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22년 9월 16일 비가 내리는 저녁, 청년의 생존과 행복을 논하는 수원청년정책포럼에서 초대를 받았다. 어느 샌가부터 '불안'과 '두려움'이 한국청년들의 대표 심상으로 자리 잡은 세태 속에 행복을 탐구하는 공론장이 있다는 소식이 기껍게 다가왔다.

발제를 위해 앞선 모임들의 대화록을 살피다가 '불안과 두려움'이 '위험 신호를 나타내는 경고'라는 문장을?발견했다. 아마 그 날 참여했다면, '행복의 부재는 곧 생존경쟁에 내몰린 청년들의 위기를 상징하며, 청년들이 느끼는 불안은 우리 사회가 처한 위기를 경고하는 메시지'라고 덧붙이지 않았을까 한다. 일정량 스트레스는 감내할 필요가 있지만, 오늘날 청년세대가 느끼는 스트레스는 과잉을 넘어 치사량에 도달했다. 과도한 불안이 병리적 우울로, 심지어 자살까지로 이어지고 있다. 인간군집의 총체인 사회가 직면한 위험수준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기자말]
불로소득이 노동가치를 압도하고 있는 시점에서 생애과업 이행을 위해 확보해야 할 자원들은 더욱 편중되어가고, 개인 간·집단 간의 사회 갈등이 식을 줄 모르고 날로 첨예해지고 있다. 서울수도권의 치열한 삶에 피로함을 호소하다가도 인스타그램을 스크롤하며 현실로 느껴지는 이질감에 자괴하는 건 시장경제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만의 몫은 아닐 거다.

많은 청년들이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데 자극적이고 화려한 연애프로그램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참 이상하다 싶다가도, 날로 가중되는 자산·소득격차와 사회양극화를 돌아보면 수긍이 갈 법도 하다.

여느 어르신들은 '밥도 배불리 먹고, 추위에 내앉을 일도 없으면서, 왜 요즘 것들은 나약하게도 불안과 우울을 호소하고 있는지' 의아해 한다. '스펙쌓기에 몰두하던 청춘이 비뚤어진 엘리트주의로 점철되었다'며 한탄하던 이들은 건실한 줄만 알았던 여느 청년의 자살기도에 당혹스러워한다. 그 반응도 이제는 별스럽지 않아 익숙한 기사 소재로 자리하고 있다.

뒤늦게 보상하듯 좀스러운 청년정책과 청년예찬이 쏟아지고, 선거철 약속이나 한 듯 부랴부랴 청년정치인들이 앞세워지며 온통 들썩여졌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유난스럽다며 질책하는 목소리가 들리며 마치 청년이슈가 철지난 유행이나 된 거 같다. 

혹시 MZ세대는 트렌디한 명품을 휘두르고 최신기종의 기기를 잘만 사용하는 이들이며, 청년문제는 안온한 내 자식, 내 친구와는 관계없는 낙오된 이들의 계급문제이라 생각한 적이 있나. 넘치는 상품광고에 휘둘리지 않고 절제하면, 또는 일상 속의 재미와 기쁨을 찾으며 감사하는 마음만 품으면 청년들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나.

유감이지만 그 또한 일시적인 미봉지책일 뿐, 해갈되지 않은 사회적 고통은 지금도 차근히 누적되고 있다. 냉엄한 현실에 대한 청년들의 생존선택이 인구절벽으로 귀결되고 있다. '노력하지 않아서', 또는 '만족할 줄 몰라서'라는 딱지만으로는 동시다발로 이뤄지는 청년들의 적응 선택을 만류할 수 없다.

실제로 많은 청년들이 '욜로(Yolo)'와 '갓생(God+生') 그 어딘가를 반복하다가 지나친 경우 번아웃을 호소하고 있다. 비단 청년층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니, 청년세대를 둘러싼 다층적인 사회현상을 세대 이기주의나 사회 부적응으로 미룬다면, 한국사회의 병적인 치열함과 뿌리 깊은 인간경시를 가리는 무책임한 손가락질일 뿐이라고 분명히 선을 그을 수 밖에 없다.

등 떠밀린 소확행은 정크 푸드(Junk Food)일 뿐

2018년 즈음에 부상한 '소확행'은 최근까지도 변주되고 있다. 소확행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축약어로, 일상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에 집중하며 행복을 찾는 라이프스타일을 뜻한다. 무라카미 하루키(1986)가 그의 수필집에서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등으로 묘사하며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일본의 경제 호황시기의 소확행은 하루키가 물질만능주의에 휩쓸린 사회적 분위기를 우려하며, 쾌락적 소비를 경계하고 자신만의 참된 행복을 찾을 것을 종용하기 위해 제시한 개념이다. 반면에 소확행이 트렌드로 떠오른 2018년은 장기화된 저성장으로 청년실업과 고용문제, 부동산 폭등으로 청년문제가 격화된 시기였다. 이 경우의 소확행 열풍은 소득양극화 심화와 계층 간 이동의 불리로, 노력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된 청년들이 쉽게 얻을 수 있는 쾌락을 찾게 되며 나타난 자조 섞인 현상에 가깝다.

이 같은 소확행은 쌓인 스트레스를 환기하며 긴장을 푸는 데 유용할 수는 있으나, 바람직한 처방이 될 순 없다. 막연한 낙관으로 일시적인 만족감을 얻을 순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삶에 대한 만족감이 장기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맞서야 할 사회 문제로부터 회피하게 되어 개인의 문제로 방치될 우려마저 있다. 이런 부류의 페르소나를 지우면 노력에 대한 회의감과 구조적 무력감, 무의미한 삶에 대한 염증이 녹아든 상실감과 공허함이 금세 고개를 내밀 거다. 그야말로 가짜 행복이다.

청년이슈가 '소확행스러운' 개인적 차원의 노력과 담론에만 갇혀서는 안 되는 이유다. 패스트푸드와 인스턴트 식품이 장기적으로 영향 불균형을 초래하고, 건강을 위협하는 것처럼,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 도취된 소확행은 문제 원인을 개인의 나약함과 이기심으로 유기하여 해악을 끼친다. 하루가 다다르게 늘어가는 청년우울과 자살, 고립을 넘어 은둔까지로 이어지는 인간소외 문제가 그 증거다. 2018년 이래의 소확행이 한국청년들에게 유의미한 행복을 가져다주었다면, 청년문제는 진작 해소되고도 남아야 했다.

통제되지 않는 위기와 급격한 변동으로 인한 미래불확실성 증대는 개인의 삶을 위협하며 공동체의 긴장과 불안을 초래했다. 그러나 능력주의 경쟁에 치중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사회적 수준으로 다뤄져야 할 트라우마는 각자도생의 삶을 살아가는 개개인의 몫으로 미뤄졌다. 동시에 물질만능주의적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는 끊임없이 물질을 소비하고 소유할 것을 소구하고 있으니, 인정·소속·애정·존중·자아실현의 상위욕구는 질 낮은 과시욕과 모방욕으로 손쉽게 대체되었고, 구매력을 입증하지 못한 개인은 강요된 소비자 정체성에 함몰된 채 매 순간 낙오감과 박탈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타인의 질투 또는 무관심을 양식으로 삼는 삶이 합리화되었으니, 시기 받는 소비 주체를 이상향으로 꼽는 아이들이 놀랍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다. 대세가 된 소비행태를 쫓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진정으로 원하는 일과 삶을 발견하는데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면 자아실현·인정·존중 등의 상위욕구는 자연스레 따라올 일이다. 타인의 욕망을 쫓고 싶으나 능력이 미치지 못해 마지못해 선택한 정크 푸드로는 궁극적인 행복을 결코 달성할 수 없다.

물질적 풍요는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더구나 행복을 연구한 경제학자 Easterlin(1974, 1995; 2010)에 따르면 경제적 안정은 행복을 이루는 주요한 조건이지만, 일정 소득수준을 넘어서고 부터는 영향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Thomas Wai-Kee Yuen와 Winnie Wan-Ling Chu(2015)는 소득수준이 높은 국가의 경우 경제발전 수준이 높아진다 해서 행복 수준이 반드시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는 수준에 도달하면 행복감은 이후부터는 소득보다 다차원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이민주·박민진, 2022).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논리가 증명된 셈이다(김상욱, 2022). 유명한 Maslow의 욕구단계이론을 살펴보아도 생리적 결핍·안전에 대한 결핍은 충족되면 더는 동기로 작동하지 않는데, 자기발견·공동체적·이타적 갈망은 지속적인 동기를 부여한다.

물론 삶의 질에 영향을 줄 객관적 조건을 따지면 같은 청년층이더라도 사회경제적 기반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세대 내 이질성을 고려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개략적인 연구들을 돌아보면 경제선진국 반열에 오른 한국에서 사회구성원들의 '물질소비능력의 우위'가 행복을 담보하지 않을 수 있으며, 청년들이 요구하는 행복의 조건이 반드시 경제적 요인에만 국한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점 정도는 유추해볼 수 있다. 이에 이어지는 장에서는 통해 세대 내 이질성에 주목하기 보다는 청년보편의 논의로 '물질적 풍요가 아니면 한국청년들은 도대체 어떻게 지속가능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인지'를 질문하며 나름의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 김옥진. (2021). 르네 지라르의 관점에서 본 청년들의 소확행 심리. 신학과 실천, 77, 195-218.
- 이민주·박민진.(2022). 서울 청년의 행복격차: 잠재프로파일분석의 적용. 도시연구, (21), 227-271.

덧붙이는 글 | 본문은 글쓴이가 2022년 9월 16일 수원청년정책포럼에서 발제한 글입니다.


태그:#청년, #청년문제, #소확행, #행복, #MZ세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민주도 거버넌스를 실천하고 연구하는 대학원생 활동가입니다. 협동조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