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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아래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용어 중 하나가 '피해자 중심주의(victim-centerism)'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하게 잘못된 용어다. '피해자 중심 접근(victim-centered approach)'이 올바른 용어다.

심지어 일부 한일관계 전문가들도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세미나나 토론회에서 아주 태연하게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말을 쓴다. '피해자 중심 접근'이라고 쓰는 것이 맞지 않느냐고 지적하면, "그렇긴 한데 이 말이 미디어 등에서 널리 쓰이기 때문에 나도 쓰는 것"이라고 눙치고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

'피해자 중심주의'의 위험성  
2021년 7월 14일 제1500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1인시위로 열리고 있다.
 2021년 7월 14일 제1500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1인시위로 열리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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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학자와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들이 굳이 '피해자 중심 접근'이라는 말을 놔두고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용어를 쓰는 의도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문재인 정부의 위안부 정책이 피해자의 의사만을 절대시해 실패했음을 강조하는 데 이 용어만큼 선정적이고 효과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 피해자 중심을 이념으로까지 승화시키는 극단적인 자세 때문에 이 문제를 유연하게 풀지 못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용어에는 피해자 뜻을 신성시한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배어 있는데, 이런 점을 악용해 문재인 정부를 역공할 때도 이 용어는 좋은 재료로 된다. 예를 들어 한국과 일본의 많은 미디어는 위안부재단의 위로금을 대다수의 피해자가 수령했고 일부가 거부했는데 12.28 위안부 합의를 수용하지 않는 것은 피해자의 다수 의사를 무시하는 것, 즉 말로만 피해자 중심주의를 내세우는 것 아니냐고 비판하곤 한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종종 '살아 있는 피해자 절대주의'로 돌변해 쓰이기도 한다. 피해자가 모두 몇 명인데, 이들을 일일히 다 만나 의사를 확인했느냐고 묻거나 공세를 취할 때도 이 용어가 동원된다.

실상이 어떻든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잘못된 용어가 널리 퍼진 데는 문재인 정부의 책임도 있다. 강경화 외교부장관이 2017년 7월 31일 위안부합의 검토 태스크포스 출범식에서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해 위안부 합의를 면밀하게 검토해 달라"고 말했다. 이를 기점으로 문재인 정부 안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말이 한 동안 무분별하게 사용됐고, 미디어들도 그대로 이 용어를 따라 썼다.

나중에 피해자 중심 접근으로 용어 사용을 바꿔 달라고 했지만 이런 주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미디어는 거의 없다.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말이 상당 기간 쓰이면서 굳어진 용어가 된 데다가 이 말이 문재인 정권의 위안부 정책을 비판하는 좋은 무기가 된다고 봤기 때문에 알고도 그대로 쓰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피해자 중심 접근' 용어가 적확한 이유

하지만 피해자 중심 접근은 피해자 중심주의와 전혀 다른 말이다. 피해자 중심 접근은 한마디로 '인권과 관련한 피해자의 권리를 구제하기 위해 국제사회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마련한 규범'이다. 대표적으로 '국제인권법 및 국제인도법 위반 피해자의 구제 및 배상에 관한 유엔총회 결의(유엔 피해자 권리결의)'와 '국제형사재판소의 절차 및 증거에 관한 규정(ICC 절차 규정)'이 있다.

한국의 피해자와 관련 단체는 이런 국제기구의 권고와 규범에 입각해, ①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②진상규명 ③국회결의 사죄 ④법적 배상 ⑤역사교과서 기록 ⑥위령탑 및 사료관 건립, 즉 추모사업 ⑦책임자 처벌을 일본에 요구하고 있다.

12.28 위안부 합의는 이중 핵심 사안인 책임 인정과 사죄, 배상이라는 세 가지를 수용한 점에서 이전의 합의보다 진전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비공개 합의에서 성노예 표현 자제, 소녀상 이전 노력, 해외 소녀상 설립 자제, 정대협 반발 자제를 한국 쪽의 이행 의무 사항으로 넣으므로써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상한 합의가 됐다. 더구나 역사교과서 기록과 추모사업 등은 전혀 들어 있지도 않다.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12.28 합의 발표 다음날인 2015년 12월 29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인 강일출 할머니가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집에서 조태열 외교부 2차관을 만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12.28 합의 발표 다음날인 2015년 12월 29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인 강일출 할머니가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집에서 조태열 외교부 2차관을 만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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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피해자 중심 접근에서 중요한 점은, 여기서 말하는 피해자가 생존 피해자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피해자는 생존 피해자를 포함해 이미 고인이 된 피해자, 아직 발굴되지 않는 수많은 피해자, 더 나아가 그 후손들의 공동체를 포함한다는 점이다. 즉, 생존 피해자 전원이 받아들인다고 해도 국제사회가 만든 규범을 만족하는 해결방안이 나오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도 일본에서 몇 차례 피해자 중심 접근과 관련해 일본 미디어와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일본의 기자가 "위안부재단의 위로금을 대다수 피해자가 받았는데 이것은 피해자 중심주의에 비추어 해결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냐"의 취지의 질문을 하곤 했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반박했다.

"지금 10명의 피해자가 있다고 치자. 그리고 몇 년 뒤 이들이 모두 다 숨졌다고 가정하자.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그 시점에 위안부 문제는 모두 해결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느냐. 위안부 피해자가 모두 숨졌다고 자연스럽게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 동의한다면, 피해자 중심주의와 피해자 중심 접근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생존해 있는 피해자가 모두 숨진다고 해도 일본이 국제 규범에 맞는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 한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피해자 중심주의'가 아니라 '피해자 중심 접근'이 소중하고 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태그:#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중심주의, #피해자 중심접근 , #국제규범, #강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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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논설위원실장과 오사카총영사를 지낸 '기자 출신 외교관' '외교관 경험의 저널리스트'로 외교 및 국제 문제 평론가, 미디어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일관계를 비롯한 국제 이슈와 미디어 분야 외에도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다. 1인 독립 저널리스트를 자임하며 온라인 공간에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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