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고 송해 코미디언의 영결식과 발인식이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고 있다. 유가족들이 헌화 및 묵념을 하고 있다.
▲ 고 송해 영결식 고 송해 코미디언의 영결식과 발인식이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고 있다. 유가족들이 헌화 및 묵념을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관련사진보기

10일, 국민MC 고(故) 송해(95)가 영면에 들었다. 온 국민이 애도하는 코미디언은 일찍이 없었다. 별세 이후 실시간으로 보도되는 그의 동정은 마치 인터뷰를 보는 듯했다. 살아온 역정(歷程)답게 그는 웃으면서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들이 송해에 열광하는 것은 전국노래자랑을 오랫동안 진행한 친근한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다. 코미디 인생 이면에 숨겨진 평범한 삶이 예사롭지 않아서다. 울고 웃는 민초들 인생을 대변하듯 가까이 있었다. 덕분에 우리들은 행복했고 즐거웠다.

수많은 후배가 전하는 말처럼 그는 진짜 '코미디언'이었다. 평생 남을 즐겁게 하는 인생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 아니, 고인은 그걸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다.

고인은 황해도 재령 태생으로 6·25전쟁 당시 1·4후퇴 때 월남한 이북실향민이다. 부모와 형제를 모두 고향에 두고 온 이산가족이다. 잠시 피난길에 오른 것이 가족과 마지막 이별이었다.

6.25 전쟁은 수백만 명의 피난민을 양산했다. 피난 시절, 이북실향민들은 어딜 가나 고향을 말하지 않았다. 이북고향은 이들을 주홍글씨처럼 옥죄었다. 고향 떠난 설움에다 고향이 이북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송해 또한 타향살이하며 무수한 차별을 견뎌야 했다.

영화 <국제시장>은 실향민들이 겪는 상황을 연출하지만 실제 삶은 더욱 고단했다. 의지할 곳 없는 실향민들은 '악착같이' 일했다. 이북사람들이 생활력 강하고 근면하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표현일지 모른다. 고아나 다름없는 고인 또한 외로움과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송해는 뼛속까지 실향민이었다. 고향이 그리워 예명조차 바다(해)로 바꿨다. 가수로도 활동한 그는 망향가를 자주 불렀다. 2003년 평양공연 때도 그랬다. '한 많은 대동강',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은 그의 애창곡들이다. 고인은 "전국노래자랑을 이북 고향 재령에서 진행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코미디언과 전국노래자랑 사회자로서 통일과 귀향을 꿈꿨지만, 그도 다른 실향민처럼 이산의 한을 품은 채 눈을 감았다. 그의 장지는 대구 달성군 이지만 태어난 고향 땅에 묻히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3백만 명을 헤아리는 황해도 실향민 사회도 그의 별세에 애도를 표했다.

송해는 긍정과 불굴의 아이콘이다. 이산가족으로 애환을 털어내고 이를 즐거움과 기쁨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무대에서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다. 키가 작다는 것에도 희망을 부여했다. "더 크면 인기가 없다"며 뽀빠이 이상용에게 말한 위트는 유명하다.

그가 전국노래자랑 사회를 맡은 것은 1988년 그의 나이 61세였다. 그 이전은 인생 2막을 위한 전초전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34년이 흘렀다. 그리고 우리 곁을 조용히 떠났다. 나는 그를 '한국의 프랭크시나트라'라고 부르고 싶다. 프랭크시나트라처럼 끝까지 웃기고 노래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태그:#송해, #황해도 재령, #프랭크시나트라, #이북실향민, #이산가족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일상을 메모와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기존 언론과 다른 오마이뉴스를 통해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사는 남북한 이산가족과 탈북민 등 사회적 약자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