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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명등과 상석과 봉분이 가야산 옥양봉과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장명등 아랫부분에 난초 무늬가 새겨졌다.
▲ 남연군 묘  장명등과 상석과 봉분이 가야산 옥양봉과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장명등 아랫부분에 난초 무늬가 새겨졌다.
ⓒ 정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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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5월 10일 충청도 덕산에 있는 남연군 묘를 서양인이 파헤쳤다. 남연군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이자 고종의 할아버지다. 봉분 한쪽을 팠으나 단단한 석회층을 뚫지 못해 시신을 탈취하는 데 실패했다. 다행이었다. 흥선대원군이 명당을 찾아 아버지 묘를 옮긴 지 22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남연군 묘가 있는 예산 덕산에 갔다. 천하 명당을 둘러보고, 명당을 만들고 있는 산봉우리에 올랐다.

남연군 묘

사도세자의 넷째 아들 은신군은 아들 없이 죽었다. 이하응의 아버지 이구가 양자로 들어갔다. 이구는 남연군으로 정조의 조카가 되었다. 본래 왕위 계승권에서 멀었으나, 후대에 왕이 나올 가능성이 생겼다.

이하응이 지관에게 명당자리를 물었다. "광천 오서산에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고, 덕산 가야산에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가 있다"라며 두 곳을 추천했다. 그는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수 있는 곳 대신 두 세대에 걸쳐 임금이 나올 곳을 선택했다.
 
  남연군 묘 주위는 한창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옛터에 주춧돌이 널렸다.
▲ 가야사 옛터  남연군 묘 주위는 한창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옛터에 주춧돌이 널렸다.
ⓒ 정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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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응은 이곳에 있던 가야사를 없애고, 금탑이 있던 자리로 아버지 묘를 옮겼다. 그리고 7년 만에 둘째 아들을 얻으니 그가 바로 조선 26대 임금 고종이다.

남연군 묘 앞에 섰다. 장명등과 상석과 봉분이 가야산 옥양봉과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옥양봉이 묘의 주산 같지만, 지형도를 보면 석문봉에서 맥이 흘러내린다고 한다. 약간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석문봉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 가야봉, 오른쪽에 옥양봉이 있다. 두 봉우리가 혈을 감싸고 내려오는 듯하다. 보통 사람이 봐도 땅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가야산

남연군 묘 앞의 가야사 옛터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500m쯤 가면 옥양봉 들머리다. 시작은 완만하다. 잔돌을 깔아, 걸으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때죽나무꽃이 떨어져 길을 수놓았다. 계단길이 시작하는 곳에 땔감이 수북이 쌓였고, 암자로 짐을 나르는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갑자기 경사가 급해진다. 오르막이 이어지고, 숨이 가빠진다. 야트막하게 보이나 만만찮다.
 
  고사목과 정상석이 잘 어울린다. 앞으로 가야 할 봉우리가 뚜렷하다.
▲ 옥양봉  고사목과 정상석이 잘 어울린다. 앞으로 가야 할 봉우리가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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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청룡으로 옥양봉과 서원산이, 우백호로 가야봉과 원효봉이 남연군 묘를 감싼다.
▲ 남연군 묘 전망  좌청룡으로 옥양봉과 서원산이, 우백호로 가야봉과 원효봉이 남연군 묘를 감싼다.
ⓒ 정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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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흔길바위에서 쉬어간다. 쉬흔길은 충청도 사투리다. 매우 높다는 뜻이다. 이곳부터 전망이 좋다. 조금 더 오르면 옥양봉이다. 정상석과 고사목이 잘 어울린다. 앞으로 가야 할 봉우리가 뚜렷하다. 그늘에 있던 고양이 두 마리가 슬금슬금 다가온다. 전망을 즐기던 등산객이 차에 고양이 먹이가 있는데 가지고 오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한다.

옥양봉을 지나 철계단에 서면 남연군 묘가 훤히 보인다. 좌청룡으로 옥양봉과 서원산이 옥계저수지까지 이어지고, 우백호로 가야봉과 원효봉이 옥계저수지까지 감싼다. 앞은 탁 트였다. 옥계저수지 너머로 삽교평야가 널찍하게 펼쳐진다. 들판 끝나는 곳에 자리한 봉수산이 남연군 묘를 아스라이 감싼다. 천하 명당이다.

옥양봉에서 석문봉 가는 길은 거의 모두 흙길이다. 바다에서 부는 바람이 시원하다.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이 길게 이어지나 양쪽 전망이 산행을 즐겁게 한다.
 
  남연군 묘의 주봉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옥양봉과 가야봉이 각각 좌청룡과 우백호를 이룬다.
▲ 석문봉  남연군 묘의 주봉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옥양봉과 가야봉이 각각 좌청룡과 우백호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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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봉은 해발 653m다. 정상에 해미산악회가 쌓은 백두대간종주기념탑이 있다. 예산산악회에서 검은 돌로, 서산서부산악회에서 하얀 돌로 정상석을 세웠다. 예산산악회 정상석 뒷면에는 '내포의 정기가 이곳에서 발원하다'라고 새겨져 있다.
 
  석문봉과 이어지는 바위를 되돌아보면 마치 사자 머리처럼 보인다.
▲ 사자바위  석문봉과 이어지는 바위를 되돌아보면 마치 사자 머리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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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문봉에서 가야봉 가는 길에 있다.
▲ 거북바위  석문봉에서 가야봉 가는 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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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문봉에서 가는 길에 바라본 모습이다. 서해와 안면도도 보인다.
▲ 가야봉  석문봉에서 가는 길에 바라본 모습이다. 서해와 안면도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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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봉에서 가야봉 가는 길은 바위가 많다. 가는 내내 한적하다. 최고의 전망이 펼쳐진다. 햇볕이 쨍쨍 내리쫴도 그늘 져서 걷기 좋다. 샛길이 있으면 기웃거려야 한다. 여러 모양을 한 바위를 볼 수 있다. 앞만 보고 뒤돌아보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그 가운데 거북바위가 가장 뛰어나다. 거북이가 바위를 넘어가고 있다. 큰 바위가 있으면 굳이 오를 필요는 없다. 옆으로 돌아가면 된다.

가야봉 정상은 방송사 송신탑이 차지했다. 그보다 아래쪽에 전망대가 있고, 그곳에 정상석이 있다. 전망대에 서면 서해와 안면도가 아련하게 보인다.

가야봉에서 헬기장 가는 길은 산비탈에 만들어졌다. 바람은 막혀 불지 않고, 겨우 혼자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다. 마지막 구간은 경사가 심한 내리막이다. 올라오는 사람들은 가쁜 숨을 내쉬며 힘들어한다. 헬기장에서 상가저수지 내려가는 길은 완만하고 편안하다. 울창한 숲길이다.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함께 한다.

상가리 미륵불
 
  등을 돌린 채 북쪽 골짜기를 보고 서 있다.
▲ 상가리 미륵불  등을 돌린 채 북쪽 골짜기를 보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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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저수지를 지나 남연군 묘로 돌아왔다. 오른쪽 아래 150m 떨어진 골짜기에 미륵불이 있다. 머리에 보관을 쓰고, 눈은 반쯤 감았다. 코는 부스러지고,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입은 작고, 입술은 두툼하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올리고, 왼손은 손바닥을 배에 붙이고 있다. 투박하지만 정겨운 모습이다.

등을 돌린 채 북쪽 골짜기를 보고 서 있다.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병마를 물리치기 위하여 북쪽을 바라본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없애고 남연군 묘를 쓰자 반대쪽으로 등을 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흥선대원군에 대한 민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어찌 되었든, 두 세대에 걸쳐 흥선대원군의 아들과 손자가 왕이 되었다. 하지만 본인은 말년에 유폐되었고, 나라는 사라졌다. 오랫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는 대신 선택한 운명이 얄궂기만 하다.

실제로는 철종이 후사 없이 죽은 뒤,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와 한 패가 되어 고종을 왕위에 앉혔다. 이를 위해 남몰래 준비를 많이 했다. 겨우 26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 묘를 천하 명당으로 옮겼다. 앞날을 믿고 꼼꼼하게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았다. 그의 안목과 처세술과 결단력이 돋보인다.

비록 마지막은 쓸쓸했지만, 황제 두 명을 배출함으로써 이미 바라는 바를 모두 이루었다.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흥선대원군이 남긴 자취가 큰 가르침을 준다.

태그:#남연군 묘, #가야봉, #석문봉, #옥양봉, #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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