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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30일 오후 4시경 일본 교토부 우지시 이세다초 우토로 마을, 별안간 마을 한 켠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원인을 알 수 없이 일어난 불은 5시간 가까이 이어져 집과 창고 8채를 불태워버렸고, 이듬해 있을 '우토로평화기념관'에 소장될 자료 50여 점도 함께 집어삼켰다.

빈집에서 시작된 불이었지만, 소방당국은 화재원인을 전기누전 등으로 추정하며 사건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사건 발생 4개월 뒤 또 다른 방화사건으로 잡힌 용의자를 조사하던 중 범행을 자백받으면서 우토로, 재일조선인에 대한 증오범죄였음이 드러났다. 범인은 "우토로를 불법 점거한 재일조선인에게 공포감을 줘서 몰아내려 했다"는 말과 함께 "우토로평화기념관 개관을 막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일명 LP가스로 불리는 프로판 가스를 사용하는 우토로 마을 특성상 자칫 인명피해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화재였지만, 일본 당국의 초기 사건처리는 너무나도 무관심했고 소극적이었다.
 
2021년 8월 30일, 아리모토 쇼고(22)는 "한국이 싫었다"는 이유로 재일조선인 마을인 우토로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우토로 가옥과 창고 8채가 불타버렸다.
▲ 혐오범죄로 불타버린 우토로. 2021년 8월 30일, 아리모토 쇼고(22)는 "한국이 싫었다"는 이유로 재일조선인 마을인 우토로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우토로 가옥과 창고 8채가 불타버렸다.
ⓒ 우토로디지털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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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 마을은 일본 사회에서 가장 고립되고 소외된 곳이자, 마지막 남은 재일조선인 집단 거주지다. 그 곳에서 지난 4월 30일, 한바탕 축제가 벌어졌다. 우토로 마을에 대한 역사를 알리고, 한국과 일본 양국 시민사회의 지원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인 '우토로평화기념관'이 개관해서다.

일주일간 진행된 개관식에서는 우토로 출신의 3세 가수 정아미씨의 미니콘서트, 극단 <달오름>의 마당극 '우토로' 등이 열렸다. 특히 평화기념관 개관에 맞춰 한일 양국 동시 출간을 목표로 추진된 프로젝트 재일동포 3세이자 저널리스트인 나카무라 일성 작가의 르포 <우토로 여기 살아왔고, 여기서 죽으리라>는 우토로 형성부터 현재까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책 <우토로 여기 살아왔고, 여기서 죽으리라> 표지
 책 <우토로 여기 살아왔고, 여기서 죽으리라> 표지
ⓒ 도서출판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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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이라는 시간동안 우토로를 기록하고 취재해 왔던 작가의 투박하면서도 진심이 담긴 이 책은 우토로를 몰랐던 또는 우토로를 제대로 알지 못한 이들에게 건네는 역사 안내서이기도 하다. 

책에서 저자는 우토로 마을 주민들의 기억을 채굴해 그 형성부터 현재까지를 시간 순으로 하나씩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펼쳐놓는다. 우토로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의미와 그 역사를 전달하기 위해 주민들의 증언을 기록하면서 작가로서 개입은 철저히 배제했다. 같은 사건이라도 주민들 각각의 이야기가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그는 이를 존중하고 그들의 증언을 그대로 기록하고 여러 기록과 대조해 덧붙여 기록했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버려진 마을, 우토로

우토로 마을은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말기, 재일조선인들이 전쟁터로의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일본 우지시에 건설될 군사비행장 공사현장으로 모여들면서 형성됐다. 이렇게 모인 재일조선인들의 수가 약 1천3백여 명에 달했을 정도로 대규모 토목공사였지만, 일본 정부가 노동자들을 위해 숙소로 제공한 곳은 함바라 불리는 가설숙소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활주로를 다지기 위해 흙을 퍼낸 움푹 파인 곳, 폐자재와 삼나무, 시멘트 포대 등으로 덧붙여 비와 바람을 겨우 피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활주로 건설을 위해 흙을 퍼낸 탓에 인근 지역보다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물바다로 변했다. 태풍이라도 오면 각종 폐자재로 엉성하게 지은 함바 지붕이 날아가 다시 짓기를 반복했다고 하니, 얼마나 열악한 환경이었을지 상상 이상이었다.

이후 일본이 패전하면서 재일조선인들의 조국인 조선은 광복을 맞이했지만, 어찌보면 우토로 주민들에게는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을 의미했다. 패전은 비행장 공사의 중단을 뜻했고, 그로 인해 당장 먹고 살 직업이 없어진 것이다. 우토로 주민들은 제대로 된 전후보상은 커녕 그동안 일했던 임금조차 받지 못한채 그대로 방치됐다. 아니, 버려졌다.

실업수당 등 사회보장제도에서도 철저히 소외됐고, 생존에 필수적인 상수도는 88년에서야 들어오기 시작했다. 40여 년간 깨끗한 물조차 허락되지 않던 곳. 일본 사회 속에 존재하지만, 존재 자체가 부정되던 곳이 바로 우토로였다.

토지 문제 그리고 작은 통일
 
군사비행장 건설에 동원된 재일조선인들의 가설숙소, 일명 함바의 복원 모습. 함바 내부에는 당시 생활상을 기록한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 우토로 평화기념관 앞 전시된 가설숙소(함바) 군사비행장 건설에 동원된 재일조선인들의 가설숙소, 일명 함바의 복원 모습. 함바 내부에는 당시 생활상을 기록한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 KIN(지구촌동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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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에서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던 우토로였지만, 1980년대가 되자, 우토로의 존재를 알게 된 양심있는 일본인들이 늘어갔고, 그들은 우토로 주민들을 위한 활동을 펼쳐나간다.

당시 우지시 직원이던 다케하라 하치로씨와 방송국 기자였던 다가와 아키코씨 등이다. 이들은 우토로 주민들의 수도 문제를 접한 뒤 우지시의 방관적인 행정을 비판하는 한편, 지역 주민들에게 우토로 주민들의 사정을 알리는 작업을 진행, 여론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의 지원 속에 1988년 1월, 우토로에도 상수도 공급을 위한 공사가 시작, 수도가 설치됐다.

이들은 이후에도 우토로 마을에 토지문제가 불거지며 주민들이 강제퇴거 위기에 놓이자 우토로 지원단체인 '철거반대!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을 만들어 함께 연대하기도 했다.

토지문제가 불거지며 한국에서도 1990년 5월 한겨레신문이 우토로 문제를 다뤘고, 1993년에는 MBC PD수첩이 우토로의 현실을 보도했다. 일본 시민사회단체들도 우토로와 연대하며 토지문제 소송을 벌였지만, 2000년 6월을 끝으로 재판은 주민들의 패소로 막을 내렸다.

상황의 반전은 2000년에 들어서부터였다. 2004년 한국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사이토 마사키의 <우토로:재일조선인 부락의 강제 퇴거> 발표와 우토로 주민들의 인터뷰 등을 시점으로 재일조선인들의 관심도가 높아져나갔다.

이후 한국 시민단체인 'KIN(Korean International Network, 지구촌동포연대)'의 우토로 방문과 연대활동을 시작으로, '아름다운재단' 등의 모금캠페인 등이 벌어졌다. 2007년 11월 23일 한국국회에서 토지매입을 위한 지원금 예산안 30억 원이 통과되는 등 한일 양국 시민사회의 연대가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현재 우토로 마을에는 주민들을 위한 시영주택 2동 중 제1동이 완성됐고, 지난 4월에는 우토로 역사를 기록하고 한일 양국의 시민사회가 연대해 양국 정부를 움직인 '작은 통일'을 기억하고 미래에 전하기 위한 '우토로평화기념관'이 개관했다. 

계속되는 혐오와 차별 그리고 연대
 
지난 4월30일, 우토로 마을 역사와 한일 양국 시민사회의 연대를 기억하기 위한 '우토로 평화기념관'이 개관했다. 사진은 행사 당일 모습
▲ 우토로 평화기념관 개관 지난 4월30일, 우토로 마을 역사와 한일 양국 시민사회의 연대를 기억하기 위한 "우토로 평화기념관"이 개관했다. 사진은 행사 당일 모습
ⓒ KIN(지구촌동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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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무한도전에서 소개된 이후, 한국에도 다시금 화제가 돼 이제는 꽤 많은 이들이 '우토로'라는 지명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토로 마을의 생성 배경과 그들의 거주권 보장 투쟁의 역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다 보니,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극우 유튜버들을 중심으로 우토로의 역사에 대해 비아냥거리며 비하하는 경우도 왕왕 발생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사실 일본사회에서는 아직까지도 재일조선인에 대한 혐오발언(헤이트스피치)과 같은 증오범죄와 고교무상화와 유치원보육 무상화 제외 정책 등 차별이 계속 되고 있다. 하지만, 우토로에서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연대해 결실을 이룬 것과 같이 일본 사회의 차별과 혐오발언에 대항한 일본 시민사회의 연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내년이면 조선학교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주민 커뮤니티 공간 '예루화' 건물과 남은 가옥들도 모두 철거될 예정으로 옛 우토로마을의 모습도 이제는 기념관 속 사진으로 남겨지게 된다. 우토로 마을의 역사와 재일조선인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곳은 '우토로평화기념관' 밖에 없게 된다. 

'우토로평화기념관'의 한자는 일반적인 기념관(記念館)의 한자와 다르게, '기념(祈念)관'을 쓴다. 평화를 기도하고 기원하고 생각하는 공간이라는 뜻으로 우토로 주민회에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해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서 철거되기 전 마을의 모습을 보기는 어렵겠지만, 이후 한일 간 왕래가 자유로워질 때 우토로 평화기념관에서 우토로 역사와 그 증언을 듣는 것은 어떨까.

우토로평화기념관 개관에 맞춰 한일 양국에서 동시 출판된 나카무라 일성 작가의 책 <우토로 여기 살아왔고, 여기서 죽으리라>의 초판 판매수익금은 전액 '우토로평화기념관'에 기부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본인 블로그에도 게재됐습니다.


우토로 여기 살아왔고, 여기서 죽으리라

나카무라 일성 (지은이), 정미영 (옮긴이), 품(도서출판)(2022)


태그:#나카무라일성, #우토로, #도서출판품, #우토로평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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