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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강 : 8월 4일 오전 11시 14분]

일본에 '재팬 핸들러(Japan handler)'라는 말이 있다. 일본 정부의 수법을 꿰뚫어 보면서 일본 정부의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미국의 일본통을 가리키는 용어다. 조지프 나이, 리처드 아미티지, 커트 캠벨, 마이클 그린 등이 대표적인 '재팬 핸들러'로 꼽힌다.

2001년 4월 탄생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의 이야기다. 고이즈미 정권 탄생의 주역의 한 사람이었던 다나카 마키코(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딸)가 외교 문외한임에도 불구하고 외상으로 기용됐다. 당시 아들 부시 정권의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이 5월 초 새로 출발한 고이즈미 정권과 양국관계 조율 및 고이즈미 총리의 방미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그런데 다나카 외상이 갑자기 약속했던 아미티지 부장관 면담을 취소했다. 알고 보니 외상 취임 때 축하 난을 보낸 사람들에게 답례장을 써야 하니 시간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에 일본 외무성 관료들이 경악했고 일부 언론은 외상이 미일외교의 핵심 인물을 냉대하는 것은 미일외교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비판 기사를 실었다. 그래도 당시엔 다나카의 국민적인 인기가 워낙 높아 큰 문제 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이때 재팬 핸들러의 심기를 건드리고 외무성 관료들의 신뢰를 잃은 것이 다음해 1월 외상에서 경질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돼버렸다. 그만큼 일본 외교에서 재팬 핸들러의 힘은 강하다.

윤 대통령의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 
 
지난 3일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대만 타이베이 총통부에서 열린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의 회담 도중 연설을 하고 있다.
 지난 3일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대만 타이베이 총통부에서 열린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의 회담 도중 연설을 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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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마키코의 일화가 떠오른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 3일 밤 방한한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을 휴가 때문에 만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다. 윤 대통령은 1일부터 5일까지 휴가 중이다. 원래는 지방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했으나 정권 지지율이 폭락하면서 지방행을 취소하고 서울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다나카 외상의 축하 난 답례 편지쓰기와 윤 대통령의 여름 휴가. 둘 다 먼 곳에서 오는 동맹국 핵심 인사의 면담을 거부하는 이유로서 함량이 부족하긴 마찬가지로 보인다. 국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체면과 격식보다 자다가도 버선발로 뛰어나가 환대해야 하는 것이 서글프지만, '작은 나라'가 취해야 할 외교의 불가피한 모습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특히 전임 문재인 정권이 한미동맹을 약화했다고 비난하며 동맹의 복원을 강조해온 윤 대통령의 입장에서 볼 때, 펠로시 의장을 만나지 않는 것은 무슨 꿍꿍이 때문인지 짐작하기 쉽지 않다. 윤 정부는 미일동맹의 강화뿐 아니라 문 정부의 대중 굴종외교를 비난하며 '친미-친일-반중 외교'를 공공연히 내세워왔다. 펠로시 의장이야말로 윤 정부의 외교노선에 딱 어울리는 '상징 인물'이며, 그를 만남으로써 자연스럽게 윤 정부의 외교노선을 중국 등 세계에 과시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가 중국과 군사분쟁을 무릅쓰며 대만 방문을 강행한 반중의 상징이라는 것을 떠나서도 펠로시 의장은 미국의 국가서열 3위이며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 이은 대통령 승계 2위의 핵심 인물이다. 더구나 하원의장은 미 정부의 예산에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한반도와 관련한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더라도 하원이 예산을 지원해주지 않으면 실행할 수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3일 오후 서울 대학로 한 극장에서 연극 '2호선 세입자'를 관람한 뒤 출연진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3일 오후 서울 대학로 한 극장에서 연극 "2호선 세입자"를 관람한 뒤 출연진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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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핵심 인사가 한국을 방문하는데, 대통령이 한가하게 휴가를 이유로 만나지 않는다 것은, 쉽게 말해 저절로 굴러들어온 보물을 발로 차는 것과 비슷하다. 아마 전문 외교관들은 이런 중요성을 감안해 윤 대통령이 펠로시 의장을 꼭 만나야 한다고 건의했을 것이다. 면담 불발과 관련해 비판이 속출하자, 대통령실은 4일 오후에 전화통화를 한다고 급히 발표했다. 그러나 전화통화와 면담은 무게가 너무 다르다. 면담 불발에 대한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는 불문가지다. 

윤 대통령이 펠로시 의장을 면담하지 않는다면 그가 행한 전례, 일관성에도 어긋난다. 윤 대통령은 취임 직전인 4월 19일 당선인 신분으로 정진석 의원의 집에서 방한 중인 성 김 대북특별대표, 조태용 의원(현 주미대사)와 함께 만찬을 한 바 있다. 당시 술이 거나하게 취한 네 명이 함께 찍은 사진까지 공개됐다.

비공개 모임이라고 하지만 곧 한 나라를 이끌 대통령 당선인이 미국의 차관보급에 불과한 사람을 사적으로 술까지 나누며 긴 시간 동안 격의 없이 만난 것은 매우 파격이었다. 성 김은 5월 21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 미국 쪽 배석자에도 끼지 못한 인물이다. 펠로시 의장은 한국정책을 비롯한 미국의 대외정책에 끼치는 영향력 면에서 그와 비교할 수 없는 거물이다.

한국에서만 '수뇌' 못 만난 펠로시... 윤 정부의 '외교'란 무엇인가
 
지난 3일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과 차이잉원 대만 총동이 대만 타이베이 총통부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
 지난 3일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과 차이잉원 대만 총동이 대만 타이베이 총통부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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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시 의장은 1일 싱가포르, 2일 말레이시아, 3일 대만, 4일 한국, 5일 일본을 방문한다. 이제까지 방문한 국가마다 모두 수뇌와 만났다. 싱가포르에서는 리센룽 총리, 말레이시아에서는 이스마일 사브리 야곱 총리, 대만에서는 차이잉원 총통을 만났다. 마지막 순방지인 일본에서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만날 예정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에서만 수뇌를 만나지 못하고 가는 셈이다. 국제사회에서도 한미관계에 무슨 이상 신호가 있는가 하고 바라보겠지만 당사자인 펠로시 의장도 이런 한국의 냉대를 마음 속에 깊게 담아갈 가능성이 크다. 물론 지금 단계에서 다나카 외상의 전례처럼 그 대가가 어떤 형태로 돌아올지 짐작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이 펠로시 의장을 만났느냐 아니냐에 있지 않다. '윤석열 외교'의 기준과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차관보급인 성 김 대북특별대표를 스스럼없이 만날 정도로 실용외교를 중시한다면 펠로시 의장을 당연히 만났어야 옳다. 또 전임 정부의 친중 경사를 수정해 친미노선을 강화한다고 했으면 휴가를 반납하고서라도 펠로시 의장을 외면해서는 안 됐다. 기준과 일관성이 없다 보니 국익보다는 알량한 자존심 또는 유아독존식의 무모함으로 외교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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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초보 아마추어 외교'의 아찔한 세 장면 http://omn.kr/1yjg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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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논설위원실장과 오사카총영사를 지낸 '기자 출신 외교관' '외교관 경험의 저널리스트'로 외교 및 국제문제 평론가로 일하고 있다. 한일관계를 비롯한 국제 이슈와 미디어 외에도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다. 1인 독립 저널리스트를 자임하며 온라인 공간에서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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