' 열면서 노래도 불렀다.
 여름날 "감자파티" 열면서 노래도 불렀다.
ⓒ 임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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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우린 수확다운 수확을 했다. 모농숲에 직접 심은 감자의 양이 매우 적어 우리는 모카가 통 크게 심어놓은 감자들을 함께 수확했다. 수레에 한가득 싣고도 양이 넘쳐 상자에도 넣고, 근처에서 일하는 공사현장의 노동자분들에게도 가져가라고 권했다. 그만큼 '감자 풍년'이었다. 

푸짐한 감자들을 함께 나눌 감자파티를 열었다. 모카네 집에 놀러 온 외국인 친구들과 대전에서 문화예술 하는 친구들이 한데 어울려 감자요리를 해 먹고 노래를 불렀다. 돌이켜보면 찬란한 여름의 순간이었다. 
     
가을 끝자락 찾아간 '모농숲'
 가을 끝자락 찾아간 "모농숲"
ⓒ 임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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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프리랜서, 예술가를 비롯한 많은 노동자가 가장 바쁜 계절이었다. 모농숲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지자 나는 작은 공허함을 느꼈고, 가을이 거의 다 지나갈 무렵 모농숲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인적이 드물었던 모농숲에서 고추와 가지, 호박, 고구마 등은 여전히 잘 자라고 있었다. 갈색 풀들이 무성하게 뒤덮인 곳에서 말이다.
     
고구마가 새빨갛게 잘 여물었으나 산에서 내려온 동물들 먹으라고 놔두고 고추, 가지, 호박만 챙겨와 된장에 볶아먹고 올리브유에 튀겨먹었다. 땅에서 수확한 야채를 직접 조리하는 우리를 발견하자 '경이로움'이란 감정이 몸으로 절로 새겨졌다.

겨울이 될 무렵, 원댕이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일군 무와 배추를 사다가 '비건 김장 파티'를 열었다. 마당을 내어주고 동네 어르신들을 연결해준 모카의 너른 품에 감동받으면서 대전 지역에 사는 비건 친구들을 열댓 명 초대했다. 처음 하는 김장이면서 기획자의 역할까지 자처한 나는 다음 날 결국 몸져누웠었다. 그럼에도 피곤함을 훨씬 뛰어넘은 즐거움과 뿌듯함은 여전히 큰 힘이 되어 남아있다. 
 
'모농숲' 땅을 내어준 모카의 집 앞마당에서 비건 김장 (노동) 파티를 진행한 모습이다.
 "모농숲" 땅을 내어준 모카의 집 앞마당에서 비건 김장 (노동) 파티를 진행한 모습이다.
ⓒ 임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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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엔 잘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면서 비건 음식을  해먹던 어느 날, 나는 모농숲 주민을 새롭게 모집해 생태텃밭 공동체를 새롭게 꾸려보고 싶다고 다짐했다.

주위 사람들은 "재밌겠다", "응원해", "그게 뭐야?", "함께할게" 등 가지각색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하고 싶은 것 맘껏 하면서 살아갈래'라는 마음의 힘을 품을 수 있었던 건 작년 한 해 나를 품어줬던 모농숲 친구들(땅, 사람, 야채 그리고 모카) 덕분이었다.

그렇게 올 한해 나는 모농숲을 중심에 두고 '피스어스'라는 에코페미니즘 커뮤니티를 꾸려 자연과 우리를 서로 돌보는 생활을 이어 나갔다. 여성, 생태, 예술을 유보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오래되고 막연했던 다짐은 어느새 내 생활의 중심에 자리잡혀 있었다.
 
올해 봄, '피스어스'를 통해 쑥을 캐서 쑥버무리 해먹는 '쑥떡쑥떡'을 열었던 날. 새로운 친구들이 모여 놀았다.
 올해 봄, "피스어스"를 통해 쑥을 캐서 쑥버무리 해먹는 "쑥떡쑥떡"을 열었던 날. 새로운 친구들이 모여 놀았다.
ⓒ 임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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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대전 에코페미니즘 커뮤니티 '피스어스'는 공유텃밭 커뮤니티 '모농숲'을 중심으로 계절 따라 놀기 등 제철 행사를 비롯해 뜨거운 뜨개방, 줍깅, 여성, 생태 책읽기 모임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인스타그램 @peac.e_e.arth 을 통해 소식을 접할 수 있다.


태그:#피스어스, #모농숲, #에코페미니즘, #공유텃밭, #퍼머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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