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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예가 曉溪(효계) 박성호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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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30여 년간 서예에 매진해오다 20년 전부터는 무료로 정통서예를 보급해오고 있는 충남 서산시 음암면 동암마을길 '안다위한묵연실'에서 서예가 효계(曉鷄) 박성호 선생을 만났다. 서실 입구에 서서 밝은 얼굴로 맞아주시는 모습을 보며 86세 나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묵향의 품위가 물씬 풍겼다.

코로나 확산으로 모두가 힘들어할 때 선생은 산수(傘壽)가 훌쩍 지났음에도 랜선 하나에 당신의 음성으로 영상강의를 직접 하며 많은 이들에게 서예의 올바른 정보를 알려줬다. 이미 유튜브에 올린 영상은 67개였고, 구독자도 600명을 넘어서고 있는 효계 박성호 선생. 이외에도 독학으로 컴퓨터는 물론 논어 강의와 영어회화까지.

"요즘 세상은 마음만 먹으면 공부하기 참 좋아"라며 호탕하게 웃는 호계 박성호 선생을 보며 선생의 배움은 과연 어디까지일까를 생각했다.

"젊어서는 애들하고 먹고살려고 뛰다 보니까 그냥 호화공생을 했고, 먹을 길이 트니까 이 사회를 조금 변화시키려고 청년 운동을 시작했지. 한때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아 도와줘야겠다고 해서 정치에 발을 들여놓기도 했어. 그런데 정치는 내 갈 길이 아니구나 싶더라고. 그러면 내 능력에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해서 공부를 시작한 거야.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이야. 아주 죽을 때 눈 딱 감고 죽을 거야. 뒤도 안 돌아보고... 절대 뒤도 안 돌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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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호 선생이 부채에 한시를 쓰고 있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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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5월 가정의 달에 맞춰 선생님을 인터뷰하게 돼 영광입니다. 어린 시절 얘기를 들려주세요.

"우리 부친은 시조를 참 잘했어. 한마디로 선비였지. 모친이 농사일을 다 할 정도였어. 나는 1남 5녀 중 아들로 태어났어. 그러니 얼마나 귀했겠어. 식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지.

대여섯 살인가 청상(靑孀)인 이모와 함께 살았는데 춤을 가르쳐주더라고. 동네에서는 춤 잘 추는 애로 소문이 났어. 공부한 기억은 없고 춤춘 기억밖에 없는 거 같어.
글도 잘 읽었어. 한학자였던 부친이 자랑하느라고 글을 가르쳤지. 7살 때는 할머니 제사 때 축문을 읽을 정도였어. 그때는 서산 우리 동네가 한 100여 호 살았는데 대부분이 글을 못 읽었어. 그런데 웬 어린애가 글을 줄줄 읽어내려가니 신기하거든. 부친도 좋아했고, 칭찬 들으니 나도 좋고."

- 그 정도였으면 공부를 참 잘 하셨겠어요.

"그때는 공부를 몰랐어. 외동아들이라 우리 아버지가 맨날 업고 학교에 데려다줬지. 그런데 그만 중학교 시험에 떨어진 거야. 그러면서 창피 걸 알았지. 동네 형한테 가서 빼기, 더하기, 곱하기, 나누기, 분수를 불과 2시간 동안에 배웠는데 내가 다 깨쳤어. 그때 알았지. '아 공부하면 되는데 안 해서 그렇구나!'

그때부터 공부해서 300여 명 중에서 4등으로 중학교에 합격을 해버렸어. 그걸 알고 우리 애들한테도 기다려주는 부모가 됐어. 자식들 5남매가 다 4년제 대학을 나왔는데 예비고사를 쳐도 무슨 학원이니 어디 다닌 일이 없어. 그저 지 오빠한테나 지 언니한테 배우고 저희 형제랑 같이 공부했지. 막내딸이 동년배보다 1년 먼저 학교 들어갔거든. 대학원부터는 내가 가지 말라 해도 자꾸 가더라고. 지금은 영문학박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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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다위한묵연실’ 실내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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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부모님들이 새겨들어야 할 얘긴 것 같아요. 그나저나 수의사를 오랫동안 하셨는데 혹시 하게 된 동기가 있었나요?

"처음에는 정외과에 진학해 외교관이 되고 싶었어. 그런데 고3 때야. 서산군 총연대장을 맡아 스트라이크를 주도하면서 무기정학을 맞아버렸어. 그때 방황도 참 많이 했지. 그러다 서울농업대학수의학과에 입학했는데 의외로 잘 맞더라고.

졸업하고 공주농고에 발영받고도 사퇴했어. 그때 선생 월급이 쌀 한 짝 반값도 안 됐을 거야. 그런데 이걸(수의사일) 하다 보니까 아주 돈이 생기는 게 짭짤하더라고. 운 좋으면 일주일에 쌀 100짝 값도 벌었지. 선생 안 한다고 인사담당교육감을 찾아갔지. 한 사람 뽑는데 28명 왔다면서 한 시간만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대. 30분 있다 담배 두 보루 사서 들고 가 '저 안 할래요' 하고 돌아서 나왔어. 그 길로 수의사가 됐지.

당시는 농경사회문화였지. 식량부족국가라 유축농업(有畜農業)이 국가부흥의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축산업발전에 길잡이 되고자 이 길을 택했어. 부여 홍천농고, 공주농고 교사 발령받고도 퇴사하고 수의사 길 걸은 사람은 드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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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을 더듬을때마다 새롭다는 박성호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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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 수의사 하시면서 청년 운동 시작하신 거예요?

"그랬지. 청년 운동을 시작하면서 느낀 게 있어. 청년들이 무슨 회의 진행 하나 제대로 못 하더라고. 그래서 '질서 있게 만들어서 청년들의 질을 높이자'해서 내가 서산JCI를 창립했지. 초대회장과 2대 회장을 역임했어. 아마 창립회장이 여직 살아있는 건 전국에서 유일하게 나 하나일 걸. 벌써 50년이 지났어. 그러다 얼마 있지 않아 정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지.

1974년 고 육영수 여사 시해 당시 나는 서산시청 앞에 5만여 명의 군민을 모아놓고 문세광 규탄궐기대회를 열었어. 내 나이 38살 때였는데 그때 나를 대회장으로 시키더라고. 새마을학교, 향토민방위대 정신교육 강사로 서산·태안 지역을 순회하면서 활동하기도 했어.

그러다 김종필, 정주영 회장의 권유를 받고 정치계에 입문했지. 제13·14대 총선에 출마한 바 있기도 했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 정치권의 탁류(濁流)를 보며 환멸을 느꼈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병원 운영에 집중하며 서예공부를 시작하게 됐지. 한국 최고 서예가 김응현 선생에게 사사받고 지금까지 이 길을 가는 거야. 봉사도 하면서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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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호 선생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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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년 전부터 봉사를 하셨는데 그 당시 얘기 좀 해주세요.

"나는 주로 학생들을 챙겼어. 소아마비 때문에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는 열여덟 살 소녀의 딱한 사정을 듣고 서울 종로까지 가서 거금을 들여 휠체어를 사주며 '태양을 머리에 이고 살라'고 했어.

그때는 다들 어려운 시기였잖아. 사는 게 힘든 아이들을 보면 우리 집에 데려와 밥을 먹이고 학자금을 주며 취직까지 시켜줬어. 내 자식 같잖아. 조금만 거둬주면 밝은 세상이 펼쳐지는데 방관하는 것은 어른의 도리가 아니지.

동물병원을 하면서도 왕진을 나가다 보면 힘든 집이 아주 많았어. 그러면 다 퍼주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지. 눈으로 보는데 할 수 없잖아. 오죽하면 입고 간 옷도 벗어주고 올 정도였는데 뭐.

겨울에 이불 없이 사는 집에는 소달구지에 솜이불 10채를 담아 보내기도 했어. 참 지지리도 가난했지. 그래도 밥숟가락이나 뜨고 사는데 힘 닿는 데까지 돕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집에서 핀잔하면 하다 말잖아. 우리 집사람은 안 그랬지. 참 마음이 넓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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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들이 세운 입상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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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러셨군요. 그런 사모님을 2년 전 저세상으로 떠나보내셨는데 그 마음이 어떠셨는지요?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아파. 갑작스럽게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어. 당시 중증이라 가족들이 요양병원을 생각하더라고. 절대 안 될 말이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23살에 중매로 만나 62년간 힘들어도 늘 곁을 지켜준 사람인데 떠나보내는 날까지는 내 옆에 두는 게 맞는 거지.

아침저녁으로 깨끗이 닦아주고 스킨, 로션에 에센스까지 챙겨줬어. 또 항상 쓰다듬어주고 사랑한다는 말도 아끼지 않았지. 그래봐야 오래 함께하지 못하잖아. 내가 8개월 동안 병간호를 했는데, 정말 여한이 없이 보냈다고 봐.

집에서 가까운 곳에 묘를 썼어. 매일 두 번씩 찾아가서 애틋한 마음을 전했지. 평생을 함께한 반려자를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은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야. 그때 그리운 마음을 담아 묘지에 한시를 지어 바쳤어.

옛날이나 후세에도 썩지않을 마누라
정정지모의 요조숙녀
간사함이 없고 후덕하며 삼종지덕에 친척과 화목함이 이조에 여인이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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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예가 曉溪(효계) 박성호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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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이 어버이날이었죠. 돌아가신 아버님을 위해 본인 손가락에 피를 내어 마시게 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얘기 좀 들려주세요.

"내 나이 마흔이었어. 한학자였던 아버지 연세는 일흔셋이었고. 편찮으신데 병명을 모르는 거야. 늦둥이로 나를 낳다 보니 평생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어. 늘 '성호야~ 성호야~' 불렀지.

어느날 아버지가 돌아가신다고 사촌 형이 부르더라고. 옛날에는 피를 먹이면 산다는 얘기가 있었어. 밖에 나가 손가락을 칼로 베려고 하는데 아프니까 자꾸 손가락이 도망가더라고. 도망가지 못하게 책상에 놓고 칼로 네 손가락을 베었어. 그놈을 소주잔에다 짰지. 피를 받아다가 (아버지)먹여 드렸는데 한참 있다 살아나는 거야.
급하니까 하얀 반창고를 손가락 4개에 감았어. 

아버지가 살아나셨으니까 형이 아버지 친구분께 얘기를 했나봐. 아버지가 나를 보며 '이 바보 같은 놈아, 죽을 사람이 자식의 피를 먹고 산다면 자식을 잡아먹는 사람이 되지. 너 바보지? 자연과학을 공부한 사람이 맞냐'며 눈물을 철철 흘리시더라고. 그렇게 일주일 딱 더 사시다 돌아가시더라.

우리 어머니는 달랐어. 여든셋에 치매가 와서 3년 앓다 돌아가셨지. 아마 산소 가면 우리 아버진 '성호 왔냐~' 하실 거고, 우리 어머닌 '이 새끼 나한테 핀잔하더니 지금 사 왔냐'고 할 거야. 어머니는 똥 싸서 내게 집어던지지, 방에 불 놓지, 독한 가축약을 마셔서 여차하면 병원으로 달려가 위세척까지 하지. 그때는 핀잔이 절로 나오더라고. 지금 생각하면 참 슬픈 일들이야. 5월이 되니 두 분이 참 그리워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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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유튜브에 올린 영상은?67개였고,?구독자도?600명을 넘어서고 있는 효계 박성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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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도 위암으로 3번씩이나 수술을 받으셨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건강하셔서 86세에 유튜브에서 논어까지 강의하십니다. 어디서 그런 열정이 생기는지요.

"열정은 배움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 배워서 남 주자는 말도 있잖어. 뭐든 나눔이 좋더라고. 이런 마음가짐이 바로 열정이고 젊음이지. 젊음은 나이로 가늠하는 게 아이야.

내 신조어는 '마음껏 즐겨라.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남을 배려하라. 나에게 싫은 거 남에게 시키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자유·평화·행복을 조금 나눠줘라. 받을 것만큼 나누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야.

나는 한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았지만 돌아가신 선친 덕분에 한자를 가까이하게 됐고 취미로 유교 경전인 논어·맹자·중용·대학의 사서와 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인 오경을 탐독했지. 하다가 문화원장의 권유로 논어 강좌를 맡게 됐어. 참 좋아. 배우면서 가르치고 가르치면서 또 배우고... 이게 바로 교학상장(敎學相長)이지."

- '초고속 한자서예비법 효계 박성호' 유튜브 방송을 운영하며 현재 구독자가 606명이며 동영상은 67개나 올려져 있던데 이 얘기 좀 해주시죠?

"요즘은 유튜브가 대세야. 서예 강의를 촬영해 올리는데 하면 할수록 참 재밌어. 내가 올리는 건 딴 게 아니야. 단 한 사람이라도 내 방송을 보고 서법을 바르게 배우길 바라는 마음에서 올리는거야. 내 비법은 바로 속성지도야. 한문서예가 절대 어렵지 않도록 강의하는 게 기술이지. 나는 앞으로도 서예 입문자에게 가이드 역할을 하고 싶어.

논어에 이런 말이 있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능치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이것은 곧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거지. 나는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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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들이 세운 입상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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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서산시 음암면 안다위골에 위치한 안다위한묵연실은 '재능기부를 하면서 여생을 보내겠다'는 각오로 지난 2003년에 개원했어. 벌써 20여 년간 무료로 정통서예를 보급해오는 산실이지. 아름다운 산새 속에 호젓하게 자리한 우리 서실이야말로 바로 서예의 확장성과 질적 삶을 드높이는데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곳이라고 봐.

올해로 벌써 30여 년이야. 그동안 서예에 매진해오면서 매년 서예전을 개최해 서산·태안 지역의 서예 지도자 300여 명을 배출했어. 전국 공모전 대상도 놓치지 않았지. 또 서화국제교류전, 한중일서예교류전 등에 참여해 작품성을 높이기도 하고 말야. 국내 유일 비림박물관에 다수의 수비작가를 배출한 성과는 눈여겨 볼만하지.

이런 산실을 코로나로 인해 바꿔놨어. 대면으로 접하는 강의를 잠정 중단하고,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것들을 모아 전시관으로 꾸미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상강의 촬영 장소로 활용하기도 했어. 이른바 지역 문예의 산실이라고 봐야지.

이제 코로나 거리두기 일상도 어느 정도 풀렸어. 다시 처음 의도대로 안다위한묵연실로써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지."

선생의 마지막 꿈은 아주 단순했다.

"내가 아는 것 중에 쓸 만한 게 있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다 전달해 주는 거야. 그것밖에 없어. 오래 살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빨리 죽고 싶지도 않아. 사는 데까지 살고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사는 게 내 꿈이야. 그리고 죽을 때 눈 딱 감고 죽을 거야. 뒤도 안 돌아보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태그:#서예가호계박성호선생, #정통서예, #안다위한묵연실, #유튜브강의_수의사, #초고속한자서예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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