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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당연한 게 있을까. 돈을 매개로 주고받는 것에서, 특히 그 대상이 물건이 아니라 어떤 서비스일 때 당연한 것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이사를 했다. 짐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고 새로운 집이 문득문득 어색하다. 낯선 장소에 내게 익숙한 색을 서서히 덧칠해가고 있다.

몇 가지 가전제품을 구입했고 설치가 남았다. 이사하면서 떼어 온 에어컨도.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타인의 손이 꼭 필요한 일,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의 도움이 요구되는 일이다. 

바깥사람들이 들고 나는 게 번거로워 설치 작업을 하루에 몰아 두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초인종이 울리며 부산스러웠다. 제일 먼저 도착한 에어컨 설치 기사님이 작업할 내용을 설명하고 일을 준비했다. 벽에 구멍을 새로 뚫어야 하고 앵글도 짜야했다. 새로 구입한 에어컨 말고 원래 가지고 있던 에어컨까지 설치 작업을 요청한 상태였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거라고 했다.

몸으로 하는 일
 
있는 힘껏 힘을 줄 때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끄응, 끄응……." 하는 소리. 기사님 숨소리였다.
 있는 힘껏 힘을 줄 때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끄응, 끄응……." 하는 소리. 기사님 숨소리였다.
ⓒ envato el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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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소리가 집안을 흔드는 사이 다른 가전제품을 가지고 기사들이 왔다 갔다. 설치할 자리를 미리 비워 두어서인지 일이 금방 끝났다. 그에 비해 에어컨은 진척이 더디었다. 점심 즈음이면 끝날까 싶었는데 정오를 넘기고도 한참 더 이어졌다.

작업이 반 이상 진행되었을 때 기사님이 비용을 설명해 주었다. 에어컨 설치비가 만만치 않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견적이었다. 작년에 비해 자재 값이 폭등했다고 했다. 재료별 단가와 필요한 개수의 상세 내역에 설치비가 추가되었다. 비쌌다. 도리 없이 내가 치러야 할 액수에 마음이 고정되어 버렸다. 

작업 시간이 길게 늘어졌다. 여러 개의 관에 테이핑을 하고 부품을 연결하고 조이고. 시끄러운 작업이 어느 정도 끝나자 지루하게 시간이 흘렀다. 기사님은 말없이 일에 몰두했고 오후의 고요가 집안에 쌓여갔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있는 힘껏 힘을 줄 때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끄응, 끄응……." 하는 소리. 기사님 숨소리였다.

힘을 주고 일했던 팔과 다리는 뻐근하고 이마에는 땀이 맺히지 않았을까. 에너지를 태우기만 하느라 몸의 감각은 무뎌지고 있겠지. 고된 일이었다. 너무 비싸다는 생각도 옅어졌다. 지난한 작업 시간과 일의 강도를 고려하면 돈을 더 드려야 할 것만 같았다. 상당한 강도의 노동을 눈에 보이지 않는 화폐로 단순히 치환해버린다는 게, 그거면 다 끝나는 일일까 싶었다.   

몸이 고되어도 끝까지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일의 의미가 단순히 돈에 있지 않겠구나 싶었다. 일에 대한 소명감과 주어진 일을 기준 이상 해내겠다는 충직하고 성실한 마음 없이는 불가능할 거라고. 책임을 가지고 일하는 데엔 돈 버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고. 그런 마음과 태도는 일의 종류나 직업의 구분 없이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다.

몸으로 일을 해본 경험이 있어서일까. 온전히 자신의 힘과 기술로 일하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일의 강도와 난이도에 비해 보수가 높지 않고 사회적 인정도 크지 않은 경우 더 그렇다.

고된 일을 버티어 내는 데는 금전적 보상 이상이 필요한 것 같다. 일에 대한 소명은 물론이고 인내와 성실, 희생과 헌신, 그리고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삶에 대한 정직한 태도까지 함축할 수 있다고. 일을 하는 그 사람의 모습은 한 사람의 바탕을 이루는 풍경이 된다.  

가게를 운영하며 디저트를 만들어 팔았던 때가 있다. 몸을 움직여 일하느라 많이 힘들기도 했다. 그때 '내 일'이라는 마음이 나를 더 강하게 해 주었던 것 같다. 매 공정 문제가 생기지 않게 신경썼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제대로 완수해야 한다는 당연한 마음뿐만 아니라 이왕이면 더 맛있고 예쁘게 만들어서 우리 가게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었다. 

그 마음은 누군가에게 전달되기도 했고 기쁨은 고운 말과 환한 표정, 작은 감탄사와 조심스런 제스처로 내게 되돌아와 가슴을 뻐근하게 했다. 그렇게 물건과 화폐 이상의 것을 주고받는다고 느끼는 순간 일의 의미는 밥벌이를 넘어 있었다. 내 어깨를 두드리고 허리를 곧추 세우게 해 주었다. 삶을 긍정하게 했고 나라는 풍경에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

점심시간을 넘기며 에어컨 설치가 계속되자 김밥을 배달시켰다. 빨리 끝났으면 했던 마음은 기사님이 쉬어 가며 지치지 말고 일하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바뀌었다. 좀 쉬었다 하시라 해도 기사님은 눈 깜짝할 새 식사를 마치고 다시 일에 착수했다.

견적서에 적힌 숫자에만 집중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공정하게 제 몫을 해내며 일과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선한 마음을 믿지 못한 것 같아서. 기사님의 얕은 신음 소리는 내가 지불할 돈에 당연히 포함된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던 작업이 드디어 끝났다. 에어컨은 제 위치에 튼튼하게 고정되었고 모든 배관은 깔끔하게 정돈되었다. 시원한 바람을 쌩쌩 내뿜는 에어컨을 보여줄 때 기사님의 눈이 반짝거렸다. 마스크에 가려져 있었지만 얼굴 가득 미소가 번져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람이 아주 시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애쓰셨어요."

"아이고, 저도 뿌듯합니다. 여름에 시원하실 거예요. 여기 명함 드리고 갈 테니 필요하면 연락주세요."


시원한 여름을 선물 받았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에 꽉 눌러 담은 마음이 제대로 전해졌을까. 그 말이 구슬땀으로 그려내는 아저씨의 풍경에 그늘 한 점이라도 보태었을까. "안녕히 계십시오." 힘차게 인사하고 집을 나서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여운을 남겼다. 

서둘러 다음 작업 장소로 가시며 평소보다 일이 많은 날이라고 했다. 그날 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기사님 마음은 후련하면서 조금 뻐근하지 않았을까. 몸은 고되지만 일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과 누군가를 위해 힘을 썼다는 흐뭇함으로 발걸음은 가벼웠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내 마음도 조금 뻐근해지고. 

우리가 주고받는 것에 당연한 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많은 것들이 뜻밖의 선물이 된다. 세상에는 숫자로 채울 수 없는 작지만 크기도 한 여백이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태그:#일이그리는한사람의풍경, #당연하지않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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