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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9일 제주4.3사건 희생자에 대한 국가차원의 보상 기준을 규정한 '제주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습니다. 민간인 집단 희생 과거사 사건 중 법원 판결이 아닌 국회 입법으로 피해 보상을 해주는 사례는 제주4·3사건이 처음입니다.

국가에 의한 폭력은 돈으로 모두 회복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제주에서 삶을 살아갔던 이들이 어떤 폭력의 순간들을 통과했는지 우리는 선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1940년 태어나 1948년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었지만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입니다. 엄마의 시점으로 출발했던 이 글은 8회 이번을 마지막으로 마무리합니다. 그간 엄마의 이야기와 4.3의 역사에 관심을 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10대를 보내는 마지막 나의 역할은 어머니 사후 뒷정리였다

나의 10대 마지막 역할은 어머니 사후 뒷정리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안 사정을 찬찬히 살펴보니 빚이 꽤 있었고 어머니 상을 치루기 위해서도 상당한 돈이 필요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500평 정도의 밭을 팔기 위해 내놓았다. 밭이 팔리자 그 돈으로 빚을 어느 정도 갚고 대상, 소상 등 어머니 3년 상을 치뤘다(관련 기사: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나의 10대는 끝났다).

그리고 어머니 사망신고를 하려다 보니,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호적에 올라와 있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관공서로 찾아가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가며 두 동생을 호적에 올렸다. 군 생활 중이던 오빠는 어머니 대상을 끝내자마자 이웃 마을에 사는 여자와 결혼식을 올렸고 마침 땅을 판 돈이 수중에 남아 있어서 오빠 결혼식까지 어찌 어찌 치룰 수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부모를 모두 잃은 우리 남매들을 불쌍하게 여기며 많이 챙겨주었지만, 나는 우리를 불쌍하게 쳐다보는 그 시선이 죽도록 싫었다. 몸이 아픈 엄마였지만 살아계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그 사실을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았다.

고생했지만 고향사람들과 함께 있어 외롭지 않았다

어머니 3년 상을 끝내던 해, 가을걷이가 끝나자 나는 올케언니에게 집 살림을 부탁하고 돈을 벌기 위해 다시 육지로 올라왔다. 오빠는 여전히 군 생활 중이었다. 육지로 올라왔지만 막막하기만 했다. 봉제공장이 많은 서울 창신동으로 갔는데 다행히 그곳에서 일할 공장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온 제주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그들은 동향이라고만 하면 누구나 의심 없이 받아주었다. 나도 다행히 고향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었고 우리는 가족처럼 옷이나 필요한 것들을 함께 나누면서 서로 의지하고 살았다.

창신동 봉제 공장에서 일하던 나는 당시 꽤 이름 난 경성방직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예전 방직공장에서 배웠던 기술을 떠올리면서 시험에 응시했다. 실을 붙이는 시험이었는데 일곱 개를 붙이면 합격이었다. 운 좋게 딱 일곱 개의 실을 붙여 합격했다. 당시 '이제 밥은 먹고 살겠구나' 생각하면서 어찌나 기분이 좋았던지 모른다.

하지만 막상 공장에 취직해서 기계 앞에 서자 상황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기계에서 쏟아져 나온 실은 제 때 작업을 못하자 마구 엉켜버렸고, 책임자는 '저것도 기술자라고 뽑았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기계부속을 잡고 손에 잡히는대로 나를 향해 마구 던졌다.

지금 같으면 그런 것이 폭력이라고 고발이라도 했겠지만, 당시에는 그저 무섭고 두려울 뿐이었다. 다행히 그 때 책임자가 던진 것들에 맞지는 않았지만 그가 던진 욕 한바가지가 나의 마음을 이리저리 쑤시며 깊은 상처를 주었다. 눈물이 범벅된 상태에서 견디며 일을 하다 보니 조금씩 실력이 나아졌다.
 
대한방직 대구공장 모습(자료사진)
 대한방직 대구공장 모습(자료사진)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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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누군가가 금성방직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알려줬다. 경력을 쌓고 다른 곳으로 옮기면 더 나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금성방직으로 옮길 수 있었다. 금성방직에 들어가서도 처음에는 일이 서툴러서 욕을 많이 먹었다. 책임자는 기계를 갖다 줘도 기계를 제대로 돌릴지 못한다고 구박했다. 그래도 2~3년의 시간이 지나자 꽤 일에 능숙해졌고 나는 실 잇는 작업 단계 다음으로 실 뽑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근무는 보통 3교대로 진행되었는데 아침 6시에서 오후 2시 조, 오후 2시에서 밤 10시조, 밤 10시에서 새벽 6시 조로 나뉘었다. 항상 잠자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공장의 기계는 365일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야만 했다.

금성방직에서 일이 익숙해지니 금성방직이 있는 안양 생활에도 정이 들었다. 제주도 사람 여럿이 모여서 사니 외롭지 않았고 매월 정기적으로 월급도 따박따박 들어왔다. 하지만 아무리 잔업을 하고 야간 근무를 많이 해도 노란봉투로 받은 월급은 하숙비 내고 생활비로 사용하다보면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돈을 저축하려고 했다.

동네 동갑내기 의옥과의 만남

나와 같이 생활하고 있던 동네 사람들은 서울에 공부하러 올라와 있던 고향 사람인 재수, 종수, 상균이 삼촌 등과 주말이면 만나서 자주 여기 저기 놀러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은 고향사람들 만나는 자리에 나중에 남편이 된 의옥이 나와 있었다.
나와 의옥은 어릴 때 한 동네에서 자라긴 했지만 같이 어울려 놀았던 친구는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들려준 말에 따르면 의옥은 제주중학교를 졸업하고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어려운 형편 탓에 제대로 학교에 다니고 졸업할 형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국회의원 출마도 하고 일본 거류민단 대표도 맡았던 먼 친척 동네어른인 김진근 삼촌이 도움을 주어서, 그는 간신히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의옥과 김진근 삼촌의 아들인 용휴는 어릴 적부터 이웃에 나란히 살았던 죽마고우였는데 당시 중앙대 학생이었던 용휴는 제주에 계셨던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흑석동에 살고 있었다. 의옥은 용휴를 만나러 서울로 오기도 했었고 당시 큰 교통사고를 당한 동생이 서울에서 대수술을 몇 번 받아야 했기에, 그 때문에 자주 서울을 드나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의옥이 서울로 자주 드나들면서 고향사람들 만나는 자리에도 나오는 기회가 많아졌고 나와도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하지만 서로 친하게 지내지는 않는 사이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의옥이 먼저 따로 만나자고 데이트를 신청하였다.

의옥의 집안은 동네에서도 복잡하기로 소문난 집안이었다. 4.3때 형이 죽었고 다섯 명의 오촌 형제들이 몰살당했다.

당시 의옥의 아버지는 4.3 당시 집안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아, 동네 사람들 손을 빌어서 일가친척들의 시신을 거두어야 했다. 시신을 거둔 후에도 생사를 달리한 친족들의 제사를 모두 맡아 지내야 했으니 그 집안 사정을 알고 있는 이라면 누가 그와 선뜻 결혼할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복잡한 집안 사정 외에도, 동네에서 나보다 나이 많은 오빠들과만 어울려 놀았던 나에게 동갑인 의옥은 어리게만 느껴졌다.

그런 여러 가지 점들 때문에 나는 의옥의 교제 신청이 그리 달갑지 않았고 결국 거절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의옥이 술에 만취해서 괴로워한다는 소식을 자꾸 전해주는 것이었다. 마음 약한 나는 동정심도 생기고 '그 사람이 나에게 진정으로 마음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결국 조금씩 마음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하루는 그를 만나서 말했다.

"나는 빚도 많고 해서, 결혼한 후에도 1년 정도는 지금 공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어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생각해보겠다."

의옥은 나의 조건을 다 받아들이겠다고 했고, 나는 그의 청혼을 승낙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경찰서에 갇힌 의옥

공장을 더 다니기로 약속하고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기에 나는 휴가를 내고 제주에 내려갔다. 하지만 목포에서 제주로 향하는 배를 타기로 한 날 파도가 너무 세서 배를 탈 수 없었고 결국 배가 뜨기를 기다리며 1주일이나 목포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간신히 파도가 잠잠해져 배를 타고 제주로 가기로 한 날, 의옥은 나를 마중하러 동네 친구, 형들과 함께 부두로 왔다.

다방에 앉아서 배의 도착을 기다리던 중 다소 뻣뻣한 성질을 가진 이가 다방에 있던 다른 손님들과 시비가 붙었다. 그러자 다방 주인이 바로 신고를 했고 결국 의옥 일행까지 부두와 멀지 않은 경찰서에 갇혀 꼼짝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 사정도 모르고 어두운 밤에 배에서 내린 나는 마중 나올 이를 기다리며 한참을 부둣가에서 서성였다. 11월 말이어서 캄캄한 어둠 속 거센 바람과 함께 파고드는 한기는 더욱 매서웠다. 날은 점점 어두워져만 가고 혼자 집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자, 결국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의옥의 집안은 결혼 날짜가 코앞인데 신랑이 경찰서 신세를 지게 되어서 애만 동동 태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동네에서 가장 명망가인 김진근 삼촌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의옥은 간신히 결혼식 전에 경찰서에서 나올 수 있었다.

김진근 삼촌은 1960년 국회의원 선거에 나왔는데 당시 경쟁 상대였던 고담룡에게 아슬아슬한 표 차이로 당선되지 못했다. 당시 제주 오도롱(마을)은 똘똘 뭉쳐서 김진근 삼촌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게 힘썼는데 동네에서 세 사람이 고담룡을 찍었다고 한다. 모두 고씨 집안이었는데 투표 전부터 그들은 고담룡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고 한다.
 
 "제5대 민의원 선거는 제주시 6명, 북제주군 6명, 남제주군 7명 모두 19명이 입후보하여 6.2 대1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제주시선거구 민주당 고담용, 북제주군선거구 민주당 홍문중(洪文中), 남제주군선거구 한국사회당 김성숙(金成淑)이 각각 당선되었다. 선거 후인 10월 28일 제주시선거구에서 당선된 고담용은 선거법위반으로 서울고법에서 준기소명령을 받았다. 서울고법은' 고담용 후보가 선거 기간 동안 김진근(金晋根) 후보를 조총련계의 좌익분자라고 한 것이 당락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인정 된다'고 하였는데, 고후보와 김후보와의 표 차이는 771표였다. 이 사건은 법원에 계류 중 5·16군사쿠데타가 발발하여 국회가 해산됨으로써 결말이 나지 않았다. ('제주 오현고 50년사' 7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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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 공회당에서 의옥과 결혼식을 올렸다  .
ⓒ 김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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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은 공회당에서 일가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치러졌다. 결혼식 때 오빠가 이런저런 세간살이를 해준다고 했지만, 오빠네 사정도 어려운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에 나는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결혼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혼수 같은 것을 해오지 않더라도 받아줄 수 있는 남자한테 시집가겠다고 공언했고 의옥은 그런 것을 다 받아주겠다고 한 남자였다.

결혼하면서 내가 준비한 것은 나무찬장과 궤 정도였다. 이불도 준비했는데 돈이 없어서 좋은 솜이불을 준비하지 못하고 공장에서 저렴한 솜을 구해서 이불을 장만했지만 결국 나쁜 솜이어서 오래 사용하지 못하고 버려야 했다. 그 때 남편은 내가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었다. 결혼 후 1년 동안 다시 육지에 올라가서 일해야 하는 것, 결혼할 때 친정에 손을 빌리지 않겠다는 것 등 말이다. 그 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고맙다.

결혼식이 끝났지만 우리는 신혼여행을 갈 엄두는 언감생심 내지도 못했고 나는 바로 금성방직에 다니기 위해 안양으로 올라와야 했다. 결혼 후에도 금성방직에서 1년 정도 더 일하자 나는 만 5년을 채울 수 있었고 퇴사할 때 받은 퇴직금으로 그간의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남편이 있는 제주로 내려왔다. 제주로 내려오는 배 위에서 나는 이전의 가난했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보리라 단단히 다짐했었다.

태그:#43, #엄마, #제주, #오도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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