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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당시 동백리 새마을 지도자 전재진(현재 서울 거주)씨는 새마을 사업을 통한 마을 발전에 공로를 인정받아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새마을 훈장 협동장을 받고 상사업비로 마을 공동창고를 신축하게 되었다. 
  
동백리는 1974년 말 주민 호당 소득 164만 원으로, 1980년대 농가소득 목표 140만원을 6년이나 앞당겨 24만 원을 초과 달성했다. 이는 전재진씨를 중심으로 한 206가구 1405명의 주민의 노력 때문이었다.

동백리에서 새마을 운동이 일기 시작한 것은 1961년 4월부터라고 기록에 남겨져 있다. 새마을 선풍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1972년보다 10년 앞선 시기였다. 

당시 주민들은 해마다 많은 식량을 앗아가는 쥐를 없애기 위해 고양이 기르기 사업부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부녀회를 조직하고 좀돌이 저축으로 2만 원의 기금을 확보한 후 20마리의 고양이를 사들였다.

효율적인 고양이 사육을 위해 고양이 호적부와 관리 규정까지 만들어 3년 뒤에는 온 마을이 고양이를 기르게 되었다. 당시 마을 내에는 개와 염소는 기르지 못하게 하는 마을 자치 규약이 있었다.

염소는 녹화사업이 한창인 시기여서 염소 배설물이 식물이 자라는데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묘를 훼손하는 경향이 있어 조상을 생각하는 후손들의 정성으로 보인다. 개는 마을 내 청결을 이유로 키우지 못하게 하지 않았나 하는 추정이다.

또 동백리는 18세부터 25세까지 마을 부녀자 20명을 선정하여 해녀 교육을 시켜 소라, 해삼을 채취하는 등 4천여만 원의 소득을 올리는 성과를 올렸다. 이를 기반으로 200여 명에 이르는 해녀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1가구 1해녀의 시발점이었다. 

당시 마을 공동어장에서 해산물 채취는 제주 출신 해녀들이 거의 독점했다. 제주에 외갓집을 둔 가구들은 대부분 해녀로서 왔다가 현지에 머물렀던 결과였다.

세 번째는 미역 양식업의 시작이다. 동백리는 1969년도에 마을 자조금으로 미역 포자 배양실을 신축했다. 1973년부터 연간 30만 톤의 미역을 생산하여 1억 3500만 원의 어가 소득을 얻었다.  

자료에 따르면, 1970년 호당 41만 6천 원, 1972년 62만 원, 1973년 103만 2천 원, 1974년 164만 원으로 급증하여 도서 새마을 사업의 본보기기 되었다.

태풍 등 자연재해로 인한 양식선의 파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선착장을 축조했던 이야기를 들으면 주민들은 지금도 눈물이 글썽여진다고 한다.

현대에는 중장비가 잘 갖춰져 단시일 내에 축조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손수레 하나 없어 거의 목도질로 축조해야 했다. 작은 선창으로 불린 선착장은 길이 30여 미터, 높이 2미터로 마을 주민들이 손으로 목도질하여 이룬 대공사였다.

현재 동백리 마을 주민들이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활발한 활동을 한 전재진씨와 마을 발전을 위해 희생한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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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지명 중 코지배기는 면적은 10㎡ 남짓 되는 곳이다. 이곳은 감성돔이 많아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옛날부터 강태공들이 해당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새벽 일찍 집을 나서면서 며느리들이 아침상을 차려 코지배기까지 10리가 넘는 거리를 이고 지고 배달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장사굴은 새머리 우측에 있는 금 솜날 내에 위치한 동굴이다. 동굴 내부는 성인 5~6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사람이 누워서 잘 수 있는 인위적으로 만든 구조물이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 문헌에는 남겨 있지 않지만 힘센 장사가 이 굴 안에서 생활하여 '장사굴'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내리바탕은 경사도가 약 45도 정도로 급경사이기에 내리바탕이라고 칭하지 않았나 추정된다. 이곳은 속칭 '눈물고개'라고도 부른다.

예전에는 모든 운송 수단이 지게 또는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이었다. 내리바탕 아래에는 동백리에서 유일하게 쌀이 생산되는 천수답이 꽤 넓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에서 지은 농산물을 이고 지고하여 내리바탕을 오르게 되면 힘이 들어서 또는 신세를 한탄하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하여 '눈물고개'라 불렸다 한다.

후에는 새머리에 초소가 있었다. 한때 이곳은 현역병, 방위병(단기사병) 전경 등이 국방의무를 했다. 신병들이 자대를 배치 받아 초소로 이동하면 중간에 이곳을 지나가게 되는데, 선임병들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신병들의 군기를 잡아 신병들의 눈물과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내리바탕은 그대로인데 눈물과 한은 없다.

(계속)

유재철 이장
최광윤 과장(동백마을 출신 공무원)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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